“한국 저출산·출퇴근 전쟁, 하이브리드 근무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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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글로벌 기업들이 이른바 ‘근태(勤怠) 전쟁’으로 골머리를 앓은 한 해였다. 코로나 사태가 물러가고 엔데믹에 접어들자 재택근무를 폐지하려는 경영진과 사무실 복귀를 거부하는 직원들 사이의 줄다리기가 연중 이어졌다.
지난 5월 아마존 직원 1000명은 ‘주3일 사무실 근무’에 반발하며 파업에 나섰다. 구글 직원들은 본사 근처 숙박 혜택으로 출근을 유도하는 사 측에 ‘고맙지만, 됐어(No, thank you)’라는 밈으로 응수했다. 직장을 놀이터처럼 꾸민 ‘꿈의 오피스’로 유명한 실리콘밸리마저 사무실 출근을 거부하면서 ‘어디서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논쟁이 계속되는 근무 형태에 대한 현답을 듣기 위해 WEEKLY BIZ는 니컬러스 블룸(50) 스탠퍼드대 경제학과 교수를 화상으로 만나 기업과 근로자를 모두 만족시킬 ‘스윗 스폿(sweet spot)’을 물었다. 지난 20년 간 재택근무와 기업 생산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파헤쳐 온 블룸 교수는 코로나 사태 이후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블룸 교수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그는 “기업, 근로자, 사회 모두가 ‘윈·윈·윈’하며 3각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재택근무와 사무실 근무를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근무’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이브리드 근무란 일주일에 3~4일(통상 화·수·목)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나머지 1~2일(월·금)은 원격으로 일하는 업무 방식을 말한다. 효율적인 중간 타협안으로 통한다.
블룸 교수는 “하이브리드 근무가 정착되면 기업은 사무실 유지비를 줄이고 직원 퇴사율을 낮출 수 있으며, 근로자는 지하철과 광역 버스에서 허비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며 “사회적으로는 도심 과밀화도 해소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아이를 돌보면서도 업무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처럼 저출산 고령화를 겪는 나라에서 경제 활동 참여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블룸 교수는 지난해 블룸버그통신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 50인’에 선정됐다. 국제통화기금(IMF), 월스트리트, 빅테크 기업은 물론 세계 주요 언론이 근무 형태에 관한 통찰을 얻으려고 그를 찾는다. 블룸 교수는 “나는 오직 경제학적 관점에서 하이브리드 근무가 기업에 돈을 벌어다 주기 때문에 지지할 뿐, 노동 운동이나 정치적 목적으로 제안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재택근무 확산은 미국 노동 시장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100% 사무실 출근으로 회귀 못 한다”
-재택근무 확산으로 오피스 타운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전까지 재택근무는 소수의 전문직 종사자가 가끔 하던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주로 아픈 아이를 돌보거나, 집에 배관공을 부르기 위해서였죠. 2019년까지 7% 수준이었던 미국의 원격 근무 비율은 코로나로 2020년 61.5%까지 치솟았어요. 이 수치는 올해 6월 기준 28% 수준입니다. 사무실 복귀가 꽤 이뤄졌지만, 100% 사무실 출근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얘기죠. 상업용 부동산 시장이 큰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미국 부동산 정보업체 코스타에 따르면, 지난 3분기 뉴욕(13.4%), 런던(9%), 샌프란시스코(20%) 공실률은 최근 20년 사이 최고치를 기록했다.
-북미와 유럽에서 사무실 복귀가 빠르게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불가능해 보였던 원격 근무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장점이 많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에는 재택근무를 하려면 종이 뭉치가 가득한 서류 가방을 짊어지고 다녀야 했어요. 1990년대에는 플로피 디스크와 팩스가 필요했습니다. 이제는 초고속 통신망과 줌(화상회의 플랫폼), 드롭박스(클라우드 기반 파일 공유 서비스), 슬랙(협업 소프트웨어)이 있어요. 첨단 기술로 원격 근무의 이점을 충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3년간 원격 근무 비율 그래프는 ‘나이키 상표 모양’을 그리고 있다. 줄어들다가 다시 늘어나는 추세다. 블룸 교수는 “원격 근무를 향한 ‘빅 시프트’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했다. 원격 근무 통계를 제공하는 기업 플렉스 인덱스가 지난 10월 미국 회사 5565곳을 조사한 결과, 하이브리드 근무 비율(62%)은 사무실 풀타임 근무(38%)를 압도했다.
◇100% 재택근무는 생산성에 재앙
블룸 교수는 하이브리드 근무의 효율성을 실험으로 검증해 본 적 있다. 그는 2010년 중국 여행 플랫폼 시트립(현 트립닷컴) 회장이던 량젠장(梁建章)과 함께 현장 실험에 나섰다. 두 사람은 트립닷컴의 콜센터 직원 249명을 추려 생일이 짝수인 직원은 하이브리드 근무(4일 재택+1일 출근), 홀수인 직원은 100% 사무실 근무를 하도록 했다. 9개월 뒤 하이브리드 근무 직원이 사무실 근무 직원보다 성과가 13%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사무실 밖에서 일하면 딴짓을 많이 하지 않나요.
“재택근무의 세 가지 적은 침대, 냉장고, 텔레비전이란 말이 있죠. 하지만 실험 결과는 그렇지 않았어요. 최근에도 트립닷컴의 엔지니어·회계사·개발자·마케팅 직군 1600명을 대상으로 재택근무 실험을 했는데요. 근무 도중 자녀를 돌보거나, TV를 보는 ‘딴짓’ 시간은 평균 1시간이었습니다. 출퇴근길에 허비하는 1시간 30분보다 오히려 30분을 더 일한 거죠. 게다가 집이 사무실보다 훨씬 조용해서 집중하기가 쉬웠고요. 결과적으로 업무 효율이 올랐습니다.”
블룸 교수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루 중 출퇴근을 가장 싫어하고, 일주일에 2~3일을 집에서 일할 수 있다면 월급을 일부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다”며 “경영진은 직원 한 사람이 그만둘 때마다, 신규 인력을 뽑고 교육시키는 데 2만달러 이상 비용이 들기 때문에 하이브리드 근무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블룸 교수는 하이브리드 근무가 시대의 대세라고 주장하면서도 “100% 재택근무는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며 선을 그었다. 재택과 사무실 근무를 적절하게 병행해야만 최적의 효율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블룸 교수는 “여러 차례 현장 실험을 진행해 보니 100% 재택근무는 직원들의 고립감을 키우고, 조직 관리에 문제가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그리고 여전히 경영진은 직원의 근면 성실함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길 원한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는 “재택근무는 단지 생산성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했고, 데이비드 솔로몬 골드만삭스 회장도 “재택근무는 뉴노멀이 아니라 일탈일 뿐”이라고 했다.
-경영진은 왜 재택근무를 싫어할까요.
“정확히 말하면 ‘100% 재택근무’를 싫어하는 겁니다. 완전 재택근무 체제가 오히려 생산성에 해가 되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죠. 직원이 흩어져 있으면 혁신 실험이나 조직 문화 구축이 어려워요. 주니어 직원은 업무를 제대로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완전한 원격 근무는 오히려 기업 생산성을 10% 정도 떨어뜨려요. 하이브리드 근무는 달라요. 사무실 풀타임 근무와 생산성에서 차이가 없거나 소폭 낫고, 직원 만족도를 높여 퇴사율을 크게 줄여줍니다.”
◇불금이 사라졌다, 교외가 살아났다
재택근무는 도시와 삶의 풍경을 바꾼다. 지난 3년간 사람들의 근로 패턴이 달라지자, 소비 지형에도 파괴적 전환이 일어났다. 일하는 지점이 바뀌면서 언제, 어디서, 먹고, 마시느냐의 기준점이 이동했다. 시장에는 승자와 패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블룸 교수는 원격 근무 시대의 3대 패자(敗者)로 상업용 부동산, 대도시 시장, 대중교통을 꼽는다. 블룸 교수는 “사람들이 금요일이면 도심을 떠나 교외에 몰리는 ‘도넛 효과’로 인해 소비 행태가 바뀌고 있다”고 했다.
-‘불타는 금요일’이 과거의 유물이 되어 갑니다.
“뉴욕의 가장 큰 개인 건물주로 꼽히는 보네이도 리얼티 트러스트의 스티븐 로스 회장이 얼마 전 ‘금요일 사무실 근무는 영원히 죽었다’고 말했죠. 사람들은 이제 목요일 밤에 술을 마시고, 금요일은 느지막이 일어나 집에서 일하는 날로 여겨요. 직장인을 겨냥한 점심 레스토랑이 매출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었죠. 요즘 젊은 직장인들은 집에서 원격 근무를 마치고 해가 지면 도심으로 외출해 저녁을 먹어요.”
실제로 마스터카드 경제 연구소가 런던의 레스토랑·술집 지출 내역을 살펴본 결과, 일주일 중 외식·유흥 소비가 정점을 찍는 요일이 올 들어 금요일에서 목요일로 바뀌었다.
-도심 대신 교외 상권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도심 공동화로)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가 세수(稅收) 감소와 범죄·노숙자 문제로 고심하고 있죠. 뉴욕 메트로폴리탄교통국(MTA)은 통근자 감소 위기를 겪고 있어요. 그러는 사이 사람들은 교외에서 돈을 쓰고 있어요. 원격 근무가 많은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교외에서 밥을 먹고, 장을 봅니다. 인구 밀도가 높은 아시아 도시는 이런 현상이 특히 뚜렷하게 나타나요. 재택근무가 아시아 사회가 직면한 인구 위기와 도시 과밀화를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재택근무가 사회문제를 해결한다고요?
“어린 자녀가 있거나, 나이가 많고 은퇴가 임박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통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현재 한국은 국가 소멸 얘기가 나올 만큼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잖아요. 장시간 근무, 장거리 출퇴근이 저출산의 원인 중 일부로 꼽힙니다. 그래서 재택근무는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사회·경제적 해결책이 될 수 있어요. 일주일에 2~3일 재택근무를 허용한다면 육아 부담에 주저하는 신혼부부를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블룸 교수는 “재택근무는 도심 과밀화를 완화하고, 사람들이 교외의 더 넓은 거주 공간에서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해주는 장점도 있다”고 했다. 그가 꼽은 원격 근무의 핵심 수혜층은 IT·금융·출판·보험·전문직에 종사하는 14세 미만 자녀를 둔 3040 직장인이다.
현재 재택근무는 아시아보다는 서구권 기업을 중심으로 정착하는 추세다. 블룸 교수가 이끄는 스탠퍼드대 연구팀이 멕시코기술자치대(ITAM)·독일 IFO 연구소와 함께 전 세계 직장인 4만2426명 대상으로 실시한 재택근무 실태 조사에서, 한국의 재택근무 일수는 지난 4~5월 기준 주당 평균 0.42일로 34국 중 꼴찌였다. 상위 1~5위국은 캐나다(1.67일), 영국(1.53일), 미국(1.35일), 호주(1.27일), 독일(1.04일) 순이었다. 중국(0.8일)과 일본(0.54일)도 한국보다 원격 근무를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블룸 교수는 “한국은 인구 밀도가 높고, 출산율이 낮으며, 고학력자가 많은 데다, 통신망이 잘 갖춰져 있어 재택근무에 적합하다”며 “재택근무가 정착되면 교외 주택 수요가 늘어 집값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강남을 비롯한 일부 도심의 집값 과열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얘기다.
◇결과 중심으로 성과 평가 바꿔라
하이브리드 근무 체제를 위해 기업들은 성과 관리 방식을 바꾸고 있다. 블룸 교수는 “직원 컴퓨터 화면에 넷플릭스가 아니라 워드와 엑셀 프로그램이 띄워져 있는 걸 보며 만족하는 ‘대면 관리 방식’은 10점 만점에 5점 수준”이라며 “기업 관리자는 근무시간이나 투입한 노력 같은 ‘인풋’보다는 ‘아웃풋’ 중심 평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직원 컴퓨터를 감시하는 프로그램을 까는 기업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선 재택근무 직원을 그런 식으로 감시하는 걸 무척 사악한 일로 여깁니다. 다국적 기업은 결과물에 집중해 성과 리뷰, 360도 피드백, 고객 평가를 하고 있어요. 원격 근무가 확산하면서 요즘에는 주중에 골프 치는 사람도 크게 늘었어요. 성과만 잘 낸다면, 월요일 낮에 세 시간씩 골프 치면 어떤가요. 저녁에 세 시간 더 일하겠죠. 그건 그 직원의 선택입니다.”
-여전히 ‘무거운 엉덩이’가 평가 척도인 곳도 많은데요.
“제가 관리자라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당신이 하는 일을 매 순간 지켜보지는 않을 거예요. 한 시간 동안 아이를 돌보고, 치과에 가거나, 낮에 조깅을 하거나 골프를 쳐도 됩니다. 판매 목표를 달성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디자인을 완성하기만 하면 됩니다.’”
블룸 교수는 20대 후반에 영국재정연구소와 컨설팅 회사 맥킨지에서 일했다. 그는 “경영 컨설턴트 시절 월요일 아침 6시에 출근하고 나면 호텔에서 숙식하며 목요일 밤쯤 집에 돌아오곤 했다”며 “솔직히 20대 때에는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참을 수 있었지만, 마흔다섯에도 매주 90시간씩 일하면서 아내도, 친구도 못 만나는 삶을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현재 캠퍼스에서 자전거로 8분 거리에 살며 하이브리드 근무 방식으로 일한다. 콘퍼런스와 강연으로 인터뷰 직전까지 라스베이거스에 있었고, 그 전에는 노르웨이 오슬로와 LA를 오가며 일했다. 블룸 교수는 “(코로나 사태가 터진) 2020년 3월 이전까지는 내 연구 주제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얘기를 하면 대부분 잠들었지만 이제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지난 3년 반 동안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에릭 슈밋 전 구글 CEO 등 많은 경영자들과 만나며 원격 근무 혁명을 체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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