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예감] 왕이 직접 챙겼다는 ‘동지’, 왜 이렇게 중요한 날일까 – 이한 작가(역사커뮤니케이터)

KBS 2023. 12. 2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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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라디오에 있습니다.
전문 게재나 인터뷰 인용 보도 시,
아래와 같이 채널명과 정확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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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에 팥죽 먹는 풍습은 고대 중국에서 유래
- 고대 중국에서는 동지가 설날이었다가 추후 ‘작은 설’(아세)라고 칭해
- 정조, 태종 등이 동지 행사를 직접 챙겨
- 정조 때 제상, 채제공은 80의 나이에도 동지 제사에 참석
- 동짓날엔 구하기 힘든 책력(달력)을 주고 받아
- 조선시대에 음기를 몰아내기 위해 기둥에 팥죽을 바르는 풍습도 있어
- 11월 1일부터 10일 사이에 동지가 있으면 ‘애동지’로 불려
- 크리스마스는 1910년대 조선시대에 들어와
- 1904년 덴마크에서 결핵 환자들을 돕는다는 취지로 크리스마스실이 만들어져
- 김유정, 이상, 김점동, 박에스더 등이 결핵으로 사망해
- 셔우드 홀이 조선의 결핵 퇴치를 위해 애써

■ 프로그램명 : 성공예감 이대호입니다
■ 방송시간 : 12월 21일(목) 09:05-10:53 KBS1R FM 97.3MHz
■ 진행 : 이대호
■ 출연 : 이한 작가(역사커뮤니케이터)


◇이대호> 성공예감 이대호입니다. 2부가 시작됐습니다. 내일이 동지라고 합니다, 동지.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죠. 우리 선조들이 예부터 동지를 잘 챙겨서 팥죽도 꼭 먹고 했었는데 이맘때쯤이면 저희 어머니도 항상 전화를 주십니다. 팥죽 해 먹으라고. 그런데 과연 우리 선조들은 또 크리스마스를 챙겼을까, 언제부터 챙겼을까라는 궁금증도 들고요.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우리 조선시대로 돌아가 보는 시간입니다. 이한 작가와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이한> 안녕하세요.

◇이대호> 이한 작가님도 팥죽 챙겨드세요, 동지에?

◆이한> 당연히 챙겨 먹습니다. 좋아해요.

◇이대호> 그래요? 그런데 이게 동지에는 팥죽이다. 팥죽을 챙겨 먹어야 된다. 이게 언제부터 시작된 거예요?

◆이한> 역사로 따진다면 아주 먼 고대 중국에서부터 시작한 풍습인데요.

◇이대호> 고대 중국.

◆이한> 네. 왜냐하면 동지는 밤이 제일 긴 날이잖아요. 그래서 그 옛날부터 믿음이 음의 기운이 가득 찬 날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의 날씨는 겁나게 추워야 된다는 게 옛날부터의 믿음이었거든요.

◇이대호> 지금 그렇게 추운데요.

◆이한> 네. 오히려 동짓날 날이 따뜻하면 이거 이상 기온이다라고 그렇게 사람들이 쓴 것들이 남아 있어요.

◇이대호> 조선시대에도 이상 기온이다, 이런 말이 있었어요?

◆이한> 겨울에 꽃 피거나 그런 게 있는데.

◇이대호> 그래요?

◆이한> 동짓날에 따뜻하면 사람들이 이거 이상하다라고 얘기해서 이즈음에 날씨는 아주아주 추운 것이 정상으로 믿어왔습니다.

◇이대호> 밤이 제일 기니까 가장 추워야 하고.

◆이한> 그렇죠. 또 사람들이 무서워했던 게 밤이 길어지다가 이렇게 더 길어지면 어떡하나. 지금 우리는 태양이 한 바퀴를 도니까, 지구가 태양을 도니까 이제 다시 낮이 길어진다는 걸 알고 있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걸 몰랐기 때문에 이때 양기를 먹어서 음기를 쫓아내야 한다. 그렇게 믿어왔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팥죽은 팥이 붉은색이잖아요.

◇이대호> 네. 붉은색.

◆이한> 붉은색이 양의 색깔이라고 태극기에도 나와 있죠. 그래서 이 팥죽을 먹어서 양의 기운을 살려서 나쁜 걸 쫓아내고 건강하게 살자. 그것이 바로 동짓날 팥죽의 기원입니다.

◇이대호> 밤이 제일 긴 날이 음기가 가장 강하다. 그래서 그걸 쫓아내기 위해서 붉은 팥 가지고 팥죽을 쑤어 먹었고. 그런데 이게 되게 신기하게 동지에 그래서 팥죽을 먹으면 신기하게 음기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게 밤이 짧아지잖아요, 그때부터.

◆이한> 그래서 요즘은 많이들 안 쓰는데 옛날 어르신들이 일양내복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대호> 이거 내복 이름 아니고.

◆이한> 아닙니다.

◇이대호> 일양내복.

◆이한> 네. 하나의 양이 다시 돌아온다, 그런 뜻인데. 이게 숙어로는 나쁜 것이 점점 좋은 쪽으로 바뀐다는 뜻인데 이게 바로 동지에서 왔습니다. 음이 가득 찬 세상에서 양 기운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래서 일양내복이라는 걸 옛날 사람들이 동짓날 시를 쓰면 꼭 일양내복, 그런 이야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대호> 그래서 음기가 절정에 달한 동지가 어떻게 보면 양기가 더 채워지기 시작하는 날로 볼 수도 있는 거네요.

◆이한> 그래서 고대 중국인은 동지가 설날이었어요. 그래서 그때서부터 말이 되는 게 결국 1년이라는 것이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인데 그런 기준이 되는 게 가장 짧은 날일 수도 있겠죠. 옛날에는 그 동지가 설날이었다가 지금 설날로 바뀌게 되고 대신 동지가 가진 별명이 아세, 작은 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 어르신들 중에서는 작은 설, 작은 설, 그렇게 얘기하신 분들이 있어요. 저희 이모님들도 그렇고.

◇이대호> 동지를 작은 설이다.

◆이한> 그래서 설날, 그 동짓날에 그 팥죽을 먹어야 나이가 먹는다, 그런 믿음이 조선시대 때만 해도 있었습니다.

◇이대호> 그래서 동지를 24절기 중에 되게 좀 중요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뭔가 진짜 새해가 시작이 되고 밤낮의 길이도 바뀌기 시작을 하니까. 그런데 우리 항상 박미영 님이 어려운 질문을 갑자기 주세요. 우리 요리 연구가도 아니신데. 저도 그런데 궁금해서 여쭤볼게요. 팥죽에 새알심 있잖아요. 동그랗게 떡 말아서 넣는 거. 이건 언제서부터 넣어 먹은 걸까요? 혹시 아세요?

◆이한> 조선시대 때도 넣어 먹었습니다.

◇이대호> 그게 기록에 나와요?

◆이한> 네. 새알심을 한자로 바꾸면 조란심.

◇이대호> 조란심.

◆이한> 새 조자에 심장 심자에 마음 심자 써가지고. 그런데 생강즙을 넣어서 찹쌀을 반죽해서 그걸 그걸 넣어서 먹었습니다.

◇이대호> 이한 작가님은 모르시는 게 없네.

◆이한> 아니, 찾다 보니까 다 나오더라고요.

◇이대호> 그래요? 그래서 조선시대 때도 새알심을 넣어서 먹었다. 조란심.

◆이한> 한자로 쓰면 똑같아요. 새알심.

◇이대호> 그러네요. 요리 연구가신 줄 알았습니다.

◆이한> 한 번 어쩌다 보니. 그래서 워낙은 동지가 굉장히 엄숙한 날이기 때문에 주역에 나와 있어요.

◇이대호> 주역에도 나와 있어요, 동지가?

◆이한> 둥지에는 그 왕도 행차를 하지 않고 시장도 다 닫고 꽁꽁 숨어 있는 그런 굉장히 엄숙한 날이었는데 지금이야 그냥 팥죽 먹는 날이죠.

◇이대호> 엄숙한 날이었어요?

◆이한> 네. 또 동지 되기 전에 무슨 형벌이라든가 그런 걸 전부 다 맞춰야 돼요. 그래서 굉장히 바빴습니다.

◇이대호> 네? 형벌을 동지가 되기 전에 맞춰야 돼요?

◆이한> 형벌 같은 걸 동지에 맞추고 그다음에 감옥에 있는 사람도 웬만하면 동지 이후에는, 다 동지 이전에 전부 풀어줘서 집으로 보내거나. 그런 식으로 굉장히 한 해의 마무리, 실질적인 마무리 날이었습니다.

◇이대호> 그러니까 저기 곤장 100대 맞아야 되는 누가 죄인이 있으면 동지 날 때리는 게 아니라.

◆이한> 그 전에.

◇이대호> 동지 되기 전에 때려야 된다.

◆이한> 그렇죠, 뭐.

◇이대호> 그런 것도 있었네요. 그런데 아까 되게 뭔가 엄숙한 날이라고 동지를 표현해 주셨는데. 참고로 우리 지금 최근 시간으로 내일입니다, 내일. 동지. 조선시대에는 왕이 동지를 직접 챙겼어요?

◆이한> 왕이 제사를 지내는 행사가 몇 개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동지이거든요. 동지에 조선시대 왕은 황제의 옷인 면복을 입고.

◇이대호> 면복.

◆이한> 네. 신하들은 전부 금관조복을 입고 아침에 행사를 하는데. 이 정조 때의 사람인 채제공이 남긴 글을 보면 해가 뜨기 전인 새벽에 쭈르륵 서서 제사를 지내거든요.

◇이대호> 해 뜨기 전에요?

◆이한> 네. 그래서 겁나게 추웠습니다.

◇이대호> 그렇죠. 동지 때니까.

◆이한> 그래서 굉장히 추워하면서 남긴 글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 동지를 무척 열심히 챙긴 사람이 아까 말한 채제공의 왕인 정조였습니다.

◇이대호> 정조.

◆이한> 정조가 굉장히 동지를 열심히 챙겨서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나와 있어요. 동지는 설에 버금간다. 설과 같다.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서 열심히 챙겼고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에까지도 제사를 치러주고, 동짓날에. 그랬습니다.

◇이대호> 정조가 뭔가 역사적으로 되게 뭔가 효자로 많이 알려져 있잖아요. 제사 많이 지내고 잘 챙겼다. 동짓날도 빼놓지 않고.

◆이한> 그냥 자기가 좋아서 챙긴 것 같기는 합니다. 말했듯이 그 동지가 워낙 유교에서 중요한 행사날이기 때문에 흔히 정조라고 하면 우리가 실학의 왕,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지만 굉장히 유교를 리스펙트 했던 사람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동지가 중요하게 여겼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왕이 창덕궁에 있었는데 이 동지 행사를 하기 위해서 저쪽 경희궁에도 가고 중위전이 지금 명동 성당 근처입니다. 거기까지도 행차를 여러 번 하면서 나온 김에 백성들도 만나고 종로에도 가보고 그러고 여러 행사를 했습니다.

◇이대호> 동짓날이요

◆이한> 동짓날에.

◇이대호> 그러니까 제사를 해 뜨기 전에 새벽같이 지내고 또 행차도 하고 그런데 제일 추운 날.

◆이한> 큰아들은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

◇이대호> 그 기록에 너무 추웠다. 막 하기 싫어 죽겠는데 막 이런 얘기도 나와요.

◆이한> 차마 못하죠. 차마 못하는데 아무리 봐도 힘들었을 것 같은 기록이 채제공이 쓴 글에 남아 있습니다.

◇이대호> 채제공.

◆이한> 이 채제공은 영화나 드라마에 항상 나오는 분인데.

◇이대호> 정조 시대 재상이었다고요.

◆이한> 사도세자의 스승이자 정조의 스승이기도 했고 정조 때 내내 혼자서 홀로 재상이었던 사람입니다.

◇이대호> 좀 더 그럼 나이가 더 많으신.0

◆이한> 한 25살인가 더 연상인데 정조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죠.

◇이대호> 정조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어떤 식으로 그럼 그런데 되게 재상이면 이건 제사 같은 게 당연히 빠지면 안 되고 본인이 주관도 해야 되고 막 이런 위치잖아요.

◆이한> 이분이 출신이 남인이거든요. 당파 출신이. 그렇기 때문에 약간 좀 정치적으로 약간 운신의 폭이 좁았던 편인데 정조 7년에 채제공이 나 벼슬 안 하겠다 하고 나와 있었는데 정조가 그 동지 제사를 치르고 돌아온 길에 그 창덕궁 그 다리 하나에 가마를 딱 멈추고 채제공을 불러요. 집에 있는 채제공한테 나와 봐라.

◇이대호> 집에 있는데.

◆이한> 나와라. 빨리 나와라. 그래서 채제공이 어떡해요 나와야지 왕이 나오라고 하는데.

◇이대호> 그때가 나이가 채제공 나이가 80세 뭐.

◆이한> 아니, 80세는 아니고 그때는 한 60살, 환갑 좀 넘었을 때.

◇이대호> 그런데 일단 좀 몸이 아파서 누워 있는데.

◆이한> 그렇기도 하거니와 그때는 그 노론, 소론들한테 밀려서 나 정치 안 하겠다 그러고 있던 와중이었는데.

◇이대호> 피곤하다.

◆이한> 나와라.

◇이대호> 그런데 정조가 굳이.

◆이한> 그래서 부랴부랴 나가니까 정조가 씩 하고 웃으면서 왜 이렇게 심하게 나와 그냥 집에 가서 쉬어 자기가 불러놓고.

◇이대호> 뭔 말이에요, 이게.

◆이한> 그러니까 자기가 불러 나오라고 계속 재촉해서 부랴부랴 나오니까 굳이 나올 것까지야 그냥 날도 추운데 들어가서 쉬어 그런 말을 한 거죠.

◇이대호> 하여튼 높은 사람들.

◆이한> 그런데 채제공이 왕께서 나를 이렇게 예뻐해 주신다라고 썼지만 이렇게 자세한 사연을 적어놨다는 것은 좀 그렇죠.

◇이대호> 그게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되는 거고.

◆이한> 실록에는 안 나와 있고 채제공 본인이 써서 남겼습니다. 실록에는 안 나와 있어요.

◇이대호> 실록에는 안 나와 있고 채제공 본인이 써서 남긴 거예요?

◆이한> 구구절절하게.

◇이대호> 나 쉬려고 그랬는데 정조가 그냥 나 자꾸 불러내고 또 추운데 나갔더니 그냥 쉬시죠. 왜 나오셨어요 또 이러고.

◆이한> 그렇습니다.

◇이대호> 그런데 80세 때도 어떤 또 에피소드가 있었다고요.

◆이한> 80세 때는 정말 이분이 80살에 돌아가셨거든요. 정말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대호> 그 해에?

◆이한> 계속 아파서 누워 있는데 정조가 또 계속 얘기한 거예요. 너 오늘 올해 동지 집에서 보낼 거니, 나한텐 너뿐인데 동지 집에서 보낼 거야 이거는 나오라는 말이죠.

◇이대호> 그 당시에 80세면은 진짜 좀 많이 그렇죠. 신체적으로도 힘들 텐데.

◆이한> 그래서 채제공이 답장을 보냅니다. 내가 열심히 낳아서 들것에 실려서라도 가겠다 정말 들것이라고 표현이 있어서 제가 눈을 의심했어요. 여든 노인 분을 그 추운 날 새벽에 동지 제사에 꼭 참석하게 해야겠니.

◇이대호> 제사 지내러 나오라고. 80세 노인한테 아파서 누워 있는 그런데 그 해에 돌아가셨는데.

◆이한> 그렇습니다.

◇이대호> 하여튼 정조가 그 정도로 제사를 중시했다.

◆이한> 채제공을 또 좋게 말하면 예뻐했다 그러니까 예뻐했다기보다는 자기 스승님이니까 아꼈다라는 말도 되긴 하겠지만 제가 볼 때는 노인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게 되죠.

◇이대호> 그러게요. 지금 이선화 님이 정조의 인격이 의심스럽다고 정조가 예전에 저기 배우 성함이 생각이 안 나네. 이산 드라마에서도 되게 막 멋지게 그려졌잖아요, 막.

◆이한> 그렇긴 한데요. 채제공이 아까 얘기한 대로 아버지와 정조 본인의 스승이다 보니 대놓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대호> 이서진 씨, 참 이서진 씨.

◆이한> 왕께서는 성군이시긴 한데 성격이 너무 팍팍해서 문제라고. 그것 때문에 밑에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한다고 그런 얘기를 대놓고 말할 수 있었던 게 채제공이거든요. 그런데 본인도 굴려지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대호> 그런데 참 이서진 씨 얘기 나와서 그런데 우리가 요즘에 고려 거란전쟁에 최수종 씨가 또 주연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 왕의 이미지를 자꾸 주연 배우 이미지랑 겹쳐서 보게 돼서.

◆이한> 어쩔 수 없습니다.

◇이대호>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게. 그런데 정조는 엄숙하게 제사를 꼬박꼬박 지냈고 이 동지를 파티처럼 즐겼던 왕도 있어요.

◆이한> 태종입니다.

◇이대호> 태종 이방원.

◆이한> 태종 이방원은 동지 때문에 그 항상 연회를 거하게 베풀었는데 음악도 틀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음악은 생음악밖에 없잖아요.

◇이대호> 그렇죠. MP3 아니고.

◆이한> 그래서 이렇게 기생들하고 여자들을 불러서 그 사람들한테 음악을 연주하니까 그 태종 이방원의 굉장히 측근이었던 이숙번이 이건 좀 아니지 않느냐 얘기를 하니까 태종이 굉장히 궁색하게 변명을 해요. 아니, 이거는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소박하게 놀려다가 어떻게 그렇게 된 거야라고 구차하게 변명을 했지만 동지 때 계속 그 일가친척, 신하들 다 모아서 즐겁게 놀았고 상대적으로 그의 아들인 세종 같은 경우에는 동지 때 좀 조용하게 지냈습니다.

◇이대호> 물론 태종 이방원 당시에는 조선 초기니까 조선 후기나 이렇게 좀 다르긴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당시에 이 동지에 뭔가 연회를 크게 연 게 사람들 눈에 좋게 보이지는 않았던 거네요.

◆이한> 사실 놀 핑계를 잡아서 놀았다는 것이 더 맞고요.

◇이대호> 그냥 핑계를 삼아서.

◆이한> 세종 때는 좀 더 유교적인 나라의 기틀을 세우면서 연회보다는 이게 망곡례라고 해서 중국의 황제한테 멀리서 황제가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절하면서 예식하는 거 그 정도만 했습니다.

◇이대호> 그래요. 조선시대 때 세종 때.

◆이한> 왜냐하면 동지가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원래 그때 그 황제한테도 인사하고 그런 행사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거에 맞춰서 했지만 역시 세종도 동지 때 놀기도 해서요. 어느 때는 올해는 동지 때가 워낙 추운 때이기 때문에 세종이나 중종이나 왕들이 그때 계속 아파요, 인조. 그런데 동지 때 아픈데 이 세종은 그래도 연회는 해야지 하면서 아픈 몸을 끌고 나와서 동지 때 파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대호> 아픈 몸을 끌고 나와서 파티는 해야지 지금의 말로는 파티. 옛날로는 연회 뭐 이렇게 표현을 했겠죠. 3148님이 지금 설명하시는 분 누구시냐고 역사 커뮤니케이터 이한 작가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이한 작가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러면 중국 쪽에다 대고 절도 했고 사신도 보내고 막 그랬을까요?

◆이한> 사진을 보냈는데 동지에 보내기 때문에 동지사라고 했거든요.

◇이대호> 동지사.

◆이한> 그런데 이게 동지에 딱 맞춰서 가는 게 아니라 동지 때 보내요.

◇이대호> 네?

◆이한> 동지에 딱 맞춰서 보내는 게 아니라 동지 즈음해서 사진을 꾸려서 보내면.

◇이대호> 거의 그러면 새해 될 때.

◆이한> 2~3개월 걸려서 겨우겨우 가고요.

◇이대호> 중국까지.

◆이한> 그리고 또 2~3개월 걸려서 돌아오는데 동지 어느 때는 동지사를 매년 보낸 건 아니거든요. 그렇다 하더라도 어느 때는 새해 맞이 사신을 또 보낼 때도 있기 때문에 이거 여러 번 이렇게 겹쳐서 보내는 건 좀 그렇다 그런 식으로 발언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대호> 아니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중국도 동지를 쇴다고 하니까.

◆이한> 맞습니다.

◇이대호> 동지 때 맞춰서 사신이 오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출발을 동지에 해서 도착하는 날이 그때그때 다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예요.

◆이한> 그게 워낙 중국이 멀고 지금만 하더라도 상상도 안 되겠지만 가다가 사신이 병나거나 죽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딱 거기에 맞춰서 가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데 의의가 있다고 어느 정도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도 되게 가기 싫어했어요.

◇이대호> 사신들도.

◆이한> 장사하는 사람은 가고 싶어 했지만 사진들은 거기 가서 뭐해 그러니까 힘들어 그래서 어떻게든 빠지려고 용을 썼는데.

◇이대호> 그것도 제일 추울 때 가니까.

◆이한> 채제공도 다녀왔습니다.

◇이대호> 그래요. 하여튼 그 사신도 보냈다라는 거고 지금 말씀하신 게 궁중에서도 왕도 엄숙하게 제사를 지냈다, 동지에. 그러면 민간에서는 어땠습니까, 이 동지를.

◆이한> 우선 팥죽으로 시작되겠지만.

◇이대호> 역시.

◆이한>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건 동짓날에 맞춰서 새로 옷을 만들거나 어르신들, 어른들 옷을 만들거나 버선을 만듭니다. 그렇게 하면 이 날이 통해서 재앙을 무찌르고 어르신들이 오래 산다고 믿었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새 옷을 들였고 그다음에 민간에서는 버선을 만들고.

◇이대호> 음기가 가장 많은 동짓날에 옷이나 새 버선을 만들어서 입거나 신으면.

◆이한> 병을 쫓아내고.

◇이대호> 기분이 좋아진다.

◆이한> 나쁜 게 쫓아내고 그런 믿음이 있었던 거죠.

◇이대호> 그래요. 그럼 서로 옷도 선물하거나 위에다 바치거나.

◆이한> 주로 그 자식들이 부모님한테 나이 드신 부모님께 맞췄습니다.

◇이대호> 자식들이 부모님에게 건강해지시라고.

◆이한> 또 동짓날 중요하게 주고받았던 게 책력 그러니까 달력이었습니다.

◇이대호> 달력.

◆이한> 지금은 달력이 굉장히 많이 있어서 저는 처치 곤란일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당연하게도 조선시대 때는 그 달력이 없고 있어봐야 책력이라고 해서 책으로 만든 달력인데 이걸 오로지 정부에서만 만들었습니다.

◇이대호> 하나하나 손으로 이렇게 했을 테고.

◆이한> 아니, 목판 인쇄를 하죠. 그런데 목판인쇄 역시 목판 인쇄도 비싸기 때문에 오로지 정부 고관들이나 관리들만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귀한 선물인데 이걸 동지 때 줘요. 동지력이라고 합니다.

◇이대호> 동지 때 준다. 새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이한> 그리고 얘기했듯이 설날이, 워낙 설날이 동지였으니까. 그래서 굉장히 비싼 선물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거를 받고 싶어서 편지 보내고. 야, 책력 하나만 얻어줘. 부탁해. 얘기를 하는데 굉장히 값진 선물이었기 때문에 이걸 또 동지 때 주고받았죠.

◇이대호> 당시에는 달력을 벽에 거는 게 아니라.

◆이한> 책으로.

◇이대호> 책 형태로, 그래서 책력이라고 했고. 그게 되게 귀한 선물이었고.

◆이한> 뇌물로도 주고받았습니다.

◇이대호> 책력이요?

◆이한> 예.

◇이대호> 그렇죠. 구하기 힘드니까.

◆이한> 그렇죠.

◇이대호> 되게 비싸게도 융통이 됐겠네요.

◆이한> 지금은 다 핸드폰에 달력이 있어서 상상도 안 가죠.

◇이대호> 그런데 조선시대 때는 그러면 동지 때 팥죽을 집집마다 해먹었던 걸까요?

◆이한> 예, 고려 때부터 이미 먹었습니다. 고려 때 이재현이나 그런 사람들이 쓴 글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지 때 반드시 팥죽을 먹는다. 그런 게 고려 말 사람인데 충선왕 때 사람이거든요. 그때 나와 있으니까 이미 그때부터 팥죽을 열심히 먹어댄 것이거든요. 그리고 그 집집마다 팥죽을 끓이는 연기가 나온다, 그런 이야기도 있고. 또 지금은 사라졌지만 동지나 원래 풍습이 집집마다 팥죽을 만들어서 이웃집에 나눠줘요. 그래서 그냥 팥죽이 아니라 팥죽을 또 그냥이 아니라 꿀이랑 같이 먹거든요.

◇이대호> 꿀.

◆이한> 예.

◇이대호> 더 맛있었겠네.

◆이한> 그러니까 팥죽하고 꿀을 같이 갖다 줘요. 그래서 이웃집에서 통통통 문 두드려서 서로 나눠 먹는 그런 좋은 풍습이 있었죠.

◇이대호> 거기서 팥죽에서 새알심 딱 꺼내가지고 꿀에 찍어 먹으면 큰일 났네. 큰일났어요. 지금 팥죽 먹고 싶어가지고. 당시에 그러면 팥죽이 서민 음식이었어요?

◆이한> 굉장히 많은 서민들이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팥죽이라는 게 지금도 알다시피 그냥 불려서 아주 오래오래오래 끓이는 그런 음식이 있잖아요. 지금도 시장 가면 재래시장 같은 데 가면 같은 보이시죠. 커다란 솥에다가, 그리고 테두리 이렇게 빨간색 테두리가 있고 계속 끓여서 내오는 음식이 이미 조선시대 때 그 당시 학원가, 성균관 앞거리에 파는 군것질거리 중에 팥죽이 있었고요. 그리고 그 시장에서 팥죽을 팔고 또 그년대 1900, 지금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때 옛날서부터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 때 돈 벌려고 하는 것이 팥죽 장사였죠. 시장 같은 데서 팥죽 끓여서 파는 것이었습니다.

◇이대호> 그러면 이게 그러면 시장 같은 데서 팔았으면 누구나 쉽게 사 먹을 수 있었던.

◆이한> 한 50판 정도 했다고 합니다. 20판, 50판. 5전 그렇게 할 때도 있는데.

◇이대호> 대략 그럼 한 얼마 정도 되는, 그냥 뭐 한...

◆이한> 가락국수가 한 20판 정도니까 가락국수보다 훨씬 싼 4분의 1 가격, 그 정도입니다.

◇이대호> 그래요. 어찌 됐든 간에 팥죽은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겨울에. 그런데 요즘에는 길거리에서 이렇게 팥죽 끓이거나 아니면 식당에서 팥죽 파는 데들을 그 보기가 쉽지가 않아서요.

◆이한> 제가 옛날에 살던 데는 팥죽 그 가게가 있었는데, 그리고 재래시장 가면 가끔 있죠. 가끔 팥죽. 그리고 지금이 동지가 가까이 왔으니까 아마 시장에서 팥죽을 끓이고 있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팥죽을 기둥에다가 바르는 풍습도 있었어요? 워낙 동지의 풍습이 팥죽을 끓인 다음에 집에서 그 팥죽을 집에 문서 기둥에 바르고 그다음에 장독대나 부엌이나 여러 곳에 두어서 식힌 다음에 그걸 가져와서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대호> 아니, 먹는 팥죽을 기둥에다 왜 발라요?

◆이한> 왜냐 하면 아까 얘기했듯이 팥죽이 붉은색이라서 양의 기운이 있어서.

◇이대호> 음기를 쫓아내고?

◆이한> 쫓아내는 것인데 이게 원래는 진짜 피였을 거예요.

◇이대호> 예?

◆이한> 그 기둥에다가 희생 제물을 바쳐서.

◇이대호> 동물의 피 같은 거.

◆이한> 그거를 원래는 사람이었고, 아주 고대에는 진짜 사람을 묻었어요. 기둥 밑에.

◇이대호> 이거 방송 밤에 할까요?

◆이한> 아니요. 이게 무서운 얘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다음에 동물로 하다가 그냥 그게 다 너무 잔인하니까 팥죽으로 바꾼 거죠.

◇이대호> 팥죽이 훨씬 낫네요.

◆이한> 그러니까 일단 희생제의 남은 잔존이라고 보시면 돼요.

◇이대호> 저는 그래서 먹는 아까운 팥죽을 왜 기둥에다 바르나 했더니 동물이나 사람을 묻는 것보다 훨씬 낫죠.

◆이한> 같은 생각을 한 게 조선시대 때 영조입니다. 왜 기둥에 팥죽을 바르냐, 아깝다 하지 마라 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계속 안 듣고 발라서 그거는 정조가 약간은 포기를 했습니다.

◇이대호> 그렇죠. 사람들은 또 음기를 쫓아내려고 하고 약간 좀 미신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걸로 인해서 마음이 좀 편해진다면 또 그렇게 했겠죠.

◆이한> 그렇겠죠.

◇이대호> 그래요. 그러니까 그 팥 보면 제사 지낼 때나 이렇게 뿌리는 것도 있고 하지 않습니까?

◆이한>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도 한번 논쟁이 살짝 벌어진 게, 팥은 귀신을 쫓는 건데 이 팥죽을 조상님한테 바친 건 좀 아니지 않느냐. 그런 게 있었어요. 그렇긴 한데 거기에 대해서 그래도 사람들이 먹는 거니까, 팥죽을 바치고 그리고 또 사람들이 궁금한 건 팥죽은 항상 꿀이랑 같이 나오는데 팥죽을 조상님한테 바칠 때 꿀도 같이 바쳐야 하나? 그런 이야기로 또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제사라는 것이 이리저리 복잡하게 따지기보다는 산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 또 있기 때문에 팥죽들을 동지 때 많이 제삿상에 바쳤어요.

◇이대호> 약간 이걸로 음기도 쫓고 귀신도 쫓고 산 사람들은 이걸로 먹고 서로 나누고?

◆이한> 그렇죠.

◇이대호> 이선화 님이 제가 어릴 적에는 부엌에도 이게 이걸 뿌린 걸 봤다고. 박미영 님이 어릴 적에 엄마가 팥죽을 방마다 구석에 조금씩 뿌렸던 기억이 납니다라고 이야기를 해 주셨네요. 그런데 이게 팥죽을 너무 좋아해서 어떤 문학 작품들도 나왔다고요?

◆이한> 팥죽이 보통 동지에 먹지만 우리도 아무 때나 먹잖아요.

◇이대호> 그렇죠. 요즘 편의점에서도 많이 팝니다.

◆이한>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무 때나 먹었는데 물론 동짓날 많이 먹긴 했죠. 그래서 목은 이색이라고 해서 정도전의 스승이자 이 신진사대부의 스승이었던 사람이 이분이 팥죽을 굉장히 좋아해서 시도 때도 없이 먹었습니다만, 그 동짓날에는 각별하게 챙겨 먹으면서 그걸 시로까지도 적었습니다.

◇이대호> 그것이 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좀 읊어주실 수 있나요?

◆이한> 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골 풍속이 동짓날에 팥죽을 질게 쑤어 사발에 가득 담으면 빛이 공중에 뜨는데 여기에 꿀을 타서 목구멍을 적셔내리면 음사를 다 씻고 뱃속도 윤택하게 하고 말고.

◇이대호> 아, 이 시 안에 아까 그 역사적인 거 얘기해 주신 게 다 들어 있네요.

◆이한> 그리고 이분은 팥죽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낮에도 먹고 밤에도 먹고 여름에도 먹고 겨울에도 먹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서 먹었어요.

◇이대호> 고려 말.

◆이한> 예, 조선 초.

◇이대호> 목온, 목은.

◆이한> 목은 이색. 그래서 정도전과 정몽주의 스승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대호> 그리고 그 이후에도 동짓날 팥죽 관련된 것들도 어떤 문학으로도 계속해서 나왔었나 보네요.

◆이한> 서거정이나 장유나 많은 사람들이 팥죽을 먹고 아까 얘기한 대로 고려 때 분도 팥죽을 먹는데 이 팥죽이 동짓날에 일가친척들이 모여서 함께 먹다 보니 항상 그리워하면서 얘기하게 돼요. 우리가 젊었을 때 팥죽을 먹었는데, 형제랑 같이 먹었는데. 그래서 그 충선왕 때의 고구려 사람인 이재현 같은 경우에는 어느 애가 중국 한복판을 사진을 통해서 6개월인가 여행을 했거든요. 그걸 하면서 어느 날 동짓날이 되니까 집이 너무 그리운 거예요. 집도 그립고 내 가족들도 그리고 그래서 이렇게 동짓날이 왔는데 우리 가족들이랑 팥죽을 못 먹고 내가 여기서 웬 고생이야, 그런 시도 적었습니다.

◇이대호> 동지 팥죽도 못 먹었다라는 게 되게 좀 뭔가 서러웠던, 그럴 수밖에 없었던. 동지는 내일이니까 우리가 미리미리 팥죽도 준비하고 또 이한 작가님에게 들었던 거 이제 아이들에게 써먹고 가족들에게 이야기하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기상특보 들어온 게 있는데 하나만 더 알려드릴게요. 10시 30분을 기해서 제주도 남부 지역에 대설경보, 제주도 서부 앞바다 지역에 풍랑경보가 발효가 돼 있습니다. 바닷가, 그리고 또 제주도 남부 지역 대설 특히 조금 유념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추운 동지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는데, 그런데 아까 많은 분들이 글도 올려주셨는데 애동지라는 게 있다고요? 애동지가 뭐예요? 동지랑 다른 거예요?

◆이한> 애동지는 아기동지 아니면 소동지라고 하는데요. 만약에 동짓날이 양력이잖아요. 그런데 음력 11월 1일부터 10일까지 하면 그걸 애동지라고 하고.

◇이대호> 음력 11월 초면은 애동지?

◆이한> 예, 그리고 만약에 이게 중순 넘으면 중동지 그런 식으로 해서 다른 이름을 부르거든요. 그래서 애동지 같은 경우에는 아이들한테 팥죽이 안 좋을 수도 있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이대호> 올해는 뭐예요? 내일이.

◆이한> 내일이 음력 11월 10일이기 때문에 내일이 애동지입니다.

◇이대호> 아, 애동지예요, 올해는.

◆이한> 네.

◇이대호> 그럼 애들한테는 팥죽을 옛날 같았으면 좀 안 좋다.

◆이한> 그런데 저는 먹을 겁니다.

◇이대호> 이한 작가님은 애가 아니잖아요.

◆이한> 네.

◇이대호> 그러면 팥죽으로 안 먹고 다른 걸 먹었어요?

◆이한> 팥떡을 먹습니다만.

◇이대호> 아, 팥떡.

◆이한> 네, 지역별로 약간 좀 다른 풍습이고요. 저로서는 그냥 팥죽이 좋으니까 새알심 잔뜩 넣어서 그 나이 순서대로 넣으면 다 못 먹으니까 적당히 넣어서 먹겠습니다.

◇이대호> 아, 새알심을 뭐 나이대로.

◆이한> 워낙 나이 순서, 나이, 나이 수대로 넣었습니다.

◇이대호> 새알심을요?

◆이한> 예.

◇이대호> 40개, 50개 먹으면 되게 배부를 텐데.

◆이한> 그러니까 그것만큼 나이를 먹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대호> 아, 그냥 의미로, 의미로.

◆이한> 네.

◇이대호> 그런데 팥떡이라면 뭐 시루떡 이런 것도 되겠네요?

◆이한> 시루떡도 하고 수수팥떡 뭐 그런 것도 다 되죠.

◇이대호> 아하, 그런데 이제 올해는 애동지.

◆이한> 네.

◇이대호> 이것도 저도 이제 상식적으로 알아두겠습니다. 또 하나 궁금해지는 게 우리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한> 그렇습니다.

◇이대호> 과연 우리나라가 성탄절, 크리스마스를 알게 되고 이걸 지내게 된 게 언제부터일까요?

◆이한> 아무래도 조선시대 때는 이단으로 밀려서 탄압받았기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정착하기는 어려웠고, 1920년대만 하더라도 교회와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크리스마스 잔치를 했기 때문에 1923년만 하더라도 그 배화여고 학생이 자기 어릴 때 크리스마스 행사가 너무 즐거웠다라고 얘기한 걸로 보면 아마 1910년 그쯤서부터 크리스마스가 점점 퍼지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대호> 1910년쯤부터.

◆이한> 그러니까 문호를 개방한 다음부터 이제 들어오는 거죠.

◇이대호> 네. 그리고 조금 전에 뉴스하나 나온 게 있는데요. 주식 양도소득세 부과되는 대주주 기준이 완화가 됩니다. 현행은 한 종목당 10억 원 이상을 보유하면 대주주여서 주식을 팔 때마다 약 20% 이상의 세금을 내야 됐는데 이게 기준이 10억에서 50억 원 이상으로 대폭 상향 조정된다. 기획재정부가 조금 전에 소득세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다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해서 오는 26일 국무회의에서 이게 의결될 예정이라고 하네요. 그러면 조정되는 대주주 기준이 내년 1월 1일 이후 양도분부터 적용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주주 기준이 10억에서 50억 원. 그러니까 이게 항상 연말만 되면 코스닥 종목들 같은 경우에 되게 주가가 많이 떨어지는, 왜냐하면 이거 세금 안 내려고 사람들이, 큰손들이 특히 막 매도를 하다 보니까 그래서 다른 소액주주들까지 피해를 보고 시장이 좀 왜곡되는 문제가 있었는데 정부가 그 건의를 받아들여서 대주주 양도세 기준을 50억 원으로 완화했다는 것 알려드립니다. 중간 중간에 항상 속보가 들어오면 또 저희가 열심히 또 알려드려야 돼가지고 다시 크리스마스, 조선시대 크리스마스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면 1910년, 1920년대 혹은 초반에 성탄절은 어땠을까요? 그 문화나 인식이요.

◆이한> 우선 외국 명절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크리스마스 때마다 불우이웃 돕기도 하고 성탄 노래도 부르고 여러 가지 행사를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점점 구경하고 좋아하고 즐기게 됐습니다. 특히 조선이 망한 다음에는 이제 크리스마스를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도 만들고 그렇게 하는데 비판을 굉장히 많이 받았던 게 외국 명절인 게 아니라 사치스럽고 외제를 많이 수입한다고. 비판을 받은 게 세 가지예요. 사치스러운 크리스마스 카드.

◇이대호> 크리스마스 카드.

◆이한> 네, 그리고 크리스마스 케이크. 그리고 크리스마스 트리. 이 세 가지를 아주 열심히 사람들이 싫어했는데 1954년. 바로 6.25 전쟁이 끝난 바로 다음 해입니다. 그때 한 어르신이 신문에 투고한 걸 제가 봤는데요. 그분이 얘기하신 거는 자기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때는 그 초롱에다가 빨간색, 파란색을 칠하고 한자로 축 성탄이라고 쓰고 솔방울 같은 걸로 장식하고 호박을 넣은 시루떡과 엿을 나눠 먹으면서 성탄을 즐겼는데 요즘 크리스마스는 왜 이렇게 사치스럽고 외제를 쓰냐. 이렇게 잔소리를 하신 게 남아 있습니다.

◇이대호> 54년 기록으로.

◆이한> 네.

◇이대호> 그런데 그분이 어릴 적에는 초롱불 그걸 이제 꾸몄다라는 거죠. 솔방울로 뭔가 크리스마스 기분 내고.

◆이한> 그렇죠. 그리고 호박엿과 이제 시루떡 먹었는데 그걸 얘기하시는 게 이게 다 국산이었다라고 얘기를 하시는 거죠.

◇이대호> 솔방울 당연히 국산이었겠죠.

◆이한> 그리고 엿도, 떡도 그렇겠죠.

◇이대호> 그렇죠.

◆이한> 이렇게 가장 많이 비판받았던 게 크리스마스 카드거든요.

◇이대호> 네.

◆이한> 크리스마스 카드가 대부분 외제였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만들긴 했지만 우리나라 건 약간 좀 안 예쁘다고 해서 사람들이 외제를 사려고 들었는데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당 100환에서 200환 정도로 했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 기준으로 100환이면 과일 7개와 국수 두 그릇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대호> 그러니까 그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이.

◆이한> 네.

◇이대호> 국수 두 그릇 정도의 금액이었다.

◆이한> 그렇습니다.

◇이대호> 비판 나올 만하네요.

◆이한> 그렇죠.

◇이대호> 그런데 당시는 54년이면 전쟁 직후잖아요.

◆이한> 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열심히 챙겼다는 거죠.

◇이대호> 아, 그렇구나.

◆이한> 아마도 그 유엔군이라든가 외국인들이 와 있었기 때문에 더 크리스마스를 성대하게 치른 것 같긴 합니다. 약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

◇이대호> 그런데 이제 그게 당시에는 뭔가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크리스마스 씰이라는 거 있지 않습니까? 우표처럼 생겼는데 우표는 아닌 거. 저도 초등학교 때는 거의 의무적으로 샀거든요.

◆이한> 저희도, 저도.

◇이대호> 네, 그런데 이게 유래가 어떻게 됩니까? 언제부터 시작된 거예요?

◆이한> 1904년도에 덴마크에 있던 사람이 이걸 만들어서 결핵 환자들을 돕자라는 의도에서 처음 만들어졌거든요.

◇이대호> 결핵 환자를 돕기 위한.

◆이한> 네, 그리고 이것이 전 세계로 퍼지고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전해지게 된 것이 우리나라에서도 만들게 된 거죠. 그래서 지금은 결핵이 그런 병이 있나라고 하겠지만 아직까지도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결핵에 걸려 있고 그 1초에 1명씩 사람이 죽는다고 할 정도로.

◇이대호> 세계적으로.

◆이한> 네, 우리나라에도 아주 결핵 환자들이 많이 있고요. 그 옛날 구한말이나 근대에 유명한 위인들 중에서 결핵에 걸려 죽은 사람이 굉장히 많았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콜록콜록 하다가 피 울컥 하면 결핵이죠.

◇이대호> 아, 피토하는 장면.

◆이한> 많이 나오죠. 그래서 항상 비극적인 죽음에서 그 인물들이 피를 토하면 결핵이다.

◇이대호> 아, 그 정도로 결핵이 많았다.

◆이한> 네.

◇이대호> 이게 사실 결핵이 후진국 병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현재도 결핵 환자분들이 좀 있다고 합니다.

◆이한> 네, 기생충에도 도 나왔죠.

◇이대호> 아, 영화에.

◆이한> 네.

◇이대호> 그리고 대한결핵협회.

◆이한> 맞습니다

◇이대호> 에서 크리스마스 씰 발행을 하고 있는데 요즘에는 사람들이 편지 잘 안 보내고 우표도 안 쓰니까 크리스마스 씰이 되게 다양한 형태로 나오더라고요. 어떤 배지 형태, 스티커, 머그컵 같은 거 막 굿즈 형태로 나와서 이것도 하나씩 사시면 또 어려운 이웃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현재도 이게 진행이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조선시대에는 이거 결핵을 어떻게 치료했을까요? 치료법이 있었을까요?

◆이한> 무당을 불렀고요. 왜냐하면 기침이 계속 이어지는 병인데 사실상 치료법이 없었기 때문에 무당을 부르거나 아니면 탯줄 같은 거나 이상한 거 끓여 먹거나 그래서 거의 치료 효과가 없는 치유법을 사용했고요. 정말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근대의 인물 중에서 김유정, 이상.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인 김점동. 박에스더로 알려져 있는 분인데요. 이분도 결핵으로 죽었습니다.

◇이대호> 예전에 그 김유정 소설가에 대해서 우리 이야기를 한 적 있죠. 그때도 그런데 이 결핵으로 많이들 고생을 하셨던. 그런데 당시에 뭔가 치료법이나 뭔가 병원도 막 세워지고 그랬던 시절 아닙니까?

◆이한> 그걸 세웠던 사람이 바로 셔우드 홀.

◇이대호> 셔우드 홀.

◆이한> 네, 캐나다 출신 선교사 부모님한테서 태어났는데 고향이 이 조선 땅입니다.

◇이대호> 아, 캐나다 부모인데 한국에 와서 선교 활동을 하시다가 셔우드 홀을 낳으신 그 부모님이.

◆이한> 네, 그래서 그 사람이 자라서 다시 캐나다에 가서 의학 박사를 딴 다음에 역시 부인도 의사였거든요. 매리언 홀이라고 해서. 부인하고 같이 와서 이 조선땅에서의 결핵 퇴치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던 분이고 이분이 결핵병원. 요양원이라고 해서 해주구세요양원이라는 것을 황해도에 세웠거든요. 당시 믿음으로는 결핵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공기 좋은 곳에서 잘 쉬게 하는 것이 그나마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래서 황해도 해주에다 그걸 세웠죠.

◇이대호> 광해도 해주.

◆이한> 네.

◇이대호> 지금 이제 북한에 남아 있는, 뭐가 조금 남아 있을까요? 기록이?

◆이한> 전쟁 때 다쳤고 그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소식이 없습니다.

◇이대호> 조금 아쉽긴 하네요. 그런데 셔우드 홀 박사님은 우리한테 되게 고마운 존재네요.

◆이한> 이분이 셔우드 홀인데 한자로 바꾸면 하악 박사 그렇게 해서 얘기를 하고 그다음에 좀 더 제가 굉장히 재미있게 봤던 게 그 신문의 표현이 딱터 홀이라고 해야 되나, 닥터 홀.

◇이대호> 아, 닥터가 아니라 딱터.

◆이한> 예, 딱터 홀 그렇게 불렀는데.

◇이대호> 그런데 셔우드 박사가 일단 태어난 게 우리나라 땅에서 태어났고 그런데 해외에 나가서 공부를 하고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고. 말년은 혹시 어떻게 되셨나요?

◆이한> 그래서 이분이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고 여러 활동하다 보니까 당연히 그 일본 총독부가 안 좋게 여겨요, 조선총독부가 고깝게 여겨서 온갖 트집을 잡아서 계속 벌금을 매기고.

◇이대호> 벌금을요?

◆이한> 네, 이분한테, 왜냐하면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한복을 입은 애들이 그려져 있다. 그 이유로 벌금을 매기고 그렇게 구박을 하니까 이 사람을 도와주던 일본 관리가 있어요. 오다 야스마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되게 친절했던 사람인데 맨 처음에 그 셔우드 홀이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 때 처음 디자인은 거북선이었습니다. 이제 조선 사람들이 좋아하겠지라고 만들었는데 오다 야스마가 말려요.

◇이대호> 그러니까 조선총독부에서.

◆이한>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던 일본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말려요. 아니, 일본을 쳐부순 배인데 잘도 통과되겠다라는 아주 현명한 판단 하에서 처음 씰은 그래서 남대문 모양이었는데 이 오다 야스마가 다시 셔우드 홀한테 얘기합니다. 조선을 떠나는 게 좋겠다. 그래서 조선의 모든 것을 처분하고 떠났는데 이 사람은 본인도 조선에서 태어났고 이 사람의 자식들도 전부 조선에서 태어나서 사실상 조선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이대호> 조선을 정말로 사랑한.

◆이한> 네, 그래서 조선을 어쩔 수 없이 떠난 다음에 인도에서 결핵 구제를 하다가 이제 나이 들어서는 이제 은퇴해서 캐나다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화장을 해서 지금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가족들과 함께 묻혀 있습니다.

◇이대호> 양화진이요.

◆이한> 네.

◇이대호> 그런데 이제 돌아가신 다음에 다시 태어난 땅. 조선, 대한민국으로 오셔서 묻혔다.

◆이한> 그렇습니다.

◇이대호> 되게 고마운 분이네요. 그런데 우리가 그 팥죽 이야기, 동지 이야기하다가 크리스마스. 그리고 크리스마스 씰. 또 선교사 이야기까지 해 봤습니다. 이한 작가와 함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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