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도, 경력도 필요없다” 젊은 인재 귀해지자 美 ‘견습생’ 바람

성유진 기자 2023. 12. 2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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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미국 채용철학의 변화, 4년제 대학 회의론도 한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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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영석

미국 직장인 이제이 크레스포(20)는 요즘 일리노이주의 스위스계 보험사 취리히보험의 북미 본사에서 견습생으로 일한다. 보험금 청구서를 검토하는 부서에서 주당 24시간씩 근무하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 지원을 받아 커뮤니티 칼리지(전문대)에서 수업을 듣는다. 방학 때는 종일 일하며 연간 4만달러(약 5000만원)를 받는다. 이렇게 2년간 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나서 준학사 학위를 받으면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다. 크레스포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처음에 입사했을 땐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은 데이터 분석과 엑셀 활용에 능숙해졌다”고 했다.

미국 기업에서 견습생 바람이 불고 있다. 원래 미국에서는 유럽과 다르게 ‘초보자를 채용해 훈련시킨다’는 개념이 거의 없었지만 인력난이 계속되자 채용 철학이 바뀌었다. 조건을 갖춘 지원자를 기다리기보단 견습생을 뽑아 회사에 적합한 인재로 키우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비싼 등록금을 내고 4년제 대학에 가느니 빨리 실무를 익히는 게 실속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미국 내 신규 등록 견습생은 2012년 14만7000여 명이었지만, 재작년에는 24만2000여 명으로 9년 만에 64% 증가했다. 일부 견습생 프로그램은 아이비리그 입학에 버금가는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기술자부터 개발자까지 견습생 바람

과거 견습 제도는 배관공이나 전기 기사 같은 숙련공 양성에 주로 쓰였다. 최근엔 달라졌다. 회계부터 사이버 보안까지 다양한 사무·기술직으로 확대되고 있다. 미국 통신사 버라이즌은 지난 2019년부터 테크 분야 견습생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견습생 프로그램을 마친 이들 가운데 70명 이상을 데이터 분석이나 소프트웨어 개발 등을 맡는 정규직으로 채용했다. 버라이즌은 내년에는 선발 인원을 대폭 늘려 총 250명의 견습생을 채용할 계획이다.

미국 전기차 업체 리비안 공장 내부. 리비안은 최근 2년짜리 견습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리비안

신산업에서도 견습생 제도를 통한 인력 확보 경쟁이 치열하다. 전기차 업체 리비안은 지난 10월 견습생 제도 도입을 발표했다. 조지아주의 한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24주 동안 공부하고 일리노이주의 리비안 공장으로 이동해 12~18개월간 현장 실습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리비안은 조만간 조지아주에 새 공장을 지을 예정인데, 양질의 인력을 미리 확보하려는 의도다. 독일계 지멘스도 재작년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커뮤니티 칼리지와 함께 전기차 인프라 기술자를 키우는 견습생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젊은 현장 인력이 귀해지면서 견습생을 ‘장인’으로 양성하려는 기업도 있다. 1년짜리 정육 전문가 견습생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유통 업체 홀푸드마켓은 앞으로 피자 만들기, 농산물, 생선 전문가로 분야를 확대할 예정이다. 명품 업체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는 유럽에서 운영해오던 견습생 제도를 최근 미국에서도 시행하기 시작했다. LVMH 산하 주얼리 브랜드 티파니 앤드 코가 뉴욕 주립 패션 공과대·스튜디오 주얼러스·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과 협력해 2년짜리 견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 수퍼마켓 체인 홀푸드마켓은 견습 프로그램을 통해 정육 전문가를 양성한다. /홀푸드마켓 유튜브 캡처

주 정부들도 준수한 일자리를 늘릴 기회로 보고 견습생 제도에 적극적이다. 작년 메인주는 “지난 2년간 견습생 프로그램을 이수한 이들 가운데 94%가 해당 기업에 최종적으로 고용됐다”며 앞으로 견습생을 기존의 두 배 이상으로 늘리기 위해 1230만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메릴랜드주는 2031년까지 고등학교 졸업생의 45%가 견습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방안을 목표로 설정했다.

인력난이 부른 견습생 붐

기업들이 견습생 제도를 확대하는 건 노동력 부족 탓이 크다. 미국 실업률은 작년 2월 이후 3%대로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상 완전 고용 수준이다. 미 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최근 미국에서 비어 있는 일자리 100개당 구직자가 72명에 그칠 정도다. 미국 역시 고령화가 덮치면 젊은 인력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애넬리스 고거 박사는 미국 매체 쿼츠에 “늘어나는 베이비붐 세대 은퇴로 고용주가 직원을 채용하고 유지하는 데 점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그래픽=김의균

특히, IT 분야나 태양광·전기차 같은 신산업 분야에서 인력 부족이 심각하다. 미국재생에너지위원회(IREC)가 작년 미국 태양광 업체들을 조사한 결과 44%가 “자격을 갖춘 지원자를 찾기 매우 어렵다”고 답했다. 미국 노동통계국은 2031년까지 매년 약 8만명의 전기 기술 분야 신규 인력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한다.

견습생 프로그램은 기업들이 사내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미국에서는 히스패닉·흑인 학생이 상대적으로 학사 학위를 받은 비율이 낮은 편이다. 그래서 고졸자를 대상으로 하는 견습생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인력난을 해소하는 동시에 ‘DEI(다양성·공평성·포용성)’라 불리는 채용 목표를 달성하기에도 좋다.

‘등록금만 비싸다’ 4년제에 회의감

대학 학비가 비싸지면서 4년제 학사 학위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는 것도 견습생 제도가 각광받는 배경이 되고 있다. 2년제 대학에 가거나 견습생으로 일하며 실무를 익히는 게 비용이 덜 들어 효율적이라고 여기는 젊은층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3월 월스트리트저널이 시카고대와 함께 미국 성인 약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56%가 ‘4년제 학위는 비용 대비 가치가 없다’고 답했다. 이 비율은 2013년 40%, 2017년 47%에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대학 진학률이 하락하고 있다. 2015년에는 69.2%였지만 작년에는 62%까지 떨어졌다.

기업들도 직접 실무를 가르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 견습생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멀티버스가 올해 미국·영국 비즈니스 리더 1200명에게 젊은층 기량·기술 향상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물었더니 ‘일을 통한 배움’이라는 응답이 70%로 가장 많았다. 고학력이 높은 업무 성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해지며 구글·액센추어 같은 대기업에서도 4년제 학사 학위를 요구하는 채용 공고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미 경제 매체 패스트컴퍼니는 “기업들이 ‘종이 천장(학력)’을 뜯어내고 직원들이 돈을 벌면서 배울 수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속속 도입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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