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조각가와 K-조각] <12>조엘 샤피로, 직육면체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 기하학'
뉴욕 출신의 미니멀리즘 조각가로 알려진 조엘 샤피로(82)는 직육면체의 입방체들을 다양하게 조합해 독특하고 역동적인 조형미를 연출하는 세계적인 조각가다.
그는 나무와 브론즈 등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직육면체들을 기하학적이고 역동적으로 조합해 형태들이 주는 균형과 무게의 관계성에 대해 탐구했다. 그의 직육면체들은 기상천외한 각도로 서로 조합돼 바닥에 놓이거나 공중에 매달리거나 중력을 거스르듯 전시장의 벽에 붙어 관람자들을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샤피로의 작품들은 대부분 어떤 것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으며 '무제'라고 하는 제목으로 발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육면체들이 조합돼 어울린 형태들의 관계로 인해 관람자는 걷거나 뛰거나 춤추는 인체의 몸짓을 연상하게 되기도 한다.
직육면체들을 조합한 샤피로의 작품은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젊은 작가들이 최소한의 조형 수단으로 회화나 조각을 제작했던 미니멀리즘의 맥을 잇고 있다. ‘미니멀(최소한)’이란 환영(illusion)을 최소화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작품에 사용된 재료의 사물성을 지각하는 것을 유보시키고 환영을 재현해보고자 했던 전통적인 예술개념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예술가들은 환영이 재현되는 것을 최소화하고 오브제에 관한 기존의 선험적인 관념을 중지시켜 ‘어떤 물체가 이 자리에 있음’이라고 하는 순수한 체험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자 했다.
그리하여 예술가의 표현 행위를 최소화하고 모든 은유적인 의미를 제거할 수 있는 3차원의 입방체가 새로운 조각으로 관람객 앞에 등장하게 됐다. 따라서 나무와 브론즈로 제작된 직육면체들의 조합과 관계성을 탐구한 샤피로 또한 미니멀리즘 예술가로 언급되는 것이다. 샤피로 역시 초기 작업 시기부터 로버트 모리스, 리차드 세라, 칼 안드레아, 도널드 주드와 같은 뉴욕의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의 작업 전략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발표되면서 전시장에 덩그러니 놓인 의미를 알 수 없는 입방체를 체험한다는 것은 과연 예술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비평적 논쟁이 일기도 했다. 한 예로 미국의 미술사학자 마이클 프리드는 '미술과 사물성'(1967)에서 미니멀리즘 예술가 중 도널드 주드나 모리스의 작품들처럼 단일 유형이든 동일하게 반복적으로 사용하든 입방체 간의 상관적인 성격을 거부한 작품들을 리터럴아트(literal art)라고 명명하면서 모더니즘 미술과 구분하고자 했다.
프리드는 비(非)상관적인 형태, 동일반복적인 간격으로 전시장에 놓인 리터럴아트의 입방체들을 마주하게 되는 경험에 대해 일상에서 사물을 마주하며 체험하게 되는 사물성의 체험과 다르지 않고, 이것은 비예술적인 경험이라고 논했다. 게다가 관람자가 ‘지속적인 시간’을 들여 그 입방체 주위를 맴돌아 ‘거기에 그것이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은 무대 위의 공연을 체험하는 연극적인 개념과 같으며, 매체의 순수성을 지향하던 모더니즘 미술에 연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요청하여 미술을 부정한 것이라 비판했다.
따라서 프리드는 모더니즘 회화와 조각은 시간을 들여 체험하는 연극적 개념을 부정하고 그 예술적 가치를 유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상관적 형태’를 이루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럼으로써 ‘짧은 순간’일지라도 관람자는 작품에 몰입하여 모든 것을 관찰하고 충만한 예술적 체험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샤피로는 3차원의 직육면체라는 ‘최소한’의 요소로 작업했다. 그리고 직육면체들을 다양한 각도로 조합해 실제 공간에서 오브제들의 다양한 무게와 균형의 지각을 관람자들에게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은 미니멀리즘적 작업 성향을 보여준다. 한편 샤피로의 직육면체들은 서로 엮여 ‘상관적 형태’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그의 상관적 형태의 직육면체들은 리터럴아트가 정면으로 내놓았던 사물성의 체험을 뒤로 유보하고 ‘한순간’에 관람자들이 작품의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게 한다. 프리드가 주장하던 반(反)연극적이며 반리터럴리즘적인 모더니즘 미술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직육면체들의 조합은 ‘보는 순간’ 샤피로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걷거나 뛰거나 춤추는 인체의 몸짓들을 연상하게 하며, 동시에 무게와 중력의 다양한 상관성에 따른 시각적 경쾌함까지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샤피로는 모더니즘의 미학과 현대미술의 가치를 성찰하는데 매우 중요한 조각가이다. 또한 샤피로는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해 식지 않은 열정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는 그가 전속작가로 소속돼 있는 페이스갤러리를 시작으로 전 세계의 유명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80대인 노년의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작품 제작과 전시 활동을 해오고 있다.
또 그는 지난 2021년 서울 이태원에 확장 개관한 페이스갤러리 서울지점에서 크게 개인전을 열어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하게 알려진 조각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의 조각 작품들은 런던 테이트미술관, 뉴욕 휘트니미술관, 일리노이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주립미술관 등 전 세계 곳곳의 미술관에 소장돼 있고, 끊임없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서희정 성신여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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