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잡은 패들이 낯설었다…하지만 그 패들로 다시 세계를 넘본다
2022년 3월.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은 예전과 달랐다. 왼 다리가 허전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말없이 울기만 했다. 부모님께 그저 죄송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경제적인 이유로 사촌 형을 따라 시작했던 택배일. 카누 선수로의 복귀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지만 사고로 산산조각이 났다. 최용범(27·충남장애인체육회)은 밤에 혼자서 구석에서 울고 또 울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물이 좋았다. 백마강, 반산저수지가 근처에 있었다. 축구, 씨름 다 해봤지만 카누를 시작한 것도 물의 길이 좋아서였다. 부여중 1학년 때부터 패들을 잡았다. “지는 게 싫어서” 정말 열심히 저었다. ‘제2의 조광희’라는 말도 들었다. 조광희는 한국 카누 종목 선수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2014년 인천,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를 한 선수다. 그의 부여고 2년 선배이기도 하다.
고교 졸업 뒤 부여군청에 잠시 속해 있다가 울산광역시청으로 옮겼다.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갔지만 간발의 차이(4위)로 태극 마크를 놓쳤다. 허리 통증으로 성적이 나지 않아 2018년 11월 입대를 했다. 2020년 7월 제대해 돈을 벌면서 몸을 만들어 가다가 덜컥 사고가 난 것이었다.
재활 과정에서 은사였던 주종관 부여중 카누부 코치와 대한장애인체육회 맹찬주 매니저가 파라 카누를 권했다. 처음에는 낯선 모습으로 낯익은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는 게 겁이 났다. 하지만, 그가 살면서 제일 잘했고, 즐겁게 했던 것이 카누였다. 어머니의 권유도 있었다. 어머니는 물 위에서 아들이 다시 생기를 찾기를 바랐다. 파라 카누가 2016 리우패럴림픽 때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뒤 대한장애인체육회는 2017년부터 파라 카누 선수 육성에 본격적으로 나선 터였다.
그는 다시 패들을 잡았다. 파라 카누는 비장애인 카누와 같고도 달랐다. 의족을 한 왼 다리가 더 무겁기 때문에 균형 잡기조차 쉽지 않았다. 10년 가까이 카약을 탔는데도 그랬다. 최용범은 “처음에는 배의 밸런스를 잡기가 어려워서 물에 빠졌다”면서 “진짜 나 스스로도 당황했다. (의족을 하고) 수영을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되더라”며 웃었다. 장애인 꿈나무 선수 지도자로 최용범을 다시 가르치고 있는 주종관 코치는 “아이들이 처음 카누를 배울 때 1년에 만번은 물에 빠져야 한다고 얘기한다. 물 위에서 균형 잡는 데만 3개월 걸린다”고 했다.
그의 파라 카누 200m 스프린트 경기 첫 상대는 부여중 카누 선수였다. 맨 처음에는 졌다. 비장애인 선수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중학생. 실업팀 선수 출신으로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사고와 함께 날아갔을 것 같았던 승부욕이 다시 꿈틀댔다. 기록을 점점 끌어올렸다. 맨 처음 50초대였던 기록은 47초, 46초로 점점 줄어갔다.
부여중·고교 카누 후배들은 파라 카누 선수로 변신한 선배의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기꺼이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주었다. 가장 최근의 상대는 부여고 2학년 카누 에이스 설동우였다. 지난 10월 대결을 펼쳤는데 앞서가다가 결승점 3m를 앞두고 추월당해 손바닥 두 개 차이 정도로 졌다. 주종관 코치는 “7월부터 파라 카누를 시작한 (최)용범이는 목표를 다단계식으로 잡고 올라왔다”면서 “처음에 45초를 목표로 했는데 한 달 만에 목표치를 달성했다. 올 한 해 42초를 목표로 했는데 40초 안쪽으로 들어왔다”며 최용범의 근성을 칭찬했다.
최용범은 지난 11월 열린 전국장애인체전에서 여유롭게 1위를 차지했다. 2018년 10월 전국체전에 나가고 5년 만에 출전한 전국 대회에서 이룬 성과였다. 시간이 촉박해 항저우장애인아시안게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맹찬주 매니저는 “항저우 대회에 출전했다면 메달을 땄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최용범은 내년 5월 헝가리 세게드에서 열리는 대회를 겨냥하고 있다. 2024 파리패럴림픽 참가 쿼터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한국 파라 카누 선수가 패럴림픽 출전권을 따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최용범은 “일단 지금 몸무게가 100㎏인데 겨울 동안 웨이트 트레이닝과 유산소 운동을 해서 10㎏ 이상을 빼야 한다. 그래야 스피드가 더 나올 것 같다”고 했다. 주 코치는 “용범이는 이제 세계 기록에 1초 정도만 남겨놓고 있다. 세계 무대에서는 0.1초 차이로 승부가 갈리기 때문에 몸무게 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물론 당장은 비장애인 카누 선수이자 고교 후배인 설동우를 이겨야만 한다.
최용범은 “처음에는 바깥으로 나오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런데 나오니까 진짜 별것 아니었다”면서 “친구들도, 선후배들도 예전과 똑같이 나를 대해준다. 주위 시선이 부담스러운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가족들의 응원도 이어진다. 아버지는 반산저수지를 몰래 찾아 그의 훈련 모습을 찍어가고는 한다.
그는 훈련을 쉬는 주말마다 친한 후배와 민물낚시를 다닌다. 어쩌면 그가 낚는 것은 미래의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양쪽 귀 뒤에 새긴 두 개의 오륜기 중 하나는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부여/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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