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노벨문학상' 美 루이즈 글릭 시집 전집 첫 완역 출간

김용래 2023. 12. 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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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교수 번역으로 만나는 깊고 섬세한 시 세계…10월 작고
미국의 시인 루이즈 글릭(2016년) [AP=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절망이 진실이다. (중략)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 우리가 희망을 다시 찾고 싶다면 / 우리는 희망이 사라진 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루이즈 글릭 시 '아이들 이야기'에서)

202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시인 루이즈 글릭(1943~2023)의 마지막 시집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에는 시인이 마치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암시와 후회, 추락의 이미지, 과거를 돌아보는 마음이 가득하다.

어떤 시에선 차창 밖으로 암소들과 목초지의 평화로운 모습이 펼쳐지지만 "평온이 진실은 아니"고 오직 "절망만이 진실"일 뿐이고, 다른 시에서 화자는 여동생에게 "다 끝났어 (중략) 끝나지 않았다면, 금방 끝날 거니까"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바람에게 우리를 들어 올려 달라고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간절한 기도를 외면한 바람은 우리를 "밑으로 또 밑으로 또 밑으로 또 밑으로" 데려갈 뿐이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영문학)는 글릭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듬해 펴낸 이 마지막 시집에 대해 "죽음을 앞둔 노인의 것인지, 어린아이같이 남아 있는 인간의 영혼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은 목소리는 시인 글릭이 만년에 도달했을 어떤 심리적인 깊이를 잘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지난 10월 작고한 글릭의 시집 전집 열 세권이 정 교수의 번역으로 완역돼 나왔다.

정 교수는 지난해 11월 '야생 붓꽃'과 '아베르노'를 시작으로 '목초지', '새로운 생' 등을 거쳐 이번에 '내려오는 모습'과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 등 글릭의 6권의 시집을 한꺼번에 번역해 전 13권을 완역했다.

시인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도 한국어판 표지 디자인의 밝기를 두고 고민할 만큼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루이즈 글릭의 마지막 시집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 [시공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글릭의 마지막 시집엔 후회와 절망만 있는 건 아니다.

시인은 간절한 기도에도 우리를 밑으로 끌고 들어가는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세상과 나 자신을 잘 보살피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 태도가 가장 잘 나타난 시가 표제시다.

이 시에서 해마다 겨울이 오면 숲으로 가는 노인들은 이끼를 모으고 그것을 삭히며 힘든 겨울을 난다.

"문 안쪽에, 카드 위에 한자로 일의 순서가 씌어져 있었다. 번역하자면, 같은 순서로 같은 일을 할 것."

시인은 죽음이 머지않은 노인들이 함께 모여 반복적인 노동을 하는 모습을 통해 겨울이라는 엄혹한 계절이 몰고 오는 위기 속에서도 질기게 이어지는 생의 의미를 조명한다.

정 교수는 이 작품이 "노동이 꽃피우는 어떤 것, 인내와 공동의 힘, 협력이 그나마 추락하는 이 세계를 지탱하고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글릭이 2020년 노벨문학상에 호명되면서 세계 각국에서 그의 시집을 앞다퉈 소개했지만 시집 열 세권 전권이 번역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첫 시집 '맏이'(1968)와 두 번째 시집 '습지 위의 집'(1975)이 사랑과 혼인, 출산 등을 둘러싸고 젊은 글릭의 영혼에 새겨진 아픔과 기쁨을 주로 이야기했다면, 세 번째 시집 '내려오는 모습'부터는 신화의 세계의 현실적 변주가 두드러진다.

가족 안에서 경험하는 감정의 파고를 섬세하게 묘사한 시집 '목초지'(1996)나,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는 강인한 의지가 드러난 '새로운 생'(1999) 등 글릭의 깊고도 다채로운 시 세계를 정 교수의 섬세한 번역으로 만날 수 있다.

루이즈 글릭의 첫 시집 '맏이' [시공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열세권 중에 무엇을 먼저 읽어야 할지 고민인 독자에게 정 교수는 "시인이 수도 없이 거절 끝에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서 출간된 '맏이'부터 먼저 읽어 보시라"고 권했다.

20대의 글릭이 스물여덟번이나 출판사들로부터 거절당한 끝에 출간한 첫 시집인 '맏이'에는 삶의 비참과 절망, 상실과 어둠이 날 것 그대로의 이미지들로 담겼다.

그러나 이 역시 역자의 권고일 뿐이다.

정 교수는 그 이유를 글릭의 세 번째 시집 '내려오는 모습'(1980)에 수록한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적었다.

"독자들이 글릭의 시집 열세권을 한꺼번에 나열하고 볼 수 있는 벅찬 시간이 온다면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젊은 날의 시집이 가장 젊은 것이 아니고 늙은 날의 시집이 가장 노회한 것이 아님을."

시공사. 전 13권. 각 권 56~96쪽.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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