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그 후…집은 엉망, 가해자는 발뺌, 정부도 미적대
주차장으로 쓰이는 1층 외벽은 석조 마감재가 부서진 채 방치돼 있었고, 떨어져 나간 외장재 안쪽으로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철근과 콘크리트가 훤히 드러났다. 공동현관 안쪽 우편함에는 모든 호실마다 관리비·전기요금 연체 고지서가 빽빽이 꽂혀 있었다. 19일 오전 찾아간 인천 미추홀구 도화1동의 한 아파트는 음산한 쇠락의 기운만 가득했다.
이곳은 전세사기 건축업자 남아무개(62) 일당이 입주자들에게 집단적 피해를 입힌 ‘나홀로 아파트’다. 이 아파트 꼭대기 층에 위치한 전세사기 피해자의 집에 들어서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입자 이세원(31)씨는 “비가 오면 옥상에서 빗물이 천장으로 스며든다. 곰팡이도 문제지만, 지난번에는 천장이 내려앉기도 했다”고 심란해했다. 천장 누수의 경우 건축법상 ‘대수선’에 해당해 집주인이 직접 수리를 해야 하지만, 전세사기 일당은 사건이 터진 뒤 잠적해 연락이 닿지 않는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모여 사는 미추홀구 주안동의 또 다른 나홀로 아파트에서는 입주민들이 관리비 납부를 거부하고 있었다. 관리업체가 전세사기 일당과 연결돼 건물 관리권을 따냈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입주민들은 업체가 관리비 집행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관리비를 받지 못한 관리업체는 건물 관리에서 손을 놓아버린 상태였다. 당연히 관리 상태가 엉망이었다. 이 아파트는 최근 미추홀구로부터 안전 점검 미비를 이유로 엘리베이터 운행 정지 통보를 받기도 했다. 입주민 이지원(36)씨는 “구청에 관리비 집행 내용을 살펴봐 달라고 계속 요구했는데,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고 푸념했다.
인천 미추홀구는 최근 1~2년 새 젊은 세입자들을 울린 전세사기가 집중된 지역이다. 남씨 일당에게 당한 전세사기 피해자가 533명, 피해 보증금은 430억원에 이른다. 사기범 일당에게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 5명은 지난 2~5월 잇따라 목숨을 끊었다.
전세사기는 피해자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세원씨는 “지난해 여름 계약 기간이 끝나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갈 계획이었다. 집주인이 새로운 임차인을 구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해 이사를 미뤘더니 그사이 경매가 진행돼 버렸다. 암담하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미추홀구를 뜨는 것이다.
지원씨도 계약 기간이 끝나는 대로 더 큰 집으로 이사하려고 했지만 7천만원에 이르는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해 눌러앉았다. 대출금 상환 연장과 신용대출 갈아타기로 버티고 있지만 그사이 금리가 오르면서 신용대출 이자율이 4%에서 9%로 뛰었다. 지원씨는 “대출을 받아 이 집을 그냥 사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경매가 진행 중인 집이라 은행이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며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루하루 버틸 뿐”이라고 했다.
피해자들은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보내지만 가해자인 전세사기 일당은 혐의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지난 4월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된 주범 남씨는 5월3일 열린 재판에서 “사기 혐의가 성립되는지 증인 반대신문을 통해 따져보자”고 요구해 피해자들에 대한 신문이 7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열린 공판만 49차례에 이른다.
더디기만 한 정부 대책도 피해자들을 힘들게 한다. 지난 6월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한국도시연구소 등이 전국의 전세사기 피해자 157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전체 피해자 가운데 17.5%(276명)만 정부 지원을 받았다고 답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피해주택 매입 실적도 ‘0’이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신속한 피해 구제를 위해서는 현행 전세사기 특별법에 ‘선구제 후회수’ 조항을 추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전세사기 대책위원회는 지난 18일 기자회견을 열어 “선구제 후회수 방안이 빠진 반쪽짜리 특별법과 정부 지원대책은 피해자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정부·여당의 무책임하고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않는 태도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고 했다.
이승욱 기자 seugwook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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