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섭의 그레이트 게임과 한반도] [17] ‘동양의 화약고’ 된 만주… 臨政이 상해로 간 건 ‘신의 한 수’였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3. 12. 2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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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만주사변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앞서 푸틴은 지정학적 에세이 한 편을 인터넷에 올렸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역사적 운명 공동체라는 것이 요지였다.

현상 변경을 위해 역사를 정치적으로 동원하면 끝이 없다. 그러면 러시아의 연해주도 불안해진다. 러시아는 1689년 청나라 만주 황실과 체결했던 네르친스크조약을 깨고 만주 동쪽 연해주를 차지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차지하고 있는 만주(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 인구는 약 1억 명이다. 이들이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을 연해주의 러시아인 약 200만 명이 막고 있는 형세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던 이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에서처럼 지정학적 현상 변경이 추구되면 어떤 일이 초래될지도 생각해야 한다.

과잉 팽창 뒤로 남겨진 만주

만주는 인류학적 명칭인 동시에 지리학적 명칭이다. 과거 고구려, 발해, 거란 등이 있던 공간이었다. 만주와 한반도가 “역사적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오용되기도 했다.

1637년 조선 왕의 항복을 받은 만주인들은 1644년 만리장성을 넘었다. 약 100만 명의 만주인들이 약 1억 명의 한인들 위에 군림하는 기형적 가분수(假分數) 제국이 만들어졌다. 만주인들은 티베트까지 팽창하면서 본거지 만주에는 소홀했다. 반추 능력이 결핍된 제국의 과잉 팽창이었다.

1912년 멸만흥한(滅滿興漢)을 내건 신해혁명으로 청 제국은 무너졌다. 한족(漢族)에게 밀려난 만주족은 만주에서 독립국을 세우려고도 했다.

“동양의 발칸”이라 불렸던 만주

1931년 만주사변 이전의 만주는 위안스카이를 계승한 세력(장쭤린), 쑨원을 계승한 장제스에 동조하는 세력, 만주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 공산당에 동조하는 세력, 그리고 남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 등이 결탁, 경쟁하는 복잡한 형세였다.

만주와 북경을 장악하고 있던 장쭤린은 만몽족과 티베트족 등 오족의 협력과 화해를 상징하는 오색기를 휘날리며 장제스의 북벌에 맞섰다. 1928년 장제스 군대에 밀려 북경을 포기하고 만주로 귀향하던 장쭤린을 일본 관동군이 암살한 사건은 1914년 발칸에서의 암살 사건처럼 전쟁을 예고했다.

일본 관동군은 장쭤린 암살을 장제스의 소행으로 위장했지만 실상을 알아챈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반일-친장제스 노선으로 기울었다. 1928년 12월 장쉐량은 오색기를 내리고 청천백일기를 게양했다(동북역치, 東北易幟: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의한 중국 통일).

그런데 장쉐량을 먼저 공격한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장쉐량은 1927년 중국공산당 창건자 리다자오를 처형했던 아버지 장쭤린의 반공 노선을 계승했고, 북만주 철도에 대한 소련의 권익도 인정하지 않았다. 1929년 7월 소련은 전쟁(봉소전쟁)을 일으켰고, 장쉐량 군대는 소련군에 굴복했다. 약 30만 대군과 300대의 공군기를 가진 장쉐량 군대가 의의로 허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남만주 주둔 일본 관동군의 맹동

전쟁은 온갖 핑계들을 끌어들이는 블랙홀과 같다. 일본이 내건 핑계들 중 하나는 구미 열강의 인종차별과 식민주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베르사유 평화조약에 “모든 인종은 평등하다”는 규약을 삽입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백인 우월주의를 고집하던 오스트레일리아가 반대했고, 영국이 거들었다. 의장이었던 미국 대통령 윌슨은 영어권 국가들의 입장을 지지했다. 일본 내에서는 서구 열강의 눈치를 보지 말고 만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졌다. 당시 만주의 면적은 독일과 프랑스의 본토를 합한 크기였다.

1931년 9월 18일 남만주 주둔 일본 관동군은 현지 일본 총영사관도 모르게 장쉐량 군대를 공격했다. 1945년까지 이어진 ‘15년 전쟁’의 지옥문을 연 것이다. 주모자는 일본 관동군 장교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였다. 이 ‘문제적 인물’은 일본 육사 졸업 후 독일에서 유학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원인을 연구했다. 그의 결론은 일본이 우선 소련의 팽창을 막고, 만주와 몽골을 점령해서 신무기를 동원한 미국과의 최종 결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주에서의 좌우 대립

공산주의 소련과 제국주의 일본 사이에 끼어 있던 만주는 좌우 대립의 최전선이기도 했다. 만주사변 발발 1년 전인 1930년 만주에서 김좌진은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당시 만주에서 공산주의는 마른 벌판의 들불처럼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만주사변은 이 들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던 만주의 조선인들에게 공산주의는 매혹적이었다. 자유시사변처럼 어이없는 반민생단 학살 사건이 제동을 걸었다. 1932년 이후 중국 공산당원들이 조선 공산당원들 약 430명 이상을 일제의 밀정이라며 학살한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만주에서 떨어진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었다. 1919년 대한임정 수립 당시 상해의 한인 인구는 약 500명에 불과했기에 당시 약 50만 명에 육박하고 있던 만주 한인 사회에서는 상해의 대한임정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결과적으로 대한임정이 만주가 아니라 상해 프랑스 조계에 세워졌던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만주사변 이후의 대한민국임시정부

1932년 대한임정은 김구의 지휘로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일으켜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당시 사용되었던 폭탄은 장제스의 북벌 전쟁에도 참가했던 김홍일(훗날 육사 교장 역임)이 제공한 것이었다. 한중(韓中) 좌익 협력이 반민생단 학살 사건으로 와해되는 동안 한중 우익 협력이 활발해진 것이다.

만주사변 이후에도 북만주 일대에서 만주 구국군(장쉐량 군대가 만주를 떠난 이후에도 만주에 남아 저항하던 봉천군), 양세봉의 조선혁명군 등과 함께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던 일본 육사 졸업생 지청천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합류했다. 지청천은 이범석과 함께 약 500명의 한국광복군을 이끌었다. 약 700만 명이 넘는 일본제국 군대를 직접 제압할 수는 없었지만 독립 정신을 지키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연합국들로부터 코리아 독립의 약속을 외교적으로 끌어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일본, ‘만주국 승인’ 42대1로 완패 이후 전쟁으로 치달아

만주 문제에 대한 한국인의 입장을 국제사회에서 대변한 인물은 이승만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서 국제연맹이 있던 제네바로 가서 일본의 주장에 맞섰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옹립하여 위성국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인들의 민족자결이라고 강변하고 있었다. 국제법적으로 일본 국민으로 분류되던 만주의 조선족들도 만주국을 지지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제네바 국제연맹은 리턴 조사단을 파견하여 보고서를 만들었다. 만주국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만주에서 일본이 차지하고 있던 특수 권익은 인정했다. 국제연맹의 불청객 이승만은 리턴 조사단 보고서를 발췌하고, 자신의 생각을 더한 ‘The Koreans in Manchuria(만주의 한국인들)’라는 책자를 급조했다. 당시 만주에 있던 약 80만 대한인의 역사와 실상을 담았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하고 제네바에 있던 박석윤(3·1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의 매제)은 이승만의 활동상을 일본에 보고했다.

“이승만은 명의상 상하이 가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입니다. 동지회라는 단체를 각지에 가진 조선 내외 상당한 범위의 여론 대표자입니다. ... 스위스에 도착한 후로는 오로지 지나[중화민국] 대표와 행동을 같이하며 수 종의 배일 문서를 제출하고 있습니다.”

1933년 2월 국제연맹 표결에서 일본은 42대1로 완패했다. 일본은 다음 달 국제연맹에서 탈퇴했고, 같은 해 10월에 탈퇴한 독일 등과 함께 패망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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