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3만2000장, 집필 시간 20여 년…나라 지킨 진주백성 얘기 좀 들어보이소

조봉권 기자 2023. 12. 2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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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보다 길다…대하소설 ‘백성’ 펴낸 김동민 작가

- 조선 임술민란부터 해방까지
- 방대한 한민족 독립투쟁 그려
- 총 21권에 등장인물만 400명

- 최초 운동歌 ‘언가’·사투리 등
- 진주만의 디테일 오롯이 담겨

- “내가 나고 자라 사랑한 진주의
- 가공되지 않은 역사·문화 원석
- 묻혀 있는게 안타까워 작품화”

김동민 작가가 지난 16일 경남 진주시 남강변의 자택에서 자신의 대하소설 ‘백성’(전 21권)과 평소 즐겨 읽는 다른 작가의 대하소설을 앞에 두고 손장단을 치며 ‘언가’를 부르고 있다. ‘언가’는 ‘백성’에서 매우 중요한 노래로 등장한다.


# 전화

전화가 왔다. 모르는 분이다. 목소리가 차분했다. “경남 진주의 김동민 작가가 21권짜리 대하소설 ‘백성’을 전작(全作)으로 펴냈습니다. 방대하고 공력이 많이 들어간 이 작품을 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누굴까? 출판사 담당자일까?

김동민(68) 작가라면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 등장했다는, 하늘을 나는 무기인 비차(飛車)를 담은 장편소설 ‘비차’로 잘 알려진 소설가이다. 전작으로 대하소설 21권을 냈다는 것은 낱권으로 펴내지 않고 한꺼번에 전체를 출간했다는 뜻이다. 요즘 출판 풍토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대형 프로젝트다. 최근 출판은 대체로 ‘작게 작게’ 가지, 이런 식의 초대형 기획은 잘 없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가 모두 20권인데, ‘토지’도 조금씩 나왔다. 출판사는 문이당이라고 했다. 한국 문학 작품을 꾸준히 내며 신뢰감을 쌓아온 중진 출판사이다.

얼마 뒤, 언론에 홍보하기 위한 용도라며 보내준 ‘백성’ 한 질이 왔다. 이 대하소설을 제3권까지 읽고 제4권을 펼치며, 이 작가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진주로 향했다. 지난 16일이었다.

# 만남

김동민 소설가가 진주 남강 강변을 산책하며 사색하고 있다.


1955년 진주에서 태어난 김동민 작가의 집은 경남 진주시의 남강변 주택가에 있었다. 남강은 ‘백성’에서도 중요한 공간으로 나오며, 20여 년에 걸친 길고 긴 ‘백성’ 집필 기간 그에게 휴식·사색·체력·건강·위로를 안겨준 존재다. “200자 원고지로 치면 3만2000장 분량입니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구상과 자료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탈고하기까지 집필 기간은 20년쯤 되는 것 같군요.”

대하소설 ‘백성’은 책이 두껍고 편집이 약간 빡빡하다. “요즘 경향대로 800매를 한 권으로 묶었다면 전질이 40권, 1000매를 한 권으로 했다면 30여 권으로 펴내야 했을 겁니다.” 김동민 작가가 덧붙였다. “2006년부터 만 4년 ‘경남일보’에 연재했습니다(연재 당시 원제는 ‘돌아오는 꽃’). 인기도 제법 있었어요. 맞벌이 부부를 우연히 만났는데, 제 연재소설 때문에 부부싸움도 한다는 겁니다. 아내는 아침에 연재소설을 꼭 읽고 출근하겠다고 하고, 남편은 빨리 일하러 가자고 하고….”(웃음)

# 올인

신문 연재는 스스로 접었다고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다. 연재 지면이 있고 고료가 들어온다는 건 집필에 상당한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때의 흐름대로 연재한다면, 제 구상대로 소설을 완간하기까지 40~50년이 걸리겠더라고요. 그래서 연재를 스스로 중단했습니다. 직장도 명예퇴직했어요.” 전업 작가의 길로 그는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새벽 5시 일어나 집 앞 남강으로 나가 2시간 정도 몸을 다지고 난 뒤 하루 내내 조사하고 집필하는 삶이 시작됐다. 글이 안 풀릴 때는 몸이 아팠고, 글이 잘 풀리면 씻은 듯 나았다. 막힐 땐 ‘토지’ ‘반야’ ‘태백산맥’ ‘아리랑’ ‘변경’ ‘한강’ ‘화산도’ 같은 다른 작가의 대하소설을 읽으며 견뎠다. “친구가 불러 술이라도 마시면 그날과 그다음 날까지 글을 제대로 못 쓰니까,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022년께 탈고한 뒤 책을 만드는 과정도 무척 에너지가 많이 들고 힘들어 탈고 이후 몸무게가 10㎏ 빠졌다.

# 언가

‘백성’은 조선 철종 13년 진주를 비롯한 삼남에서 터진 임술민란을 시작으로 1945년 해방 전까지 시대 배경으로 한다. 중심인물을 비롯해 비중 있는 인물만 400여 명 나온다.

소설의 판도를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태어나 자랐고 익숙하며 깊이 사랑하는 진주에서 시작합니다. 진주는 아주 중요합니다. 통영·남해를 포함하는 서부경남 권역으로, 경남 전체로 나아갑니다. 김해 부산을 거쳐 서울로 가고, 일본 쪽이 많이 나옵니다. 만주 상하이 연해주 미국 등도 포괄합니다.”

한민족의 독립투쟁을 담기 위해 소설은 멀리 나아간다. 그런데 그 출발점인 임술민란을 이끈 실존인물 유계춘(소설에는 유춘계로 등장) 선생은 항쟁 당시 ‘언가’를 지어 널리 보급했다는 역사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지금도 전한다.

# 진주

작가는 ‘언가’를 최초의 ‘운동권 노래’, 다시 말해 저항 대중가요로 보고 중요하게 활용한다. 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그는 곧장 손바닥으로 장단을 맞추며 노래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 망건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 도르매 줌치 장독간/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월에 무서리/ 동지섣달 대서리.”

이 노래 부를 때 작가의 얼굴은 가장 밝았다. 진주 사람은 이 노래를 대체로 안다고 했다. 나중에 진주 출신 지인에게 물어보니 “어릴 때 놀면서 부르던 노래”라며 그 자리에서 ‘언가’를 곧바로 불러주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가사가 일부 바뀐 채 전해오고 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진주는 가공되지 않은 역사·문화의 원석을 참으로 많이 간직한 고장입니다.” 이 점은 그가 ‘백성’을 구상하는 데 아주 큰 구실을 했다. 산물의 집산지, 교통의 요충지, 국방의 거점, 양반 문화, 교방 문화, 농민의 삶, 백정의 고단함을 모두 품은 이 도시의 숱한 ‘원석’이 세공될 기회, 알려질 계기를 갖지 못한 채 묻혀 있는 현실은 작가를 분발하게 했다. 대하소설 ‘백성’은 지역(로컬) 문화와 콘텐츠의 강력한 힘을 증명한다.

# 진주말

작가 김동민의 고향 애착을 보여주는 사례는 인터뷰 내내 차고 넘쳤다. “작가 박경리 선생께서 쓴 명작 ‘토지’에도 진주는 중요한 공간이며, 많이 나옵니다. 진주 토박이인 제가 볼 때 ‘토지’에 나온 진주 말에 통영말의 영향이 스며든 점이 꽤 보입니다.” 그는 “진주에서는 아부지, 할무이, 할아부지로 발음합니다. ‘ㅜ’발음으로 변하죠, 그런데 어머니만큼은 어무이가 아니라 ‘어머이’라고 해요.” 그는 진주말과 진주 문화에 관한 무시무시한 디테일을 끝없이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덕인지 작가 주위에서는 ‘대하소설 백성은 진주말의 보고이며 지역 언어를 살린 큰 성과물이다’ ‘이 작품을 바탕으로 진주 역사문화기행을 새로 시도해야 한다’는 의견을 많이 낸다고 한다. ‘백성’은 등장인물의 대화가 빙빙 돌면서 길게 이어지는 특징이 있다. 이런 특징이 조금은 불편하기도 했고, 작가의 의도도 궁금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됐다. 그는 진주말을, 지역 언어를 살리고 싶었던 거다.

# 백성

‘백성’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주인공은 비화(숨겨진 꽃이라는 뜻이다)라는 여성이다. 비화는 힘겨운 시대, 어려운 환경, 끝없는 위기 속에서 끝끝내 생명력을 잃지 않고 꽃을 피운다.

“진주에 정부인 김씨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콩나물국밥집을 하면서 돈을 모아 한국 최초 남녀공학 학급을 개설하는 등 지역에 크게 이바지한 구한말의 인물입니다. 비화의 모델이기도 하지요. 살면서 만나 보니 아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도 백성 너도 백성 우리 모두 백성이었습니다. 그래 이 백성의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 그는 뜻을 이뤘다.

인터뷰 내내 김동민 작가의 아내 윤덕화 씨가 곁에서 도움을 주었다. 윤 씨는 매리골드차를 내주었다. “매리골드차가 특히 눈에 좋습니다.” 대하소설 쓰는 남편에 대한 마음을 느꼈다. 동시에 생각났다. 아! 이 목소리. ‘백성’을 알리고 싶어 신문사로 전화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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