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총력에서 촌력으로
12월은 행사가 잦다. 한 해를 결산하고 회고하는 자리는 의례적인 의례가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얼마 전 ‘고흥 사람, 삶’이라는 주제로 전남 고흥군에서 열린 사람책 토크는 자신이 사는 지역의 가치와 매력을 발견한 지역 주민들의 ‘긍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조용한 열정이 가득했고, 목소리는 명랑했다.
전남 고흥군은 2021년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89개 인구소멸 위험지역 시군 가운데서도 첫손에 꼽히는 지역이다. 하지만 행사에 참석한 주민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가졌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역 활동을 통해 자신이 사는 지역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각자의 사례들을 만들었다. 자신이 가진 매력자본이 무엇인지 알고 행동하는 지역 주민들이 있는 한, 우리는 작은 희망을 품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고흥군이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을 받아 지역문화활력촉진지원사업(지활 사업)을 추진한 것이 실마리가 되었다. 고흥 특유의 갑계(甲契) 문화를 활용해 문화갑계 사업을 하고, 주민의 눈으로 여행 코스를 짜는 노마드 고흥 같은 사업을 추진하며 주민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고흥에 살면서도 정작 고흥을 잘 몰랐다며 ‘간증’의 언어들을 쏟아냈다. 고흥만 간척지를 찾는 노랑부리저어새의 아름다움을 미처 몰랐던 자신을 자책하고, 별자리 여행을 하며 별 헤는 밤의 고요를 알아차린 이야기를 했다. 또 사람들과 어울려 바느질을 하며 배우는 기쁨을 알았으며, 고흥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했던 풋고추물김치, 피굴김치의 맛과 멋을 발견했다. 어느 주민이 “무심코 지나쳤던 동네 풍경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며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 말이 퍽 인상적이었다. 늘 ‘보는’ 풍경이 평소와 다르게 ‘보이는’ 발견의 재미를 강조한 말 아닌가.
이러한 변화는 1인칭의 마음 덕분에 가능했다. ‘뜨면 그만’인 관광객의 시선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즐거워야 다른 사람들에게 다정할 수 있다. 인구소멸과 지역소멸 문제를 생각할 때, 숫자이자 삶으로서 인구(人口)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자리 이야기를 넘어 로컬이라서 꿈꿀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非凡)한 힘을 신뢰해야 한다. 인구 정책 또한 국민 총력을 부르짖던 시대의 관점이 아니라 ‘시골력’을 북돋는 촌력 시대의 관점과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국민총력에서 촌력으로! 이것이 지역문화정책의 슬로건이 되어야 한다.
나는 고흥이 ‘설렘시티’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주민의 시선과 외부인의 시선이 적절히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엊그제 출간된 서진영의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현재 얼마나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는 곳인가를 가늠하기보다 얼마나 여지가 있는 곳인지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달까.” 설렘시티는 ‘여지’가 있는 곳을 주민들이 스스로 만들 때 가능해진다. 조금 다른 삶, 조금 다른 도시는 가능하다. 설렘이 있고, 서로가 서로의 든든한 ‘배후’가 된다면. 우리가 같이 걸어가면 길이 된다. 저 국토의 끝, 고흥이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이제 고흥을 생각하는 관계인구가 되었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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