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의 이야기의 발견] 명예의 전당
생쥐로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깨달았다. 나는 보통의 표준적 생쥐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환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오류 탓에 나의 뇌에는 한 인간의 기억이 버그로 남았다.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말에 코웃음 치던 어리석은 인간에게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무너져가는 도서관 속에서 헤매고 있다. 날마다 자라나는 앞니로 책 속에서 찾아낸 낱말 몇 개를 갉아먹는다. 평생 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다가 마침내 열람실 책상에 엎드려 종말을 맞이한 인간의 기억을 여전히 지니고 있기에.
폐허가 된 도서관은 거대한 미로다. 수백개의 서가들, 꽂혀 있는 수천만권의 책들, 그 속에 적힌 깨알 같은 낱말들이 수천만 갈래의 길을 만들고 있다. 검은 글자들과 하얀 빈자리가 만들어내는 길이다. 오래전에 이미 사라진 존재가 머릿속에서 중얼거리며 끼어든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길 따위는 없어. 평생 진실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책 속에는 길을 방해하는 길, 출구 없는 미로가 있을 뿐이야. 무슨 뜻이냐고?
위대한 작가를 인터뷰한 책을 읽은 적이 있어. 작가는 책을 쓰려고 나무, 나비, 인간과 같은 살아 있는 존재로부터 무언가를 훔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 그것은 달콤한 꿈속에서 인간을 유혹해 생명의 정수를 빼앗는 서큐버스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누구나 자기 삶에 대한 소유권과 특허권이 있기에 그것은 저작권 침해와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했지. 고귀한 진실이 담긴 말이구나.
작가가 쓴 책을 찾아서 읽어 보았어.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살아온 여자가 두 살배기 딸의 목을 톱으로 긋는 이야기였어. 여자는 노예로 살아가야 할 딸의 미래가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알았던 거야. 끔찍하지. 오랜 세월이 지나 살인의 대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여자에게 너무나 사랑해서 죽인 딸의 유령이 찾아와.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지! 마치 신이 직접 말하고 있는 것 같구나! 하지만 책 뒤에 붙은 해설을 읽고 생각이 달라졌어. 실제로 1856년에 켄터키의 농장에서 자녀들을 데리고 탈출한 여자 노예가 있었는데, 신시내티에서 숨어 살다가 노예 사냥꾼에게 잡히기 직전 제 손으로 딸의 목을 베었다는 거야. 작가는 출판사에서 일할 때 흑인 노예의 역사를 다룬 책을 편집했어. 그래서 그 사건을 알게 된 거지. 나는 의심에 사로잡혔어. 살아 있는 존재의 삶을 훔치면 안 되지만, 죽은 이의 고통은 훔쳐도 괜찮은 건가. 한 사람의 삶은 어디까지가 온전히 그의 것인가. 태어난 사회와 옭아매고 있는 관습과 제도, 연결된 사람과 사물은 누구의 것인가. 어떤 사건을 목격한 이의 삶은 결국 자신이 목격한 장면과 뒤섞이는 게 아닌가.
작가는 하마터면 묻힐 뻔한 심장의 고동, 흐르는 눈물, 일그러진 근육과 내지른 비명, 터져 나온 폭소 같은 것들을 살려냈어. 타인의 고통을 지나쳐버리는 무관심의 굳은살을 예리한 문장으로 도려내고, 피 흐르는 생살에 공감이라는 소금을 마구 뿌려댔지. 흑인 노예에게도, 여느 인간에게나 있는 감각과 감정과 마음이 있음을 보여줬어. 독자들은 작가의 시적 문장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에 찬사를 보냈지. 나는 또 길을 잃었고. 고통스러운 진실 위에서만 작가의 위대한 명예가 솟아오르는 건가.
인간의 기억은 속삭인다. 평생을 따라다니던 검은 글자들의 길에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의혹뿐이었다고.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에 지나지 않았다고. 진실이든 뭐든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글자들의 길이 아니라 여백의 길에 있을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생쥐의 몸에 인간의 회한을 담은 채 살아가는 내가 이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도서관에서 살고 있는 이유이다. 명예의 전당에 남은 고대의 유물 속 글자들을 갉아 먹으며, 누렇게 삭아버린 미로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언젠가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으며. 나 홀로.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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