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정말 지난 30년을 ‘잃어버린’ 걸까…엔화로 이해하는 일본 경제 [투자뉴스 뒤풀이]
글로벌 경제에서 최근 가장 핫한 주제가 바로 일본은행(BOJ)과 일본 엔화 그리고 범위를 확대해 일본 경제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일본 경제를 1990년대 버블 붕괴와 함께 ‘잃어버린 30년’이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과연 일본 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앞날을 바로 예측하려면 지나온 길을 제대로 살펴야 합니다.
30년이나 경제가 허덕였다는 나라의 통화가 여전히 중요한 안전자산이고 주요한 글로벌 통화 역할을 한다? 언뜻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 같지 않나요? 30년이면 진짜 긴 세월입니다. 그 긴 시간 경제가 침체되고 무너졌다면 그 나라 통화는 국제적으로 쓸모가 없어져야 합니다.
아니면 그 통화는 약세를 보이면서 대외수지 개선으로 이어져 경제가 살아나고 다시 통화가치는 올라가는 것이 상식적인 경제학적 과정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엔화는 주요 기축통화 가운데 하나로 굳건히 자리 매김했고, 크고 작은 글로벌 위기 때마다 안전자산으로 등판해 몸값을 오히려 키웠습니다. 지난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때 엔화 가치가 또 급등한 적이 있죠.
혹시 ‘잃어버린 30년’에서 진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일본이 잃어버린 건 그동안 쌓아올려서 갖고 있던 부와 자산이 아니라, 더 발전하며 성장할 수 있었고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던 잠재적 미래 소득이 아니었을까요?
실제로 뭔가를 까먹거나 뒷걸음질 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잘 살고 발전할 수 있었지만 그 속도나 규모가 예전보다는 혹은 기대보다는 조금 많이 부족했단 것입니다. 명심해야 할 건, 그럼에도 일본은 글로벌 3~4번째 경제력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순식간에 성적이 치솟아 전교 2등까지 오른 학생이 어떤 이유에선지 그 뒤로는 도통 성적이 오르지 않은 셈이죠. 명심할 건, 그렇다고 이 학생이 성적이 곤두박질치면서 우수한 학습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일본 엔화가 어떻게 글로벌 주요 통화의 지위를 얻게 되었는지, 이것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으며 어떻게 그 지위를 ‘잃어버린 30년’이란 세월 동안 유지, 아니 오히려 공고히해왔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과거가 일본 경제의 앞날엔 또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마지막에 짧은 제 의견을 덧붙이겠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일본 경제는 정말 눈부시게 발전을 하죠. 80년대 들어서는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까지 위협했습니다.
미국인들이 느낀 일본에 대한 두려움은 8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심심찮게 포착됩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그린 미래 미국이란 곳은 우울하기 짝이 없고, 온통 일본풍으로 가득하죠. 영화 '백투더퓨처'에선 과거로 돌아간 맥플라이에게 박사가 "일본 제품을 쓰니깐 고장이 나지"라고 타박하자 "이젠 모두가 일제를 쓴다"고 받아치기도 합니다.
그런 미국과 일본 경제는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급변합니다. 플라자합의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1년도 안돼 꺾인 중국 위안화의 기축통화 꿈 [투자뉴스 뒤풀이]"(2023.09.05)에서 설명드렸습니다. 참조 부탁드립니다.
말이 '합의'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이 플라자합의로 미국 달러 가치는 급락하고 일본 엔화 가치는 급등합니다.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던 일본 제조업은 휘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의 모든 자산시장이 부풀어 올랐던 일본 경제는 한순간 바람이 빠지며 그 유명한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플라자합의로 일본이 얻은 아주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그간 일본 경제력을 등에 업고 널리 활용되던 엔화의 지위가 한 단계 더 격상돼 아예 글로벌 주요 기축통화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그 통화의 지위는 격상된다? 이 아이러니가 가능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대략 아래 요인들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은 일단 경제규모가 크고 불확실성은 낮습니다. 무엇보다 무역수지가 계속해서 흑자를 이어가고 이를 바탕으로 대외순자산, 좀더 구체적으로는 미 국채를 쓸어 모읍니다. 외환(달러) 보유규모는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많습니다.
민간 부문을 다 합쳐 내수 비중이 75% 안팎에 달해 대외충격에 민감도가 낮은 것도 한 몫 합니다. 또 일본 가계는 자산의 54%를 현금성 자산으로 보유할 정도로 선진경제 중 가장 보수적입니다. 이에 비해 주식비중은 11%에 그치기 때문에 글로벌 호황·불황에 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미국 가계의 현금성 자산 비중은 12~13% 수준이며 주식은 40%에 달합니다. 때론 이 때문에 일본이 '갈라파고스'라는 비웃음을 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 덕분에 안정성을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제적 요인만으로는 엔화가 기축통화 자리를 꿰차는 걸 설명하기 부족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플라자합의로 일본이 완전히 미국에 굴복을 선언했단 것입니다. 40년 전 태평양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일본에 승리를 거둔 미국이 경제 측면에서도 일본에 항복을 받아 낸 것이 바로 플라자합의입니다.
플라자합의로 일본은 경제적으로도 확실히 미국에 굴복했고 그 편이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곧 미국 중심의 글로벌 질서에서 일본이 '안전하다', '믿을 수 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한 나라의 통화가 다른 나라들에 의해서도 쓰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바로 이 신뢰, 안정성이란 면에서 플라자합의는 수출 위주의 일본 산업계엔 날벼락이었겠지만 엔화에겐 천지개벽의 순간인 셈입니다.
▶앞서 언급한 무역수지 부문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일본은 90년대 불황에도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이어왔습니다. 아래 표를 보시죠. 2010년대 들어 이른바 '아베노믹스'가 도입되기 전까지 일본은 줄곧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해왔습니다.
다시 엔화 이야기로 돌아와 보죠. 이렇게 지속된 무역수지 흑자는 일본에 막대한 달러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대외지불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 주었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엔화가 안전자산 지위를 공고히하게 했습니다.
또 계속해서 유지한 '제로(0)' 금리 정책은 일본에서 싼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 세계 이곳저곳에 투자를 하는 기회로 작용했습니다. 그 유명한 '와타나베 부인'들이죠. 자연히 경제의 큰 축이며 내수경제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금융산업도 발전하게 됩니다.
또 일본을 중국에 이어 미국의 최대 순채권국, 즉 미국에 가장 돈을 많이 빌려준 나라가 되게 했습니다. 미국과 일본 경제가 서로 밀착돼 있는 이유죠. 미국 없는 일본은, 일본 없는 미국만큼이나 치명적입니다.
그런가하면 제로금리를 바탕으로 전세계에 퍼진 자금을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위기 국면에선 상환을 위해 불러들이기 때문에 엔화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발생해 엔화가 강세를 보이게 됩니다. 이는 엔화가 위기 상황에서 도피처가 되는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이유가 됩니다.
▶자, 지금까지는 엔화가 어떻게 안전자산이 됐는지 말씀드리면서 특히 미국과의 일심동체,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에 대해 조금은 더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분명한 건 일본의 최근 20년 평균 경제성장률은 고작 0.55%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낮았단 것입니다. 미국(1.95%), 독일(1.08%)보다도 한참 낮습니다. 그 사이 중국은 9.08%나 되며 치고 올라오며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됐습니다. 이렇게 낮은 성장률은 경제 측면에서 잃어버린 시간이라 불러도 무방하죠.
그런데도 일본은 여전히 세계 경제순위 3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대체 잃어버린 30년이라면서 왜 무역수지는 늘 흑자였을까요? 엔화의 지위는 이 모든 것이 밑받침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글로벌 최고의 일본 기업들이 잃어버린 30년 간 속절없이 무너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유명 기업들이 망한 기억이 뚜렷한 건 그 기업들이 대부분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소비재 기업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산업의 토양과 뿌리를 만들어온 일본 제조업은 꿋꿋하게 버텼고 해외로 생산시설을 옮기거나 내부 혁신 등을 통해 생산성을 유지하거나 높여왔습니다.
아래 표를 한번 보시죠. 90년대에 비해 2000년대 중반부터 제조업의 생산성은 낮아지는 건 선진국 모두에서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1995년부터 2004년까지 제조업 노동생산성 성장률이 6.1%에 달했던 미국은 2004~2016년 사이 1.9%로 쪼그라듭니다. 독일은 2.9%에서 1.9%로 감소합니다. 이 기간 일본은 3.3%에서 2.4% 감소하는데 그칩니다. 일본 제조업의 저력입니다.
전기차나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 등 최근 각광을 받는 성장산업에서 일본 기업이 뚜렷하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탓에 일본 산업계가 뒤처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을 떠받드는 반도체 소재, 기계, 로봇 등 산업재 전반에선 전세계 최고 역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계·장비(Machinery and equipment) 부문의 생산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일본의 기계·장비 부문은 닦고조이고기름치는 그런 기계장비가 아니라 최첨단 분야입니다. 뒤에 반도체를 설명드리면서 좀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더군다나 중국에 대응해 글로벌 안보 지형을 새로 짜는 미국에게 일본은 최고의 파트너가 돼 주고 있습니다. 미국 국채를 덩어리째 들고 있는 일본을 미국은 믿지 않을 수 없고,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해외로 떠나 생산성을 높이며 경쟁력을 쌓아온 일본 기업들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30년간 자산시장이 침체를 겪었으니 뭐 하나 싸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땅값도 싸고 인건비도 싸고 서비스 가격도 싸고 금융조달비용(=금리)도 싼 일본에 미국 등 우호국의 자금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한국인 관광객들만 엔화 약세에 환호하며 일본을 찾는 게 아니란 겁니다. 워런 버핏이 30년 채권으로 자금을 조달해 일본 상사를 매수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일본이 지난 30년 간 잃어버린 성장 동력을 다시 찾는다면, 어느 부문에서 가장 위력을 발휘할까요?
저는 반도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반도체? 90년대 삼성전자에 깨진 그 일본 반도체? 일본에 무슨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가 있던가?
네, 많습니다.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의 회사들이 정말 많습니다. 반도체는 하나의 상품인 동시에 다른 산업의 재료이기도 합니다.
일단 반도체가 왜 중요한지, 일천한 지식을 바탕으로 짧게나마 강조해드리겠습니다.
1990년대는 PC시대, 2000년대는 인터넷 시대, 2010년대는 모바일 시대 그리고 현재의 2020년대를 AI시대라고 한다면 그 모두를 관통하는 것이 바로 반도체입니다. 이보다 앞선 시대의 최고 전략자산은 당연히 석유였습니다. 석유를 지배하면 세계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최고의 전략자산은 반도체입니다.
여기서 잠깐! 반도체의 원료가 뭐죠? 규소, 즉 실리콘입니다. 실리콘은 모래의 기본 구성요소입니다. 지구상에 널리고 널린 게 모래죠. 참고로 지표면에서 가장 비중이 큰 원소가 산소(46.6%)고 다음이 실리콘(27.7%)입니다. 이전 시대의 전략자산인 석유가 지리적 축복의 산물인 것과 달리 반도체는 오로지 기술력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산업입니다.
플라자합의만큼이나 반도체의 역사에 중요한 사건이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입니다. 이것도 말이 좋아 '협정'이지 분기별 반도체 수출 가격 자료를 미국 상무부에 제출해야 하고, 일본 내 미국산 반도체 점유율을 20% 이상 유지하도록 하는 등 완전히 일방적인 명령이나 다름없습니다. 일본은 이 역시 받아들였습니다.
일본은 그렇게 반도체 패권도 미국에 넘겨주었고 그 대신 완전히 미국의 편에 서게 됩니다. 플라자합의를 통한 달러의 완전한 기축통화 지위 구축과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확보한 반도체 패권은 미국을 지금까지도 글로벌 최대 강국으로 떠받드는 양대 기둥이 됩니다.
그럼 일본 반도체 산업은 어느 수준일까요?
반도체 종류도 많고 각각의 반도체를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공정도 참 다양합니다. 그 공정 하나하나를 만드는 소재, 부품, 장비들 모두가 초고부가가치 제품들입니다. 이 모든 분야에서 일본은 상당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가 실리콘을 웨이퍼로 만드는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일본의 신에츠와 섬코입니다. 반도체 웨이퍼 시장은 반도체 소재 전체 시장의 20%를 차지할 정도입니다.
애플이 2000년대 들어 삼성전자와 결별하고 선택하면서 단숨에 세계 최대 반도체 수탁생산(파운드리) 업체로 올라선 대만의 TSMC가 미국에 공장(팹) 증설은 망설이면서 일본 구마모토에는 자처해서 10조원 규모의 신규 팹 투자를 진행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만큼 반도체를 떠받치는 일본 제조업 토양이 비옥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위에 언급한대로, 모든 것이 싸고 미국과 관계가 안정적인 것도 큰 매력입니다.
(반도체 오디세이(이승우 지음) / Productivity comparisons: Lessons from Japan, the United States, and Germany (ECONOMIC STUDIES AT BROOKINGS 2020.1.) / 일본 증시는 신고가인데 엔화는 약세를 보이는 이유(이웅찬 하이투자증권) 등을 참조했습니다)
김우영 기자/CFA
#헤럴드경제에서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CFA 자격증을 취득한 뒤 CFA한국협회 금융지성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보를 알기 쉽게 전달해야 하는 기자로서 사명감에 CFA의 전문성을 더해 독자 여러분께 동화처럼 재미있게 금융투자 뉴스를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kw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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