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할머니’가 거리로”…이승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배지현 2023. 12. 2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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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기까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얘깁니다.

그해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가 공공연히 드러났고, 마산에서는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위에서 실종됐던 당시 고등학생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떠오르면서 역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후 마산 지역에서는 정권에 반발하는 거센 시위가 계속됐고, 이는 4·19혁명과 이승만 하야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최근 이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중요한 분기점을 '할아버지·할머니'가 주도해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를 통해 처음으로 규명됐습니다.

■ 나라 걱정한 '할아버지·할머니' 거리 나서자… '이승만 퇴진운동' 발단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틀 전인 1960년 4월 24일과 25일에 마산 지역 할아버지·할머니 등 노인층이 주도해 '이승만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참, 이 당시 노인의 기준은 50세부터였다고 합니다.)

마산 시민 수만 명도 할아버지·할머니 시위에 호응해 거리로 나서면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진실화해위는 '할아버지·할머니 시위'가 '이승만 퇴진'을 콕 집어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승만 퇴진운동'이 전국 시위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민주정치와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할아버지들/1960.4.24. 마산 지역 ‘할아버지 시위’ 당시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할아버지·할머니 시위' 직전의 마산은 그야말로 얼음장같이 얼어붙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3.15의거와 4·19혁명을 거치며 마산 지역에만 총 1,000여 명의 경찰이 투입된 상황이었고, 대규모 검거는 물론이고 통행금지, 휴교령을 내리는 등 공권력에 의해 극도로 억압되어있던 시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통상 사회 여론 주도층으로 간주되던 대학생, 교수, 언론인 등 지식인층과 정치권에서도 4월 24일까지 '이승만 대통령 퇴진'이라는 선명한 입장을 내걸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마산 지역의 일반 대중들이, 그 중에서도 '할아버지·할머니'가 중심이 돼 "대통령은 책임지고 물러나라"며 이승만 대통령 퇴진 운동의 불씨를 당긴 겁니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이들의 기록이 생생하게 나옵니다. 25일 할머니 시위 내용을 담았습니다.

마산경찰서에 진입해 이 대통령 물러가라며 시위를 펼치고 있는 할머니들/1960.4.25 ‘할머니 시위’ 당시 사진/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24일의 마산 노인의 시위에 이어 25일 오후 1시 15분 경, 시내 부림동 시장 강남극장 앞에 모인 할머니 200~300명이 대오를 갖추고 부림시장을 출발해 시위를 하였다. 흥분한 시위대는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 물러가라”, “총 맞아 죽은 학생 원한이나 풀어주소”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애국가와 전우가를 손뼉 쳐가며 부르면서 북(北)마산파출소를 거쳐 구(舊)마산 시가를 한 바퀴 돌고, 신(新)마산 쪽으로 향하여 다시 시청 앞을 통과하였다. 오후 3시 30분 현재 약 3만 명으로 추산되는 시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마산경찰서 안으로 밀려들어가 “고문경찰 잡아내라”, “살인경관 잡아내라”고 외치면서 대혼잡을 이루었다.
(『마산일보』1960. 4. 26 2면 ,『동아일보』1960. 4. 26 조3면 , 『조선일보』1960. 4. 26 조3면 )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당시 언론 보도 내용 등으로 진실화해위가 파악한 '할아버지·할머니 시위' 최초 참가자는 270명에서 700여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진실화해위 설명에 따르면, 24일~25일 오전에 할아버지·할머니 시위가 각각 열렸고, 이에 동참한 마산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오후부터는 시위 참가자가 3만~5만 명이 넘게 늘어났습니다.

진실화해위는 "마산지역 노인들의 시위는 26일 오전 부산지역 노인 시위에 영향을 줬고, 부산 노인 시위가 부산지역 대규모 시위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시위하고 있는 할머니들의 광경/1960.4.25 ‘할머니 시위’ 당시 사진/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이어 진실화해위는 "'할아버지·할머니 시위'는 4월 25일을 기점으로 다발적이었던 시위들을 전국적 차원에서 '이승만 퇴진운동'으로 전환하는 데 중요 역할을 했지만, 그동안 3.15 의거사에서 제대로 언급되거나 평가받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진실화해위는 "이 시위는 수차례 국가권력의 폭압적 모습을 목도한 마산 기층 민중들의 자발적 민주화 운동으로, 지역 노인들이 주도해 정권 퇴진을 외쳤다는 점은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진화위 3.15 의거 조사 2주년…"관련 희생자 2명 더 있다"

앞서 설명한 '할아버지·할머니 시위'는 진실화해위 직권조사를 통해 지난 19일 진실규명이 결정됐습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1월부터 '3.15 의거법'이 시행되면서 담당 과를 설치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유혈 민주화운동인 3.15의거에 대한 조사를 약 2년간 진행해왔습니다.

어제(19일)는 제69차 위원회를 열고 직권조사 대상인 '할아버지·할머니 시위' '부산 시위대 마산 원정 시위'에 대한 진실규명 등을 결정했습니다.

앞서 마산의 '할아버지·할머니 시위'가 26일 부산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고 언급했었는데, '부산 시위대 마산 원정 시위'는 부산 시민 20만 명이 모인 그 날의 대규모 시위에서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1960.4.26 오후 마산으로 진입하는 부산시위대 모습/진실화해위 제공


1960년 4월 26일 오후, 부산 시위 참여자들이 일부 차량에 탑승해 개별적으로 마산으로 향해 원정시위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 마산 시민들도 합류한 사건입니다.

당시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진실화해위가 파악한 원정대의 숫자는 최소 500명에서 2천 명 정도인데, 이 원정시위 과정에서 공권력이 시위 참여자를 체포하거나 잡아 가두는 등 인권침해와 함께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부산 시위대 마산 원정 시위'에는 고등학생과 청년을 중심으로 여러 계층이 참여했는데, 진실화해위는 당시 공권력과 일부 언론에서 시위 참가자들을 '깡패, 건달, 양아치, 난동, 폭동' 등으로 왜곡한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1960.4.26~27 마산 무학국민학교 교정에 수용된 부산시위대 모습/진실화해위 제공


또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 진상규명 과정에서 2명의 희생자를 추가로 확인했습니다.

이로써 3.15 의거 관련 희생자는 3.15 시위 사망자 김주열 열사 등 11명, 4.11 시위 사망자 김영길, 그리고 4.26 부산시위대 마산원정시위 사망자 김종술 등 4명을 포함해 총 16명임이 확인됐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습니다.

진실화해위는 올해 10월 4일부터 12월 31일까지 과거사 규명이 필요한 사건을 추가로 접수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104건의 사건이 추가로 접수됐습니다.

진실화해위 측은 "추가 접수 건에 대해선 "2024년 1월부터 본격적인 조사개시 예정"이라며 "조사개시 사건에 대한 자료, 진술 조사를 통해 진실규명을 추진할 계획" 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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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현 기자 (vetera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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