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론직설] “양당 카르텔 체제에 정치 실종, 유권자 심판으로 정치 복원해야”
국제질서·문명 대격변에도 미래 담론 없이 과거에 매몰
‘책임 정치’ 위해 의원평가제·정당법 등 제도 개선 필요
총선의 선택이 국가 미래 결정···유권자에 ‘희망’ 있어
팬덤정치·극단분열 막으려면 중간층이 투표 참여해야
내년 4월 10일 치러지는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다가오면서 여야 정치권이 요동치고 있다. 인적 쇄신과 혁신의 구호가 넘쳐나는 가운데 정계 개편론에도 불이 붙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분열과 대립, 막말과 선동으로 점철된 정치에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 무관심과 혐오에 빠진 지 오래다. ‘정치의 해’가 될 2024년을 앞두고 한국정치학회장으로 취임한 조화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0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책임지지 않는 정치를 가능케 한 양대 정당의 카르텔 체제가 한국 정치 후진성의 핵심 요인”이라고 지적하며 “다당제 출현과 국회의원들의 책임 강화, 공천 시스템 개선 등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 학회장은 “중간 계층이 정치에 냉담해진 상황이 극단적 팬덤·혐오 정치를 증폭시킨다”면서 “정치 복원의 희망은 결국 유권자들에게 있으므로 유권자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투표로 엄중한 심판을 내려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시대의 정치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전 세계적으로 불안정성이 큰 시기다. 냉전 후 안정됐던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이념·경제의 진영화가 두드러진다. 탈세계화와 경제·과학기술·안보와 같은 화두는 국제 질서의 양태가 전과 확연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디지털 대전환’이라는 문명사적 변환도 진행 중이다. 이 모든 문제들이 정치 어젠다에 해당된다. 문명의 흐름과 국제사회가 바뀌고 있는 중요한 시기를 맞아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고 평화와 번영을 이어갈 미래를 설계해 구체적 정책을 창출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미래 담론이 나오지 않고 있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현실을 어떻게 진단하는가.
△정치 세력 간 극단적 분열과 대립이 국가 역량과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정치 실종’ ‘정치 무용론’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현실을 보면서 정치학자로서 자괴감이 든다. 안팎으로 산적한 과제를 외면하거나 졸속 처리하고 권력 투쟁에만 몰두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는 가운데 양당의 지지 세력은 날로 강경해지는 반면 중간 계층은 갈수록 정치에 냉담해지고 있다. 유권자의 약 30%로 추정되는 무당파층의 정치 혐오와 무관심은 정치 양극화를 더욱 증폭시키고 민주주의 기반을 침식한다. 양극화와 혐오에 기대어야 선거에서 승리하는 악순환을 깨려면 중간 계층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투표를 통해 정치인을 평가해야 한다.
-고(故) 이건희 회장의 ‘정치 4류’ 발언 후 30년이 다 돼 간다. 한국 정치가 여전히 후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양대 정당의 카르텔 체제다. 기업은 잘못 경영하면 망하지만 국고보조금을 받는 정당은 망하지 않는다. 기업 구성원이 잘못을 저지르면 책임을 져야 하지만 국회의원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제명 위험도 없고, 범죄를 저질러도 면책특권 뒤에 숨을 수 있다. 선거 결과로 책임 진다고 하지만 카르텔 정당 체제에서는 공천을 받기만 하면 당선을 기대할 수 있다. 두 거대 정당도 민주화 이후 이념·진영·계급과 같은 구시대적 어젠다로 수십 년 동안 간판만 바꿔 달며 존속해 왔다.
-한국 정치를 바꾸기 위한 제도 개혁 방안을 제시한다면.
△유권자 이익을 제대로 반영하는 정책 아이디어를 많이 지닌 정당들이 국회로 진출하고 다수당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야 한다. 정당법 17·18조가 법정 시도당 수와 법정 당원 수를 규정하고 있어서 전국적 네트워크와 돈이 없으면 정당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 이 규정이 수정돼야 기존의 카르텔을 깨뜨릴 수 있는 새 정당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이 극단적 정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국회의원 평가 제도나 국민소환제 등 의원의 책임성을 강화하고 견제할 수 있는 제도도 강구해야 한다. 법안 발의 건수, 국회 상임위원회 출석과 같은 양적 잣대로만 평가가 이뤄지면 국회의 질은 갈수록 낮아질 뿐이다. 의정 활동에 대한 질적 평가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공천 시스템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 국회의원들은 의정 활동을 잘 할 필요 없이 공천권을 쥔 당 대표나 실세에게 잘 보이기만 하면 된다. 당 대표가 공천권을 실질적으로 포기해야 의원들이 본연의 책무를 다하게 될 것이다.
-보수·진보 양당 구조가 뿌리 깊지만 우리나라에 진정한 보수와 진보가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한국의 보수는 산업화와 경제 발전이라는 규범을, 진보는 민주화라는 도덕적 규범을 토대로 각각 성장해 왔다. 문제는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이들이 편협한 진영 논리와 과거 담론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새 시대가 요구하는 해법을 찾기보다는 민주화 이념을 성역화하고, 발전국가 이념을 절대시한다. 앞으로 국가가 더욱 발전하려면 국민들과 기업들에 최대한 정치·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면서 공동체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이미 사회주의가 망했는데도 국가가 경제와 분배 시스템을 좌우하거나 기업을 동원하는 1980년대식 해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의 이념 지향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빨리 세대교체가 이뤄져야 한다.
-과거에도 수차례 세대교체론이 제기됐지만 진정한 정치 혁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국회에서 청년과 초선 의원들의 운신의 폭이 작다 보니 혁신을 촉발할 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모양 갖추기 식’ 청년 영입은 구태를 재생산할 뿐이다. 정치에 진입한 청년·초선 의원들이 목소리를 뚜렷하게 내야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의원들이 성과를 내야 보상 받을 수 있도록 건강한 생태계가 형성돼야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초선 의원들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다. 정당에서 교체돼야 할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은 채 물갈이를 시도하다 보니 신인들은 정책으로 승부를 걸기보다는 과격한 언행으로 눈길을 끌려는 행태를 되풀이하게 된다. 게다가 현역 의원 교체율이 높으면 의원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거나 전문성을 키우지 못한다. 제대로 된 의원 평가 시스템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면 봇물 터지듯이 혁신이 이뤄질 것이라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내년 4월 총선이 한국 정치에서 갖는 의미가 클 것 같다.
△지금은 미중 패권 경쟁 심화, 인공지능(AI)이 추동하는 기술 혁명, 전쟁과 안보 위기, 저출산 등 구조적 문제들이 수많은 과제를 만들어내고 있는 중대한 시기다. 이번 총선에서의 정치 리더 선택이 국가의 방향성을 결정할 것이다. 유권자들은 정파성에 국가 운명을 내맡겨서는 안 된다. 특히 대통령이 국가 개혁 과제를 실천할 동력을 얻을 수 있을지 여부가 이번 총선에 달려 있기 때문에 선거 경쟁은 사투(死鬪) 수준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가 더 망가질 수도 있다.
-총선을 앞두고 유권자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선심성 공약 남발, 조작된 허위 정보와 같은 가짜뉴스 등이 주요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의 대가는 유권자 스스로 치르게 된다는 점을 꼭 강조하고 싶다. 정치에 냉담한 유권자를 만든 것은 많은 부분 정치권의 잘못이지만, 그럴수록 유권자들은 정치에 더 관심을 갖고 투표로 엄중하게 심판해야 한다.
-정치 혁신을 위해 한국정치학회의 역할도 달라져야 할 것 같다.
△학회는 학자들의 지적 교류의 장이지만 2024년에는 정치 지식을 미래를 위한 정치 발전에 활용하는 것이 목표다. 학회장을 맡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다. 학자의 정치 발언이 특정 정당을 편드는 것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정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정치학자들이 목소리를 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가동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국회의원 평가 제도와 공천 제도 개선, 정치 교육 강화 등을 위해 목소리를 높일 계획이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 운영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개혁 의지는 많지만 거대 야당에 의해 입법이 막히면서 제한적으로만 국정이 수행되고 있다. 그런 점에 대해서도 총선에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미래를 위한 국정 운영이 어떻게 진행될지가 앞으로의 중요한 어젠다인데 그런 측면에서 정부가 의미 있는 변혁을 추진해야 한다. 무엇보다 너무 촘촘한 기업 규제들을 과감하게 풀어야 한다. 절차적 정의를 따지고 국가가 사사건건 관여하다 보면 현장에서는 규정만 준수할 뿐 책임질 일을 벌이지 않게 된다. 기계적으로 절차와 규정을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매뉴얼 사회에서는 생산성을 높일 수 없다.
-한국 정치의 희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는가.
△결국은 유권자들이다.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하고, 투표로 심판하는 유권자들의 힘이 모여야 미래를 바꿀 수 있다. 국민 대다수의 지극히 상식적인 결정을 믿는다. 일단 중간 계층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극단적 혐오와 선동 행위에 대한 평가를 내리면 정치적 메시지도 정파적 편향성에서 벗어나 통합의 메시지로 조정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판적 담론을 형성하는 정치학자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아는 것을 실천하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지식인이 더 많아져야 한다.
◆She is···
196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방문 교수,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연세대 디지털사회과학센터장을 맡고 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정치학 분야 최초 정회원이다. 주요 저서로 ‘한국 정당의 미래를 말하다’ ‘빅데이터로 보는 한국정치 트렌드’ ‘네트워크와 혐오사회’ 등이 있다. 이달 초 제53대 한국정치학회장으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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