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살리려 모두가 죽는 ‘그 연극’…김혜수·박보검도 관람 [고승희의 리와인드]
오는 25일까지ㆍ명동예술극장
여섯 시즌 내내 베스트셀러 명작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왕후장상의 씨가 아니면 남의 팔자에 따라 살고 죽는 겁니까.”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중 정영 아내의 대사)
단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죽는다. 의리와 충절이 지배하는 고대의 세계관. ‘칼로 물 베기’라던 부부싸움은 처절했다.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조씨고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려는 아비 정영(하성광 분). 아내는 “하룻밤 새에 바보천치가 됐다”며 “그깟 약속이 뭐라고, 그깟 의리가 뭐라고, 남의 자식 때문에 제 애를 죽이냐”며 피를 토한다. 남편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때려도 ‘예정된 운명’은 바꿀 수가 없다. 텅 빈 무대,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마룻바닥에 관객을 등지고 앉은 정영의 처(이지현 분). 아이의 죽음을 마주한 어미의 문드러진 심경이 작은 등에 묻어난다. 들썩이는 등에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12월 25일까지·명동예술극장)이 돌아왔다. 등장과 함께 연극계를 발칵 뒤집은 화제작이 된 이 작품은 2015년 초연 이후 대한민국연극대상 등 주요 연극상을 휩쓸었고, 무려 8년 동안 공연계의 베스트셀러 왕좌를 지켰다. 2021년 다섯 번째 시즌까지 93%의 평균 객석 점유율을 기록했다. 여섯 번의 시즌을 이어가는 현재도 전 회차 매진을 기록 중이다. 스타 배우가 출연하는 것도 아닌 순수 연극으로는 이례적인 성취다.
작품은 연출가 고선웅에게 두 가지 수사를 안겼다. 공연계 ‘스타 연출가’이자, ‘천재 연출가’라는 별칭이다. 고선웅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연극 ‘푸르른 날에’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나, 당시 박민권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이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본 뒤 너무 좋아 그를 블랙리스트에서 제외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2017년 최순실 국조특위 청문회를 통해 만천 하에 공개된 일화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동양의 햄릿’으로 불리는 중국 4대 비극 ‘조씨고아(趙氏孤兒)’를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충효가 지배하는 세계관 안에서 복수를 추동 엔진 삼아 권선징악의 이야기 구조를 만들었다. 150분(인터미션 포함)의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반역의 누명을 쓰고 멸족 당한 조씨 집안의 마지막 씨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희생하고, 20년 간 키운 조씨고아를 통해 핏빛 복수를 완성하는 한 남자의 삶’.
사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서사만 놓고 보면 스트레스가 심하다.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나가고, 자신의 죽음 마저도 담대하게 마주한다. 현재의 세계관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의리와 충절의 세계가 촘촘히 이어진다. 이 모든 불합리와 비극을 납득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덕목이자, 연극의 예술성이다.
작품의 곳곳엔 연출가의 ‘천재적 감각’이 묻어난다. 고선웅은 원작을 해치지 않으면서 인물들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명민한 각색으로 의리와 충절을 강조하고, ‘복수의 정당성’을 만들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봉건적 세계관에 쑥 들어온 ‘현대적 세계관’이다. 원작에서는 소외됐던 정영의 아내는 개인의 가치는 거세된 세계에서 가장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는 인물로 표현된다. 관객은 정영의 아내와 함께 울분을 토하며, 일상의 부조리를 마주한다.
무대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 이야기가 전개될 때, 천정에서 몇 개의 소도구만 내려올 뿐, 이 무대를 채우는 것은 오로지 배우다.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조명이 극의 분위기를 더하는 요소다. 무대를 꾸미는 요소를 덜어낼수록 배우들의 부담은 커진다. 가벼워진 무대에선 배우의 연기가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배우의 표정, 말투, 움직임 등 모든 것이 선명히 노출되는 만큼 배우들은 ‘연기쇼’의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셈이다. 그 곳에 친절한 이정표를 세우는 것은 연출의 역할이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선 고선웅표 작품의 특징인 과장된 언어와 신체 표현으로 연극의 묘미를 살리면서도, 비극 속 희극을 오가는 인물들의 광기가 묻어난다. 비극을 다루지만, ‘긴장의 끈’을 느슨히 풀어주는 희극적 요소가 관객을 쥐락펴락하고, 그러다가도 비극의 소용돌이로 몰아치는 등 ‘정서적 롤러코스터’의 묘미가 상당하다.
그의 작품을 지배하는 것은 ‘애이불비(哀而不悲, 슬프지만 겉으로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다)’의 정서다. 때때로 극단적 슬픔 앞에서 절제의 미덕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여기엔 고선웅의 ‘연극관’이 묻어있다. 그는 앞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오락을 위해 공연을 보는데, 슬픔을 강요하면 싫어한다. 슬픔을 들키려 하지 않는 방법의 하나가 애이불비의 정서와 같다”고 했다.
연습 현장에서의 고선웅은 슬픈 장면이 나와 배우들이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 하루나 이틀, 일주일 내내 울도록 둔다고 한다. 그런 다음, 눈물이 다 마른 어느 날 “이제 다 울었냐”고 한 마디 던진다. 그 때부터 ‘진짜 연극’이 시작된다. 그는 “연극은 자연스러움 이후의 문제다. 아무리 자연스러운 감정도 오늘, 내일 계속 연기한다면 그것이 과연 자연스러울 수 있겠냐”며 “슬픔이라는 일차원적 감정을 다시 어루만진 뒤, 새로운 예술적 접근 방법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무대와 고선웅이 끌어내는 배우들의 연기가 완벽히 합을 이룰 때 만들어지는 예술적 극치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라는 결과물이다. 여섯 번의 시즌을 거치며 배우들은 누구보다 고선웅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주게 됐다.
이야기는 20년 간 와신상담한 정영의 해피엔딩(?)을 향해 간다. MZ(밀레니얼+Z)세대로 성장한 정발(조씨고아 ·이형훈 분)은 믿을 수 없는 과거사에 당혹스러워하지만, 복수를 결심한 순간 거침없이 밀고 나간다.
마침내 완성한 복수의 끝. 그 자리에 허망한 슬픔이 밀려드는 것은 정영 만이 아니다. “웃으세요, 아버지”라며 복수의 기쁨을 만끽하는 정발. “네 인생은 뭐였냐”고 묻는 복수의 대상 도안고(장두이 분)를 마주하는 정영의 얼굴은 그 어떤 비극보다도 비극적이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것이라는 두려움, 마지막까지 ‘복수의 연대’에 희생당한 개인의 삶이 묻어나서다. 고선웅은 지난 8년 간 몇 번의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이 작품에선 복수는 해야 한다. 그래야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복수를 한다고 반드시 후련해지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연극을 만나는 관객은 내내 울음바다다. 100회를 넘어선 객석에선 100회 내내 기립박수가 나오고, 배우들은 무대의 여운을 안고 나와 충만함으로 인사를 건넨다.
이번 시즌엔 눈에 띄는 관객도 다녀갔다. 공주 역의 우정원과 ‘슈룹’에 출연하며 인연을 맺은 배우 김혜수, 이형훈과 뮤지컬 ‘렛미플라이’에 함께 한 배우 박보검이 관람했다. 고선웅 연출은 100회를 달성하던 날 무대에 올라 “관객 여러분 모두 우환없이 무탈한 인생을 사셨으면 좋겠다”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지만, 조씨고아 팀은 늘 타성을 경계하고 정진하면서 좋은 연극으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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