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려면
[[휴심정] 이선경의 나를 찾아가는 주역]
집을 새로 짓는다면,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이면 좋을까? 필자가 살고 있는 단독주택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본다. 몇 년 사이 우후죽순 빌라들이 신축되더니, 이런저런 이름이 붙어있다. 큐브-웰(cube-well), 그린빌, 다복채, 우주헌(宇宙軒), 지벤하우스, H-포인트, 브릭스 타운, 리브릿지 등 대체로 뭔지 모를 이름들이 붙어있다. 하기야 옆 동네 아파트 이름들은 더욱 오리무중이다. 집의 이름에서 시대의 풍속도가 느껴진다.
어느 대학 도서관에 학생들이 함께 토론할 수 있는 방을 두고, ‘붙어공부방’이라 이름을 붙였다. <주역> 태괘(兌卦䷹)에 “붙어있는 연못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벗들과 강습한다”라 한 뜻을 우리말로 풀어쓴 것이다. 두 개의 못(☱+☱)이 붙어있으면서 서로 물을 주고받듯이 벗들과 함께 절차탁마하는 기쁨을 뜻한다. 태괘에는 ‘기쁘다’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과 달리 전통시대에는 건물을 지었다 하면 이름을 짓는 것이 관례였던 모양이다. 궁궐 전각의 명칭부터 근정전(勤政殿), 사정전(思政殿), 인정전(仁政殿)이라 하여 좋은 정치를 염원하는 뜻을 담았고, 도서관 내지 학술연구기관인 존경각, 규장각, 장서각 등은 오늘로 이어져 그 쓸모를 다하고 있다. 이름을 붙일 때 그 근거는 대체로 고전에서 취한다. 정약용의 ‘여유당(與猶堂)’은 <노자>의 “겨울 냇물 건너듯 사방을 두려워하듯 하라”는 뜻을 가져온 것이고, 남명 조식의 ‘산천재(山天齋)’는 <주역>의 대축(大畜䷙)괘에서 취하였는데, 하늘이 산 가운데에 있듯이, 그 기상을 닮은 국가의 동량을 길러낸다는 뜻을 지녔다. 추사 김정희는 거실 편액을 ‘척암(惕庵)’이라 하였는데, <주역> 건괘(乾卦) 삼효의 “군자가 종일토록 힘쓰고 힘써 저녁까지도 두려워[惕]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를 취하여, 행여 나태해질까 두려워하며 수양하는 뜻을 담았다. 옛사람들은 국가기관으로부터 선비의 초당에 이르기까지, 그 집의 이름짓기에 요즘말로 참 진심이었다.
마음이 일어나는 그 순간의 기미를 포착하라
간이(簡易) 최립(崔岦,1539~1612)은 선조대에 문장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로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다. 간이(簡易)라는 호에서부터 <주역>의 향취가 난다. <주역>에서 ‘간(簡:간단함)’은 땅의 성능을 나타내고, ‘이(易:쉬움)’는 하늘의 성능을 나타낸다. 천지의 도리는 쉽고 간단하다는 말이다. 또 “천지[易簡]의 선함은 성인의 지극한 덕과 짝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최립은 간이(簡易)라는 호를 쓰면서 천지의 선(善)함을 닮아가기를 희구하였나보다.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쓰임새가 있는데, 간이식당, 간이역 등이 바로 이 글자이다. 용도에 비해 이름에 담긴 뜻이 거창하다.
최립의 벗 윤사숙이 조그만 집을 한 채 지어 연기당(硏幾堂)이라 이름을 짓고는 그에게 글을 지어달라 청하였다. ‘기미를 잘 살핀다’는 뜻의 연기(硏幾)는 <주역>에 나오는 말이다. <주역>에 성인(聖人)은 천지만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일의 기미를 잘 살피기에 그 능력이 신묘하여 이 세상의 일들을 잘 결단하고 처리할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성인의 경우이고,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의 연기(硏幾)는 고요하게 있던 내 마음에 움직임이 일어나는 순간, 기미를 잘 포착해내는 공부를 말한다. <주역>에서는 “무사무위(无思无爲)”, 인위적인 사려나 행위가 없다면, 다시 말해 ‘진실함(誠)’을 유지한다면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본래의 마음 상태를 지킬 수 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의 본래 마음은 맑고 밝고 참된 것이기에, 고요하게 있는 본래의 마음에는 악이 없다. 악은 언제 생기는가? 어떤 자극이 들어오면 사람의 마음이 그것을 느껴 반응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선과 악의 갈림이 생긴다. 마음이 일어나려고 하는 그 순간이 바로 ‘기(幾)’이다. 그 순간 나의 마음이 선으로 향하는가 악으로 향하는가, 그 미세하기 짝이 없는 기미를 잘 살피는 것이 연기(硏幾)이다. 최립은 ‘기미’를 살피는 일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샘물을 끌어다가 바르게 흐르도록 하려면, 반드시 그 물이 아직 흐름을 형성하기 전에 조처해야 한다. 일단 동쪽으로 흘러가거나 서쪽으로 흘러간 뒤에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그 기미를 어찌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드러난 현상을 살피기는 쉬워도 아직 눈에 보이게 드러나지 않은 조짐을 알아차리기란 어려운 법이다. 명상도 좋고 정좌(靜坐)도 좋다. 평소에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평정을 유지하려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나의 본래 마음을 놓치지 않도록, 또 잘 보존하도록 공력을 쏟아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인의 연기(硏幾)에도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감추어 조용히 기름이 드러남의 근본이다
훗날 대동법의 주창자로 유명한 김육(金堉, 1580~1658)의 집 이야기다. 김육은 30대 중반 무렵 정치에 실망한 나머지 경기도 가평에 집을 짓고 은둔해 살고자 하였다. 그리고 점을 쳐서 얻은 결과에 따라 집의 이름을 ‘회정당(晦靜堂)’이라 했다. 점사의 내용은 한마디로 하자면 ‘잘 지킴(守)’이고, 풀어서 말하면 “감추어 살면서(회처·晦處) 조용히 기다린다(정후·靜俟)”이다. 김육은 주역점을 친 것이 아니라, 당시 식자들이 공부하던 고전의 하나인 송나라 채침의 <홍범황극내편>에 제시된 전혀 다른 체계의 점을 쳤다. 그런데 당대의 문장가인 그의 친구 계곡 장유가 ‘잘 지킴(守)’과 ‘회정(晦靜)’의 뜻이 <주역> 복괘(復卦䷗)의 의미와 상통한다고 하며, 회정(晦靜)의 뜻을 길게 풀어내었다.
복괘(䷗)는 5개 음 아래 1개의 양이 겨우 자라나기 시작한 모양새이다. 이 여리고 미미한 생명의 기운을 잘 지키는 방법은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감추어서 조용히 기르는 것이다. 온축된 밤의 기운이 드러나 낮이 되고, 겨울에 감추었다 봄에 펼쳐내듯이, 감추어 길러진 고요함은 움직임의 기초가 된다. <주역>에 “자벌레가 움추림은 뻗어 나가기 위해서이며, 용과 뱀이 칩거함은 몸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라 하였다.
장유는 김육이 감추어(晦) 조용하게(靜) 살지만, 그러한 가운데 몸을 닦고 기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바보가 되거나 마른 나무 등걸이 되기 십상이라 한다. 감추어 사는 것은 자신을 기르는 하나의 방법이지 자신을 방기하는 행위가 아니다. 누가 보지 않을 때에도 자신을 잘 길러서 은은하게 그 덕이 비쳐 나오고, 조용히 거처해도 그 기상이 남을 감화하는 것이 회정(晦靜)의 도리라고 장유는 말한다. 고요함이 극에 이르면 움직이게 되고, 숨김이 극에 달하면 드러나게 마련이니, 꾸준히 온축한 회정의 힘은 마치 천둥과 번개가 순식간에 천지를 진동하고 번쩍이며 밝히듯 어떻게 드러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 한다.
김육은 스스로 은둔하였지만,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숱하게 유배를 당했던 이들 역시 그 기간이 ‘감추어 살면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었겠는가. 강진 18년 유배 생활 동안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던 정약용이 스스로 아껴서 묘비명에도 쓴 호가 ‘사암(俟菴)’, 즉 ‘기다림’이라는 것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가득참과 비움으로 수기안인(修己安人)의 도리를 말하다
‘논어’에 말하였듯, 유교의 이념은 한마디로 ‘나를 닦아서 남을 편안하게 한다’는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 할 수 있다. 위정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잘 닦아 사람들의 삶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 된다. 집의 이름에도 이러한 생각이 반영된 사례가 있으니, 공무를 보기 위해 지은 집에 영허당(盈虛堂)이란 이름을 붙인 이야기이다.
1607년 최립이 병으로 인해 휴직하고 평양에 머물 때의 일인 것 같다. 당시 임진왜란으로 인해 관사와 창고가 소실된 관계로 그곳의 책임자인 강공(姜公)이 업무를 볼 수 있는 건물을 짓고 아울러 못을 파서 연꽃을 심어놓고는 최립에게 건물의 이름을 지어달라 청하였다. 물론 연못과 꽃이 중한 것이 아니라 민생을 돌보는 건물에 어울리는 작명을 요청한 것이다. 최립은 여기에 ‘영허당’이란 이름을 붙인다. 영(盈)은 가득참이고 허(虛)는 비움이니, 달의 차고 기욺과 같은 자연현상이나 사람의 마음, 세상만사를 소재로 영허를 이야기할 수 있다. 어째서 이런 이름을 붙이는가 의아해하는 강공에게 최립은 이런 설명을 한다. 곡식을 추수해서 곳간에 들이면 ‘가득참’이고, 백성들이 필요할 때 내어주면 ‘비움’이다. 곳간이 비게 되면 백성들이 다시 채워주고, 곳간이 차면 다시 백성들의 곡식이 비게 될 때 도와주게 되니, 곳간이 차고 비는 것이 백성들의 삶이 차고 비는 것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지 않은가. 또 낮에는 아전들과 일하는 자들, 민원을 해결하러 오는 백성들이 분주히 오가며 건물을 가득 메우다가 저녁이면 다 흩어져가니 역시 이 마당의 ‘영허’이다. 못과 연꽃에서도 영허의 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연꽃은 못의 물을 먹고 살아가니 연꽃이 피어오르는 만큼 물은 줄어들게 된다. 그러면 어디서 샘물을 끌어오든 못의 물이 줄어들지 않도록 조처를 해야 한다. 연못의 물은 백성의 힘과 같다. 관청에서 이들의 힘을 빌려 갖은 공사를 멋지게 이루어내지만 그만큼 민력(民力)은 고갈되는 법이니, 행여 그 물의 양이 줄었을까 염려하여 물을 대주려는 세밀한 마음 씀씀이가 없다면, 이는 영허의 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글의 압권은 그 다음이다. 이 관청의 책임자 강공은 날마다 반복되는 외적인 영허의 현상 속에 그의 기(氣)가 피폐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람의 마음에도 영허가 있다. 어떤 일을 당해서 기뻐하고 놀라고 화를 낼 수가 있는데, 내 마음이 이렇게 얹혀 있다면, 이때는 마음이 가득 차 있을 때여서 사태를 조절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다시 조용히 앉아서 반추할 때에 마음이 텅 비어 나 자신과 밖의 일을 다스릴 힘을 얻게 된다. 최립은 성리학자답게 내 마음이 차고 비는 것은 기(氣)의 현상이고, 그것을 주재하는 것은 내 마음 속의 이치(理)라 한다. 이치는 늘어나고 줄어듦이 없다. 다만 내 마음을 비워서 고요하게 유지할 때 그 이치에서 나오는 힘이 잘 작동할 수 있으니, 그렇게 수양에 힘쓴다면 차고 비는 온갖 현상에 얹혀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영허를 주재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허’라는 주제를 가지고 나를 기르는 법과 민생을 살피는 도리를 하나로 엮어내는 당대의 문장가 최립의 솜씨는 과연 명불허전이다.
희문당과 연기재
아직 내놓고 써 본 일은 없지만, 필자에게도 받은 호가 있다. ‘인문을 좋아하고 기뻐한다’는 뚯의 희문당(喜文堂)이다. 그러고 보니 문(文)이라는 말이 참 어렵다. 그저 글월, 문장이라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갑골문에서의 문(文)자는 가슴에 문신을 새겨 장식한 모양이며, 이후 아름답게 꾸밈, 무늬의 뜻으로 쓰였다. 문명, 문화, 문양, 문식 등에 문(文)이 쓰이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공자의 시호가 문(文)을 널리 펼쳤다는 뜻의 문선왕(文宣王)이니, 그 뜻이 간단하지 않다.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고 해야 할까?
희문(喜文)은 필자의 이름 획수를 가지고 얻은 비괘(賁卦䷕)에서 취하였다. 괘 모양이 위는 산이고 아래는 불인데, 불은 환한 빛으로 문명(文明)을 뜻한다. 비괘의 글에 ‘천문(天文)을 관찰하여 때의 변화를 살피고, 인문(人文)을 관찰하여 천하를 교화한다’라 하였고, 또 ‘마침내 길하여 기쁨이 있다’라 하였으니, 이름대로 살도록 힘써야겠다.
아주 오래전 필자의 할아버님께서 책을 한 권 주셨는데, 그 표지에 “연기(硏幾)” “관완(觀玩)”이라 쓰여 있었다. 관완(觀玩)은 <주역>에 나오는 관상(觀象) 완사(玩辭)의 줄임말로 <주역>의 상(象)을 잘 살피고, 글귀를 잘 음미하라는 의미이다. 이제 돌아보니 그 오랜 시간 동안 “연기”도 “관완”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성(自省)에 부끄러움이 인다. <논어>와 <장자> 등 여러 고전에 등장하는 거백옥이라는 인물은 나이 50에 49세까지의 잘못을 알았고, 60세를 살면서 60년 변화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살아있는 동안 늘 새롭게 거듭났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지나간 일은 탓해야 소용없는 것, 이제라도 늦었다 말고 정진할 일이다. 공부방의 한쪽에 희문당(喜文堂)과 연기재(硏幾齋)를 써 붙이며 하루하루 이 길을 걸어가야겠다.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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