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세계시민] 파독 근로자들의 헌신을 기억하자
이들이 부친 외화는 한국 경제성장의 촉매 구실
[이희용 언론인·본사 다문화동포팀 자문위원] ‘紳士鑛夫(신사광부)들 西獨行(서독행), 123명 어제 飛行機(비행기)로.’
1963년 12월 2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서독의 탄광지대에서 일할 광부 123명이 전날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에어프랑스 전세기 트랩을 오르는 사진 속 모습도 모두 신사복 차림이었다.
이들은 옷차림만 신사가 아니었다. 학력도 높은 편이었고 해외 근무에 걸맞은 교양까지 갖췄다. ‘중졸 이상의 20~35세 남자 중 병역을 마친 탄광 근무 경험자’를 대상으로 모집했는데, 월급이 650마르크(162달러)로 국내 직장인 월급의 약 8배에 이르다 보니 경쟁률이 무려 8대 1에 달했다.
1960년대 초반 한국은 극심한 외화 부족과 높은 실업률에 허덕이고 있었다. 1961년 5·16으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여러 나라 대사관에 인력 수출 방안을 모색하라는 훈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반면 서독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젊은이들이 힘들고 위험한 업종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현지 대사관에 파견된 경제기획원 주재관 이기홍은 루르 탄광지대에서 일본인 등 외국인 광부들이 일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체구 작은 일본인이 한다면 우리라고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 노동청을 찾아갔다.
케퍼비츠 노동정책국장에게 “한국은 가난하지만 한국인은 부지런합니다. 광부들은 모두 군 복무 경험이 있어 단체생활에 익숙합니다”라고 말하자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본국에 보고하니 일사천리로 추진됐다.
1963년 8월 한국은 서독 정부와 광부 파견에 합의하고 광부 모집 공고를 냈다. 9월 28일 최종합격자 367명이 뽑혔다.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합격자 발표 때처럼 신문들은 명단까지 실었다.
합격자들은 강원도 삼척의 장성광업소에서 채탄 실습과 독일어 교습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100명 넘게 탈락했다. 최종 관문을 통과한 247명이 두 대의 비행기에 나눠 타고 김포공항을 떠나 이튿날 서독 뒤셀도르프공항에 도착했다. 현지에서도 3개월의 적응훈련을 받고 탄광에 투입됐다.
1977년까지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는 모두 7,936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지하 1,000m 갱도 속에서 주 6일씩 꼬박 일하는 것은 물론 국경일에도 휴일수당을 받으려고 근무를 자청했다.
그러다 보니 3년의 계약기간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올 때는 대부분 한 번 이상의 골절상 병력을 안고 있었다. 돌에 깔리거나 탄차에 부딪혀 숨지는 사고도 잦아 4명의 자살자를 포함해 65명이 사망했다.
광부에 이어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도 독일 땅을 밟았다. 간호 인력의 서독 진출은 마인츠대병원 소아과 이수길 박사를 비롯한 재독동포 의사들과 종교인 등의 주선으로 1950년대 말부터 간간이 이뤄지다가 광부 송출을 전담하던 한국해외개발공사가 1966년 이수길 박사와 업무 계약을 맺어 본격화했다.
그해 1월 30일 간호사 128명이 서독으로 향했다. 월급은 광부보다 적은 440마르크(110달러)였다. 해외개발공사는 1969년 서독병원협회와 계약을 체결해 1976년까지 1만1,057명의 간호 인력을 파견했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의 사정도 광부 못지않게 열악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임에도 청소와 간병 등 온갖 허드렛일을 감당해야 했다. 언어와 문화 차이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함께 인종차별과 향수병 등도 이들을 괴롭혔다.
귀국하지 않고 서독에 정착한 이들은 중부 유럽 한인사회의 씨앗이 됐다. 광부들은 제한된 공간에 한국인끼리 모여 일했기 때문에 독일어가 서툴렀다. 다른 기술이 없어 직종을 바꾸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끈끈한 단결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뿌리를 내렸다.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사례도 있었는데, 인근 스위스나 오스트리아는 물론 미국으로 이민하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 한인촌의 터를 닦은 사람도 파독 광부들이었다. 파독 광부 중에서 약 60%가 독일에 남았고 이 가운데 3분의 1가량 미국으로 이민했다.
간호사들은 독일어를 어느 정도 익힌 뒤에는 타고난 성실성과 뛰어난 간호 능력을 인정받아 병원 측으로부터 장기체류를 권유받는 사례가 많았다. 주경야독 끝에 의사나 외교관이 된 사람도 있었다.
파독 근로자들은 대부분 결혼 적령기의 미혼 남녀였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들처럼 광부와 간호사가 짝짓기도 하고, 한국인 유학생이나 현지인과 결혼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노후를 고국에서 보내고 싶어 귀국한 사람도 있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에는 이들이 모여 만든 독일마을이 있다. 2001년부터 40여 채의 독일식 주택이 차례로 들어섰고 파독역사전시관도 꾸며놓았다. 독일식 요리와 축제 등 문화 체험도 할 수 있다. 외교부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으로 독일에 거주하는 재외동포는 4만9,683명이다. 이 숫자는 전 세계에서 10위에 해당한다.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에서는 가장 많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독 근로자 채용협정 60주년과 한독 수교 140주년을 맞아 지난 10월 4일 파독 근로자 240여 명을 초청해 점심식사를 함께하며 격려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1960~70년대 이역만리 독일에서 약 2만 명의 광부와 간호사가 보내온 외화를 종잣돈으로 삼아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면서 ”여러분의 땀과 헌신을 국가의 이름으로 예우하고 기억하겠다”고 약속했다.
뒤늦게나마 파독 근로자들의 공로를 기리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만시지탄이다. 서독에서 일하다 사망하거나 질병을 얻은 사람도 많고 지금까지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들의 실상을 부풀리거나 억지로 미화해 박정희 유신체제를 홍보하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그나마 2021년 6월 9일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에 대한 지원 및 기념사업에 관한 법률’이 발효돼 국가의 이름으로 예우하고 기억하는 토대가 마련됐다.
21일은 ‘신사 광부들’이 독일로 떠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제는 광부라는 직업도 찾아보기 어렵고, 정부가 나서서 외국과 집단 고용협정을 맺는 것도 이미 오래전 일이 됐다. 인력 수출을 담당하던 한국해외개발공사가 1991년 저개발국을 돕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으로 탈바꿈한 사례가 시대 변화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두 세대가 지났어도 이들의 헌신과 노고를 잊으면 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과거를 기억하는 힘이야말로 국민을 통합하고 국가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고규대 (enter@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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