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광장] 문헌으로 보는 하늘을 나는 수레, 비거(飛車)

2023. 12. 2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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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를 상상해 재현한 모형 중 하나 [전북 김제시 제공]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조선명탐정-사라진 놉의 딸’에는 행글라이더와 유사한 비행체가 등장한다. 바로 비거(飛車)다. 영화의 주인공은 적들의 은거지인 섬을 찾아가게 되는데 높은 절벽에서 비거를 타고 섬에 닿는다. 이 영화는 몇몇 문헌 속에 남아 있는 내용을 소재로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흔히 ‘비차’라고 읽기도 하지만 용례에 따르면 ‘비거’로 읽는 것이 맞다. 비거는 우리 선조들이 고안해 낸 최초의 비행체로 알려져 왔다. 서점에서 비거 관련 책을 검색하면 10여 종이 넘는 책들이 검색되는데 대부분 청소년을 위한 창작물들이다.

100여 년 전 식민지 한반도에서 비행기가 날아오르자 이 땅의 청년들은 열광했다. 한국인 최초로 한반도를 비행한 안창남도, 두 번째 바통을 이어받은 이기연도, 최초의 여성 비행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권기옥도 비행기의 조종간을 잡게 된 이유가 비행기라는 신문물을 목도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특히 1922년 12월 안창남이 경성의 하늘에서 뿌린 1만 장의 오색전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 발명과 창작에 독특한 천재를 발휘하여 인류사상에 대서특필할 다수의 기록을 끼친 우리의 선조는 비행기의 발명에 있어서도 세계에 가장 앞섰던 일은 문헌이 증명하며,(중략)... 이번 비행을 실행하는 동시에 조선이 과학의 조선이 되고 아울러 다수한 비행가의 배출과 항공술의 신속한 발달을 요망합니다.”

근대사회가 가져온 과학기술이라는 신문명 중에 항공기술의 발달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인류의 생활을 변화시키고 있고, 문헌에 남아 있는 것처럼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비행기를 발명한 사례가 있음을 역설한다. 안창남이 말하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비행기 발명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최근 국립항공박물관에서는 지금까지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오는 비거와 관련한 이야기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에 대한 고문헌의 번역과 해제(解題) 작업을 수행했다.

신경준(1712~1781)은 과거시험 답안 ‘거제책(車制策)’에 수레의 이로움을 논하면서 비거를 언급했다. ‘번거롭게 말할 가치는 없지만, 홍무(洪武) 연간에 왜구가 경상도의 한 고을을 포위했을 때 어떤 은자(隱者)가 수령에게 비거 만드는 법을 가르쳐서 성 위에 올라 날려 보냈더니 한 번에 30리를 날아갔다고 하니 이도 비거의 종류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 땅에서 비거를 제작했다는 최초 기록이다. 홍무는 명나라 태조(1368~1399)의 연호로 우리나라의 여말선초에 해당한다.

이후 이규경(1788~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비거변증설(飛車辨證說)에서 앞선 신경준의 글을 인용하면서 ‘임진년에 왜적 두목이 사납게 날뛰니 영남의 고립된 성이 바야흐로 겹겹이 포위되어 패망이 조석에 달려 있었습니다. 어떤 이가 성주와 친구였는데 평소 색다른 기술을 지녀서 비거를 만들어 성안으로 날아 들어가 그 벗을 태우고 날아서 성 밖으로 30리를 가서 땅에 내려 왜적의 칼날을 피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규경은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지는 않지만 예로부터 비거의 제작법이 존재하였다면서, 중국의 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비거 이야기를 인용하고, 원주 사람이 소장한 책에 나타나는 4인승 비거를 소개했으며, 노성 고을에 윤달규라는 인물이 비거 만드는 방법을 기록해 두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신경준의 기록을 인용했으면서도 홍무 연간이 갑자기 임진년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문헌자료뿐만 아니라 신문과 잡지에도 이 이야기는 여러 차례 언급된다. 1914년 8월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한강 변에 5000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비행대회를 소개하면서 임란 때 정평구라는 사람이 진주성에서 기계를 만들어 공중을 날아 벗을 구해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조선광문회를 주도한 최남선은 1915년에 간행된 ‘청춘’ 4호에 ‘비행기의 창작자는 조선인이라’라는 글을 실으면서 ‘나는 수레’를 만든 사람으로 정평구를 언급했다. 1918년 1월 ‘신한민보’는 ‘청춘’에 실린 기사를 발췌하여 싣기도 했다. 조선광문회에서 활동한 권덕규(1890~1950)는 저서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와 ‘조선유기(朝鮮留記)’에서 비거의 어원, 시대 배경과 인물을 특정하기도 했다. 이 국면에서 진주성과 정평구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를 더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과 진주성 그리고 정평구로 이어지는 비거의 서사가 완성된 것이다.

공군사관학교 김기둥 교수의 연구가 말해주듯이 ‘비거의 서사는 식민지 조선도 근대 과학 문명을 창달할 수 있다는 역량을 갖췄다는 근거로 활용되면서 민족의 각성을 독려하는 언설에 자주 활용된’ 것으로 이해하면 충분할 듯하다. 결과적으로 비거는 실체가 없다. 문헌자료와 역사적 사실로 판단했을 때 실존의 가능성은 오히려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진주에 사시는 어른들이 중심이 된 ‘비거연구회’가 비거 아이디어 공모전을 연다든지, 문학적 창작물이 청소년들의 상상력을 북돋우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거는 이름 자체로서 그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안태현 국립항공박물관장

yj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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