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만난 태양의 서커스 ‘루치아’...‘300억 신화’ 공연의 문 열렸다
12월31일까지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빅탑
공연서 쓴 물만 1만리터 여과해서 재활용
매 공연 140켤레 신발·1000벌 의상 사용
붉은 석양이 내려앉고, 선인장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1만ℓ의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어둠이 당도하기 전 신화 속 주인공 같은 여인들은 의식을 시작한다. 아찔한 줄 하나에 의지해 빗속을 날아다니고, 온 몸으로 거대한 후프를 움직여 무대를 가로지른다. ‘나태’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몸의 예술’. 신비하고 낯선 서커스 세계의 문이 열린다.
2016년 초연 이후 한국에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태양의서커스 ‘루치아(LUZIA)’(12월 31일까지·잠실 빅탑 시어터)가 드디어 상륙했다.
아트 서커스 그룹 ‘태양의서커스(Cirque du Soleil)’는 한국에선 ‘흥행불패’의 주인공이다. ‘태양의서커스’가 내한만 하면 그 해 공연 매출 1위는 따 놓은 당상이다. 지금까지 한국을 찾은 ‘태양의 서커스’ 작품은 총 5편. 2007년 ‘퀴담’을 시작으로 ‘알레그리아’, ‘바레카이’, ‘쿠자’, ‘뉴 알레그리아’에 이르기까지, 누적 관객수 100만 명을 돌파했다. 공연계의 100만 관객은 영화 1000만 명에 해당하는 수치다.
‘태양의서커스’의 38번째 작품인 ‘루치아’의 기세 역시 이미 상당하다. 공연 한 달 만인 지난 11월 29일을 기점으로 서울 공연은 256억 원, 부산(2024년 1월 13일~2월 4일·신세계 센텀시티) 공연은 46억 5000만원을 기록, 총 300억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불황으로 공연계가 어려운 데도 한국 공연 사상 처음으로 최단 기간, 최대 매출을 달성한 괴물 콘텐츠”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다.
최근 빅탑 시어터에서 만난 ‘루치아’의 그레이스 발데즈(Gracie Valdez) 예술감독은 “한국 관객들이 ‘태양의서커스’를 이토록 사랑해주는 것이 놀랍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의 기회를 안겨주고,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의 몸을 마주하며 남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며 감탄했다.
초현실의 세계, ‘상상속 멕시코’를 구현하다
“1번 활주로 이륙 준비 완료. 이제 2026편 비행기가 이륙합니다.”
‘태양의 나라’ 멕시코로 향하는 ‘꿈의 여정’. 화사한 꽃밭으로 낙하산이 자유낙하하면 마침내 ‘신비의 세계’에 당도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이 곳은 영하의 칼바람이 훑고 간 한국에서 만나는 ‘현실 속 초현실’의 세계다.
‘루치아’는 스페인어로 ‘빛(luz)’과 ‘비(lluvia)’를 합쳐 만든 말로, 이름에서 ‘공연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무대는 역대 ‘태양의서커스’ 중 가장 화려하고 정교하다. 상상 가능한 모든 아이디어를 동원해 환상의 세계를 구현했다. 온갖 상징들이 수도 없이 달라지는 무대 디자인으로 표현됐다. 작열하는 태양을 의미하는 붉고 노란 빛깔 아래 멕시코의 신비로운 자연을 곳곳에 옮겼다. 태양과 달, 아즈텍 달력을 상징하는 거대한 원반이 무대를 지키고, 멕시코의 전설과 신화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코스튬과 퍼펫으로 등장한다.
공연의 본격적인 첫 장면을 장식하는 올리비아 에플리(Olivia Aepli)는 “한국에는 없는 분위기의 멕시코를 무대로 옮겼다”며 “다채로운 색상의 무대 연출과 디자인을 통해 행복감과 기쁨의 감정을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무대의 ‘시각 충격’이 상당하다. 화려한 의상은 그것 자체로 소품이자 배경이다. 발데즈 예술감독은 “매 공연 140켤레의 신발, 1000벌의 의상의 향연이 무대에서 펼쳐진다”며 “멕시코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주는 고유한 색상을 표현하면서, 멕시코의 상징주의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후프 다이버들은 벌새처럼 옷을 입고, 직경 75㎝의 후프를 뛰어넘고, ‘핸드 밸런싱’ 장면에서 남성 수영선수들은 750개의 거울이 들어있는 약 3.5㎏ 중량의 의상을 입는다. ‘스윙 360’ 장면에선 160개의 하트 모양 조각을 붙인 의상을 입는다. 발데즈 감독은 “하트 의상은 신성한 심장을 의미하는 코스튬”이라며 “종교적 관점에서 본 멕시코 예술의 가장 일반적인 모티브”라고 귀띔했다.
‘루치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고귀한 동물들의 존재감이다. 동물은 멕시코의 전설과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아르마딜로, 황새치, 이구아나의 머리를 가진 남자, 마림바를 연주하는 악어, 벌새의 머리와 날개를 가진 여성들이 무대에 등장한다. 공연 초반 후프 다이빙을 하는 화려한 참새 무리로 변장한 예술가, 이구아나 숄에 싸인 채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은 멕시코 초현실주의 운동을 의미한다. 사람이 세 명씩 들어가 조정하는 실물 크기의 대형 말과 재규어도 마찬가지다.
발데즈 감독은 “거대한 동물과 인간을 한 장면에 보여주는 것은 자연과 사람의 조화를 담아낸 것”이라며 “많은 연구와 훈련을 통해 대형 동물에게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조정하는 방법을 연마했다”고 말했다.
예술과 기술이 만나니...1만ℓ‘물의 향연’
‘루치아’는 예술과 기술이 영민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이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빅탑 투어 사상 최초로 아크로바틱 퍼포먼스에 ‘물(Water)’을 활용한 공연이라는 점이다.
발데즈 감독은 “변화무쌍한 멕시코 지역의 날씨가 여러 형태의 비로 표현된다”며 “무대에서 내리는 비는 단순한 비가 아니라, 날씨 변화를 마주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카탄 반도의 갑작스러운 소나기, 메마른 사막을 적시는 이슬비 등은 하늘과 사람들의 기분을 담아낸 장치다.
상설 공연이 아닌 해외 투어에서 물을 활용한 공연을 매일 이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루치아’는 지난 1984년 ‘태양의 서커스’ 탄생 이후 축적한 ‘기술의 진화’로 일군 성과다. 공연에 사용하는 물은 총 1만ℓ. 투어를 진행하는 지역의 수도 시스템에서 딱 ‘한 번’ 제공받고, 그 이후부터는 내내 재활용한다. 물을 맞으며 공연하는 아티스트의 건강을 위해 여과, 소독은 필수다. 물 온도 역시 39℃를 유지한다.
‘물의 순환’ 과정도 공연 만큼이나 체계적이다. 1만ℓ의 물은 무대 위 14m에 매달린 다리에 비축하고 174개의 노즐 세트를 이용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발데즈 감독은 “쏟아진 물은 무대 아래 작은 웅덩이로 들어가고, 이 물이 다시 외부의 3000ℓ 탱크로 이동해 여과 과정을 거친 뒤 메인 비축기지로 이동한다”고 설명했다.
무대 위에서 쏟아지는 물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발데즈 감독은 “레인 커튼은 공연의 특별한 요소다. 물로 관객들을 매료시킬 만한 다양한 형태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무대 위에서 보관하는 물 탱크가 360도 회전하며 각양각색의 ‘레인 커튼’으로 무대에 나타난다. 하트 모양을 만들기도 하고, 물이 홍해처럼 갈라지기도 한다. 무려 70여가지의 다채로운 변화가 가능하다.
전직 ‘국대 출신’들이 벌이는 아슬아슬한 아크로바틱
달리고 구르고 날아다니는 무대 위 출연자들은 평균 10대 초반부터 서커스나 체조, 수영을 해온 전문가들이다. 올림픽보다 고난도 기술을 보여줘야 하고, 이 안에 감정과 연기를 담은 예술이 더해져야 하는 만큼 ‘태양의 서커스’ 단원들은 어떤 분야나 국가대표 수준의 실력을 자부한다. 실제로 ‘태양의 서커스’ 단원 중엔 각 나라의 ‘국대 출신’이 상당수다.
아슬아슬한 ‘몸의 예술’을 만들어가는 이들에겐 ‘안전 문제’는 언제나 최대의 화두다. 빅탑의 온도를 유지하는 것도 태양의 서커스엔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다. 발데즈 감독은 “빅탑은 임시 시설이기에 상설 공연장과 달리 현실적 어려움이 따를 때가 있다”며 “안전 사고 대비를 위해 실내를 22℃로 유지하는 등 아티스트에게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준다”고 했다. 1℃의 차이로 몸을 사용하는 출연자들이 부상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들 역시 매일 1~2시간씩 근육 이완 운동을 하고, 공연을 위한 트레이닝을 통해 부상 위험을 줄이고 있다.
12년 가량 체조 선수로 활동했던 에플리는 올해 처음 ‘태양의서커스’에 합류, ‘루치아’의 문을 여는 ‘러닝 우먼(RUNNING WOMAN)’을 맡았다. 그는 “아침 해가 떠오르면 강인한 여성이 금속의 말과 달려나가며 상상 속 멕시코를 깨운다”고 말했다. 이 장면은 ‘루치아’의 명장면 중 하나로, 존재감이 상당하다. 엄청난 달리기 실력을 가진 멕시코의 원시 부족인 ‘타라후마라족’의 영적 에너지를 담았고, 1년에 한 번 캐나다에서 멕시코로 이동하는 나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6m 길이의 실크로 만든 날개를 펼치는 장면은 압권이다. 발데즈 감독은 “러닝 우먼은 관객들을 공연 속으로 이끌어주고, 관객은 그가 달리기를 마치면 멕시코 도착을 축하해준다”고 말했다.
실리오스 피틀락(Cyrios Pytlak)은 7개의 핀을 빠른 속도로 저글링하는 ‘밀라그로’ 장면에 출연한다. ‘밀라그로’는 스페인어로 ‘기적’을 의미, 열정적인 사랑과 희망을 담는다. 그는 “2009년부터 ‘태양의 서커스’의 문을 두드렸다가 2017년에야 꿈을 이뤘다”며 “이 장면을 통해 관객들과 연결돼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순간은 잊을 수 없을 만큼 멋지다”고 말했다.
‘루치아’의 130분은 현실과의 ‘아름다운 괴리’로 가득하다. 고정관념을 깬 이국적인 음악, 숨막히는 곡예, 상상 속 멕시코를 구현한 무대는 신비로운 모험의 연속이다. 관객에게도, ‘루치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발데즈 감독은 “ ‘루치아’는 인체의 한계를 만끽하는 일상으로부터의 휴식”이라고 했고, 피틀락은 “ ‘루치아’는 관객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고, 꿈 속에서나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보게 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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