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나를, 우리를 찾는 길...불안한 현대인에 위로”[헤경이 만난 사람-이매리 미술가]
개인·민족·인류로 확장된 기억파편
24K 금으로 레터링한 작품 눈길
뉴욕·베니스등 해외 개인전 잇따라
“작품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내면의 평화를 찾고 싶어요. 좀 어렵다고 느껴지나요? 우리네 인생은 인간 본성과 사물의 본질을 찾아가는 짧고도 긴 여행이라고 생각해요.”
뉴욕, 베이징, 광저우, 테살로니키, 크레타, 베니스. 광주. 이 도시들은 ‘빨간 하이힐’로 유명한 이매리 작가의 작품전이 펼쳐진 곳이다. 현대미술의 성지로 알려진 뉴욕 한복판,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과 올리브향이 넘쳐나는 그리스 크레타, 13억 인구의 수도 베이징까지. 이매리의 작품세계에 세계인이 눈과 귀가 집중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 창세기, 국가의 흥망성쇠. 24K 금을 물감삼아 화폭에 녹여냈다. 인간의 존재와 집단의 기억을 예술로 그려냈고 이를 후손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붓을 들었다. 뉴욕의 국제적인 큐레이터 탈리아 브라초포울로스도 이 과정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남도문화유산 답사 1번지 강진에서 태어난 이 작가가 글로벌 미술계에 이름을 알린 계기다.
지난 16일 광주 남구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낡고 오래된 흑백사진이 눈길을 끈다. 어린시절 그를 사랑해준 부모님과 가족들의 품에 안겨있는 작은 아이가 이 작가다. 커다란 책장에는 미술사와 예술서적들로 빈틈이 없었고 낡은 오디오는 클래식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작업실 구석에 놓여진 알전구들은 주황빛 조명을 연신 쏟아냈다. 이 공간이 마치 예술작품인 듯 아닌 듯 몽환적으로 느껴진다.
이 작가는 인터뷰 내내 상대의 눈을 보며 손발로 절제된 감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대화에 빠져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매리 작가하면 개인적으로 ‘하이힐’이 떠오른다. 이 작가에게 그 소재는 여성의 자아와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을 담아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하이힐은 여성. 즉 인류의 근원이라는 상징적 이미를 담고 있죠. 저 역시 하이힐을 사랑했어요. 한때는 하이힐은 없으면 외출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니까. 사실 제키가 작은 것도 이유였지만요. 하이힐은 개인의 존재, 민족, 인류학적 개념을 확장한 키워드예요.
하이힐은 작가로서 정체성을 쌓아가는 재료였다. 실제 하이힐로 탑을 만들고 성소, 기둥, 재단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합성소재로 작업하다 최근에는 재생종이 등 친환경 소재를 접목했다.
-고향인 강진 월남사지를 모티브로 한 기억과 여순사건, 6·25전쟁 등 인류와 문명의 역사를 담아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가 탯자리다. 외가가 있는 월남사지는 고려시대 황실 절터였는데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놀이터다. 1000년의 역사와 문화유적의 흔적이 가득한 곳인데 몇 해 전 대대적인 발굴작업으로 모두 사라졌다. 600년 넘은 동백나 무도 그렇게 잘려 나갔다.
너무나 안타깝고 아쉬움이 컸다. 베니스나 크레타에서 개인전을 열 때 감정이입이 됐다. 유적 터가 그렇게 동기부여가 됐고 차별화된 작품과 세계관을 펼칠 수 있는 동력이 됐다.
고향은 나의 뿌리다. 외할버지는 (일본)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는데 6·25전쟁 때 가족 모두가 돌아가셨다. 당시 마을에서만 50여명의 사람이 학살당했다고 들었다. 우리 역사의 아프고도 시린 단면이다.
-인터뷰 오기 전 이 작가의 작품들을 찾아보고 인터뷰 기사들을 봤는데, 솔직히 어려웠다.
▶꽃을 그린다. 인물을 표현한다. 이 같은 형식적인 그림은 관심 대상이 아니다. 이미 사진과 동영상 등이 발달돼 있지 않는가. 다른 영역을 고민하고 연구했다.
‘21세기 작가로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라는 자문이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하게 된 이유다. 결국 박사를 마치고 내 뿌리를 단단히 하는 학구적 성찰에 다가서게 됐다.
-영어, 라틴어, 히브리어로 창세기 구절과 24K 금을 활용해 화폭에 담았다. 의미를 설명해 달라.
▶제네시스, 길가메시 서사시, 구약성서 등 인류를 탄생시킨 근원에 대해 파고 들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어려운 주제들이다. 외가나 친가가 독실한 불교신자였는데 대학 때 성당에 다녔다. 종교관이 확립되면서 인류학적으로 접근하게 됐다.
고려불화를 보면 금으로 석가모니를 그린 작품들이 많다. 이게 굉장히 아름답고 영감을 준다. 금, 은, 동, 석탄 등 광물이라는 미술 재료가 주는 독특한 감동이다. 독학을 통해 금과 전통 방식의 접착제 녹각아교로 만든 작품을 탐구하고 있다. 즐거운 작업이다.
-최근 그리스 유적지에서 개인전을 열고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스 크레타 국립미술관 개인전을 소개해 달라.
▶그리스 출신 큐레이터 탈리아 브라초포울로스 교수가 광주비엔날레를 왔는데 이게 인연이 됐다. 이분이 아시아미술을 전공했는데 광주시립미술관에 작가 두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제가 제출한 포트폴리오가 최종 선정됐다. 탈리아 교수 남편이 아테네, 크레타, 테살로니키 등 그리스 문화유산을 꼼꼼히 설명해줬다. 그리스 작업은 결이 잘 맞았고 결국 현지에서 호평을 얻게 됐다.
-지역과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하다는 말도 있다. 해외 활동이 궁금하다.
▶지난 2004년 뉴욕에서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같은 해 베이징에서도 연달아 전시를 열었는데 이게 변곡점이 됐다. 항공료, 호텔 숙박비, 재료비 등을 전액 지원받는 등 작가로서 대우를 받았다. 이때부터 해외 전시에 주력하게 됐다. 당시만 해도 전업작가는 직업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열악했다. 한번은 뉴욕에서 택시를 탔는데 스페인 출신 기사가 “아티스트를 모시게 돼 너무 영광”이라고 환대했다.
광주비엔날레도 빼놓을 수 없다. 긍정적 효과가 크다. 해외 큐레이터가 광주에 와서 지역 작가들이 해외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됐다. 아시아문화전당이 생기면서 기회는 더 커지고 있다.
-최근 광주 고려인마을을 통해 본 이주민과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7000개의 별과 약속의 땅이라는 신작을 선보였는데.
▶광주 고려인마을은 또 하나의 광주다. 처음 가보고는 깜짝 놀랐다. 7000명의 고려인이 광주에 정착해 살고 있는데 이미 하나의 커뮤니티를 구성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고려인 난민들도 속속 이주하고 있다.
고려인마을을 주제로 한 작업 의뢰가 들어왔다. 기획자가 리밍웨이 등 대만과 인도네시아 등지의 작가들에게 의뢰했는데 스펙트럼이 넓었다. 이를 위해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에 10일가량 발품을 팔았다. 고향을 떠난 고려인들이 강제이주한 중앙아시아에서 목숨을 건 생존을 이어갔다. 이걸 예술로 표현했다.
-경기부진과 물가상승, 금리인상 등으로 서민의 삶은 팍팍하다. 그림이 그런 삶에 무슨 위안이 될 수 있나?
▶예술은 나를, 우리를 찾는 길이다. 물질만능주의, 돈과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면 비참하지 않겠는가. 예술은 정신적인 에너지를 채워주는 도구다. 현대인들이 호소하고 있는 초조와 불안을 치료하고 위로와 위안을 주고 있다.
광주=황성철·서인주 기자
sij@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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