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해골에 호기심을 품고 선주에게 갔는가 [본헌터㊿]
여전히 잘 알지 못하는 한국전쟁, 그 아주 작은 챕터의 완성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었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렸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주었다.
내 이름은…음…그러니까….
‘본헌터’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 사람 경태다. 2023년 6월26일부터였다. 매주 두번 연재글을 올렸다. 드디어 마지막 50회 연재분을 쓴다. 어깨를 무겁게 눌러온 글쓰기의 짐 하나를 내려놓는다. 나는 기자다.
‘본’은 정형외과 이름에나 들어가는 단어로만 알아왔다. 불과 8개월 전만 해도 ‘본’과 ‘헌터’가 이렇게 만나 조합을 이룰 줄은, 내가 그 조합에 개입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덜컥 ‘본헌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로 결심을 한 직후, 밤이면 밤마다 정체불명의 뼛조각을 땅에서 파내고 또 파내는 꿈에 시달릴 줄은 몰랐다. 이 연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초반에는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빈틈과 공백이 채워지고 어떤 실마리들이 풀리면서 악몽에서 풀려났다. 이제 마지막 이야기다.
본헌터는 2023년 3월29일 조간신문에서 본 그의 얼굴에서 시작되었다. 얼굴 없는 얼굴이었다. 눈과 코와 입과 귀가 없는 그 얼굴을 가리켜, 사람들은 해골이라 불렀다. 주인공은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성재산 산110의 교통호 참호 안에서 쪼그리고 고개를 처박은 자세로 세상에 출현했다.
한국전쟁기에 재판 없이 처형된 민간인 희생자라고 했다. 그 머리뼈와 갈비뼈와 위팔뼈와 허벅지뼈와 정강이뼈를 보며, 그러니까 73년 전 파묻힌 유해치고는 멀쩡하게 온몸의 뼈들이 원상태로 연결된 그를 보며 충격에 감전되지는 않았다. 벌떡 일어나 브레이크 댄스라도 출 것 같은 그 생생한 이미지의 뼛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충동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다만 궁금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조사하고 싶어졌다. 저 사람 누구지?
그래서 만난 사람이 선주였다. 해골, 아니 유해들이 62구나 나온 현장에서였다. 선주가 그 유해를 꺼낸 실무 책임자라고 했다. 성재산 기슭 바로 앞에 설치된 컨테이너 사무실 안에서 선주는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주며 손님을 맞이했다. 내가 참호 안에서 쪼그리고 앉아있던 그의 인상착의를 설명하자 선주는 문서를 뒤적거리더니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A4-5구나?”
유해의 식별번호라고 했다. 뜻밖에도 A4-5는 함께 나온 다른 유해들과 사무실 안에 쌓여있었다. 유해마다 모든 부위의 뼈들이 분리된 채 플라스틱 상자 하나씩에 담긴 채였다. 그 실물을 보고 싶었다. A4-5라 적혀있는 노란색 포스트잇이 붙은 플라스틱 상자의 뚜껑을 열고 싶었다. 내가 말했다. “한 번만 볼 수 없을까요?” 선주가 말했다. “안됩니다.”
그날 두 시간가량 인터뷰를 했다. 선주가 품은 세계는 거대하고 광활했다. A4-5의 나이, 키, 직업, 노동 정도, 희생 이유 추정에서 시작해 수십곳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발굴현장으로 범위를 넓힌 이야기는 경계를 넘어 다부동 전투, 포항 전투 등 국군 전사자 유해의 영역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구석기 시대의 사람과 동물을 지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네안데르탈인 화석 등 인류의 기원과 진화로 뻗어 나갔다.
그날 인터뷰 중엔 2007년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한 달 동안 유해를 뒤졌으나, 한 구도 못 찾고 어린아이로 추정되는 뼈 한 점을 건졌다거나, 2006년 서울 오류동 공군 2325정보부대 터에서 실미도 사형수 4명의 유해를 찾으려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거나 하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아산 유해발굴 현장에서 함께 나온 M1·칼빈·38식·99식 소총 탄피에 따라 가해자를 구분하는 방법을 듣고는 ‘아, 고증을 철저히 하는구나’ 싶었다. 가장 뜻밖의 사실은 그가 문과 출신이라는 거였다. 뼈를 보는 사람이니 당연히 의사나 법의학자이겠거니 했던 터였다.
이후 선주를 일곱 차례 더 만났다. 본인의 호를 딴 청주의 청계 인류진화연구소에서였다. 어린 시절의 가족과 결혼, 사학과로 입학해 고고학을 거쳐 미국에 가서 체질인류학을 공부한 이야기, 수많은 유해발굴 현장의 에피소드가 펼쳐졌다. 만날 때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꽉 채웠다. 76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하루 8시간의 ‘대화 노동’에 지치지 않는 선주였다. 해부학과 인류학의 전문 용어가 나올 때도 많았다.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되 결코 쉽지는 않았던 이유다.
본헌터 연재의 동력은 ‘호기심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선주가 지닌 호기심에 관해 내가 호기심과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면 만남이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으리라. 선주가 진보연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좋았다. 그를 이끄는 힘은 역사의식이나 정의감이 아니었다.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탐구정신이었다.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든 적 군인과 교전을 치른 국군 전사자든 유해발굴 현장에서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탐정의 태도로 임했다. 매번 발굴을 통해서 무얼 배울 수 있을까 기대하는 젊은 학자처럼 눈을 반짝였다.
굳이 구분하자면, 선주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 희생자 유해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발굴한 사람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그 가치를 부정하려고 하는 세력과는 거리를 두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국군 전사자 유해를 가장 많이 발굴한 사람답게 대한민국이 헌법에서 천명한 민주공화국과 법치국가의 정신을 훼손하려는 세력과는 거리를 두었다. 어쩌면 생각은 보수적이나 진보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선주가 강조하는 개념은 ‘모던 미스’(modern myth)였다. 우리가 사실처럼 알고 있는 어떤 지식이 꾸며진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몇명이 죽었다더라”하면 절대 곧이곧대로 믿기보다는 문헌과 증언을 비롯한 갖가지 기록과 직접 땅을 파보고 유해를 뒤져본 뒤의 결과로 사실 여부를 검증하려고 했다. 모던 미스를 넘어서려는 신조는 그가 작성한 모든 유해발굴 보고서 맨 끝에 이런 표현으로 적혀 있다.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꾸며진 이야기라는 말을 새기며….”
연재는 홀수회와 짝수회가 각각 독립적으로 진행되다가 끝에서 만나는 구조였다. 짝수회에서 선주가 3인칭으로 나와 자신의 삶과 발굴현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홀수회의 주인공은 1인칭으로 등장한 A4-5와 충남 아산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또는 유족들이었다.
아산 현지에서의 유족 인터뷰를 위해 아산 사람 남화가 아산유족회의 여러 증언자들을 연결시켜 주었다. 1회씩 서로 교차하며 전개된 아산과 선주의 이야기는 일종의 ‘다크 투어’였다. 죽고 죽이는 이야기의 여행, 왜 죽이고 죽였는지 이유와 특징을 탐문하는 여행. 이를 통해 나는 한국전쟁의 아주 작은 챕터 하나를 써보려고 했다.
한국인 중에 한국전쟁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기 전, 한국전쟁에 대해 내 지식과 시야가 얄팍함을 절감했다. 아산에서만 부역혐의로 이렇게 많이 죽은 줄은, 이렇게 전국 곳곳의 지명 중에 학살의 역사에서 예외가 된 곳이 없음을 몰랐다.
올해는 특히 적법절차 없이 처형된 부역혐의자를 다시 부역자로 몰아세우려는 반역사적인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던 한 해였다. 유족들이 바라는 해원(解冤)의 길은 아직 멀고도 멀다. 국민보도연맹 등 국가에 의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살해당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한국전쟁기의 모든 민간인 학살을 온전히 이념대립의 프리즘으로만 설명할 수 없음도 새삼스레 확인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한스러움이 맺힌 눈물을 펑펑 흘리던 어떤 유족을 잊을 수 없다. 가족 10여명이 성재산에서 살해당해 묻히고 본인은 연좌제로 인생이 온통 망가져 버렸는데, 지금은 투병 중이다. 또 다른 유족은 대학에 다니는 손주가 불이익을 볼까 봐 두렵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설마 지금도 연좌제?
또 다른 유족은 인터뷰를 마친 뒤 본인의 이야기를 담은 글이 배포되는 날 아침 “글을 삭제해달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산전체주의 세력” 운운하는 발언을 하던 즈음이었다. “현 정권이 너무 무섭다”고 했다. 이승만 정권 때의 악행이 재연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했다. 그럴 경우 자신들이 처형 일순위라고 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 걱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이들에게 선주는 어쩌면 ‘테크니션’ 같은 존재였다. 펄펄 끓어오르는 한과 감정을 식히고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못다 한 과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였다. 유해발굴이 끝나면 선주는 그 결과를 최대한 다양한 데이터로 남기려고 했다. 보고서는 기본이고 학술논문도 자주 썼다.
선주가 2010년에 작성한 논문의 제목은 이러했다. ‘경산 코발트광산 출토유해를 중심으로 본 6·25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자 허벅지 뼈의 생체역학적 분석.’ 1950년 7~8월경 대구형무소 재소자 등 1800명 이상이 살해된 현장인 경산코발트 광산이 동굴로 돼 있어 그 어느 곳보다 깨끗한 허벅지뼈가 많이 나왔다고 했다. 허벅지뼈는 우리 몸에서 가장 단단해 오래 남기도 하거니와 사람들의 영양상태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시기에 맞춰 한국인 몸의 평균 데이터를 만들려는 시도가 국내에서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그 연구 수준은 북한보다 못하다고 했다. 북한은 1950년대 후반에 ‘조선고고학전사’를 펴내 조선사람의 몸에 대한 디테일한 기록과 통계를 남겨놓았다. 여기엔 귀길이, 귀너비, 눈썹, 콧마루 높이, 콧구멍 형태, 어깨너비, 궁둥이 둘레 등 갖가지 통계치가 나온다.
선주는 10월2일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여기에 대한 아쉬움을 한보따리 풀어놓았는데, 그 이야기를 다 전하지는 못한다. 선주는 내년부터 본인이 경험한 유해발굴의 역사를 직접 방대한 기록으로 남기려고 구상 중이다. 거기엔 모조리 담길 것이다. 이제 한평생 익히고 얻은 것을 사회에 돌려주고 싶다고 했다.
선주는 요즘 합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 한때 매트에 몸을 던져 스트레스를 풀었으나, 나이를 고려하면 지금은 무리다. 대신 대금과 시조창을 하고 붓글씨를 쓴다. 선주의 청주 연구소엔 본인이 먹을 갈아 붓으로 쓴, 다음과 같은 글귀액자가 걸려있다.
“봄이오면차디찬침묵의무덤에서갇혔던생명들이죽음을떨치며일어서고죽었던나무에서파아란싹이움트고노오란나비는몸을휘감은과거의허물을벗어버리고빛이어둠을이기고생명이죽음을이기고희망과기쁨이슬픔과절망을밀어내고봄은죽음후에일어난부활이다.”
봄. 우리는 오늘도 봄을 기다린다. 겨울의 이야기를 마친다.
<끝>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 ‘오디오 본헌터’ 배우들께 감사드립니다
매회마다 본헌터를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준 극단 신세계 김보경 이강호 배우에게 감사드립니다. 녹음과 편집과정을 함께 해준 극단 신세계 김수정 전웅 연출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들 덕분에 본헌터가 텍스트를 넘어 뭉클하고 생생한 오디오로 독자들과 만났습니다. 이들은 “앞으로도 더 많은 분들에게 본헌터가 가닿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소감을 밝혀왔습니다.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었다./boxStyl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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