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뿐만 아니었다…마산 할매·할배 시위, 이승만 끌어내렸다

고경태 2023. 12. 2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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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 진실 규명 결정
1960년 4월24~25일 “정권 퇴진” 내걸고 시위
시위 동력 주춤할때 시민들 대규모 참여 이끌어
부산시민 마산 원정시위도 추가 사망자 등 확인
1960년 4월24일 할아버지 시위대가 마산 시내를 행진하는 모습이다. 진실화해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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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 할매들이 데모를 했다 카더라’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러면 나라가 뒤집어지겠다’고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옛날 시골 허연 저고리에다가 검정 고무신을 신고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했습니다. 행진 길이로 봐서는 한 50m 정도 길 복판으로 갔으니까 한 100명이나 150명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노인들이 나오니까 그 뒤를 꼬마들이 따라다니고….”

“할머니들이 울고 불고 땅을 치고 빨래방망이 같은 걸 몇 사람이 들고 내려치고 했습니다. 학생들 데모보다 더 크더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끈 마산(현재 창원으로 통합) 3·15의거와 4·19혁명의 시위 현장에서 중고등학생들이 대거 앞장서 참여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위가 동력을 잃고 주춤해 있을 때 할아버지·할머니들 시위가 시민들의 호응과 참여를 이끌어내며 수만명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당시 여론주도층도 입밖에 꺼내지 않던 ‘이승만 퇴진’ 구호를 선명하게 내걸어 시위의 흐름을 바꾸었다는 사실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당사자들 대부분 세상을 떠났지만, 뒤늦게나마 3·15의거에서 이들의 역할과 공로가 공식 인정받게 됐다.

1960년 4월25일 할머니 시위대가 마산 시내를 행진하는 모습이다. 진실화해위 제공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19일 제69차 전체위원회를 열고 ‘1960년 3·15 의거 당시의 할아버지·할머니 시위와 부산시위대의 마산 원정시위’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원정시위 도중 2명이 추가로 사망하고 일부가 부상당하거나 구금당한 사실도 확인해 국가에 피해 및 명예회복 조처를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3·15의거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중요성이 인정되고, 참여자 및 목격자가 대부분 사망했거나 고령으로 진실규명의 시급성이 요구된다며 지난해 10월4일 직권조사 개시를 결정한 바 있다. 할아버지·할머니 시위에 관해서는 사망한 당사자들 대신 3·15의거 사건 진실규명 대상자·진실규명자, 참고인 가운데 당시 시위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진술을 받았다.(맨 앞 인용문)

제2차 마산의거(1960년 4월11~13일) 당시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항의하는 할머니. (사)3.15의거기념사업회 제공
1960년 4월 이 사진을 실은 매체에는 다음과 같은 사진설명이 적혀 있었다. “1960년 4월11일 해산한 군중은 12일 날이 밝자 다시 거리로 몰려나왔다.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누나도 동생도 마산시내는 분노의 도가니….” (사)3.15의거기념사업회 제공

3·15 의거란 1960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월15일 부정선거에 반발하여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3·15시위 당시 실종된 김주열군의 주검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상태로 4월11일 마산 중앙부두 앞에 떠오르자 2차 시위가 일어났고, 4월24일부터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참여한 시위가 젊은 시위대와 합류하면서 3차 시위로 이어졌다. 이후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단위로 확산했고 결국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마산에서 할아버지·할머니 시위가 일어난 것은 1960년 4월13일 이후 경남 각지에서 지원 경찰력으로 시위 관련자가 대거 체포되고 시위 주도자에 대한 감시, 휴교령·통행금지로 인해 잠잠하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4월24일 오전 1시 애국노인회라는 단체가 마산 시외버스주차장 부근에서 “책임지고 물러가라 가라치울(갈아치울) 때는 왔다” 등이 쓰인 플래카드를 걸고 시위를 했는데, 당시 주도자들은 갓과 두루마기를 입고 지팡이를 짚은 남성 노인이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는 “이 애국노인회는 1946년 1월 결성된 우익 반탁단체인 ‘우국노인회’(憂國老人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애국노인회와 우국노인회 두 명칭을 혼용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1960년 4월26일 오후 마산으로 진입하는 부산시위대 모습이다. 진실화해위 제공
1960년 4월26~27일 마산 무학국민학교 교정에 수용된 부산시위대 모습이다. 진실화해위 제공

이날 할아버지 시위대는 오전 11시 마산 시외버스주차장 부근에 집결해 11시40분께 시청 방면으로 향했고, 이후 경찰에 제지당하며 플래카드 등을 빼앗기기도 했다. 경찰의 제지에도 마산애국노인회 시위대는 행진을 계속했고 마산 시민 약 3만~5만명이 여기에 합류했다. 경찰은 상대가 노인이라 강경한 진압은 하지 못하고 무장경찰을 철수시킨 뒤 사복형사들로 하여금 현금을 주면서 시위중단을 사정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시위에 이어 이튿날인 4월25일에는 ‘할머니 시위’가 마산 시내에서 일어났다. 50살 이상 여성 노인들이 참여한 이 시위대는 구마산 강남극장 앞에 집결하여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대통령 물러가라”,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자”, “총 맞아 죽은 학생 원한이나 풀어주소”등의 펼침막을 내걸었다. 참여 규모는 최소 200명에서 최대 400명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마산 시민 최대 3만명이 시위대에 호응하여 함께 했고, 경찰이 출동하여 음료수와 물을 나눠주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계속 농성했다.

제2차 마산의거(1960년 4월11~13일) 당시 살인경찰 처벌을 외치며 마산경찰서 앞에서 진입을 시도하는 군중들. (사)3.15의거기념사업회 제공
제2차 마산의거(1960년 4월11~13일) 당시 \

할아버지·할머니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 퇴진을 전면에 내걸었다. 4월11일 김주열 주검이 발견된 뒤 이승만 정권 퇴진에 대한 여론은 존재했으나 산발적으로 나온 구호일뿐 시위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을 때였다. 부산과 진주, 함안, 진해 등에서 잇따라 시위가 일어났지만 김주열 사건에 대한 책임이 주된 내용이었고, 대학생·언론인·교수 등 여론주도층과 민주당 등 야당도 “선거 무효”, “살인경찰관 엄중 처단”에 머물러 있었다. 이렇듯 지식인층과 민주당이 이승만 대통령 퇴진에 대해 선명한 입장을 내걸지 못하는 사이 마산지역 노인들이 분명하게 이승만 대통령 퇴진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마산지역 노인 시위는 부산지역 노인 시위에도 영향을 줬다. 4월26일 오전 9시20분께 초량4동 경로당 노인들이 주축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 ‘시민을 살해한 경찰은 물러가라” 등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했다. 이는 부산 시민 20만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제2차 마산의거(1960년 4월11~13일) 당시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도립마산병원 앞에서 침묵으로 시위하고 있는 어린이들. (사)3.15의거기념사업회 제공
제2차 마산의거(1960년 4월11~13일) 당시 시민들에 의해 불타고 있는 자유당 마산시 당사. (사)3.15의거기념사업회 제공

진실화해위는 또한 “1960년 4월26일 부산지역에서 이승만 퇴진 시위를 하던 20만~30만명의 시위대 중 일부가 차량을 나눠타고 마산으로 이동한 뒤 마산시민과 합류해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부산시위대 마산 원정시위는 고등학생, 청년 등을 중심으로 여러 계층이 참여했고, 시위의 주된 타격 대상은 파출소 등 정권의 폭력적 억압기관과 부정선거의 직접적 당사자였던 자유당 관련 시설 등이었다. 당시 공권력과 일부 언론, 사료들은 부산시위대 마산 원정시위에 대해 대부분 주먹을 쓰는 깡패, 건달, 양아치, 난동, 폭도 등으로 왜곡했다.

이 과정에서 최소 84명 이상이 계엄당국에 의해 검거됐으며 일부는 부산 제15헌병대에 구금되어 4월28일까지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원정시위대 중 사망자는 4명인데, 정상근·김선길 2명은 이번에 추가로 확인됐다. 이들은 당시 쓰리쿼터(군용 중소형 트럭), 트럭, 택시, 버스 등에 빼곡하게 올라탄 채 시위 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진압을 받다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추락해 숨진 것으로 보인다.

진실화해위는 “할아버지·할머니 시위, 부산시위대 마산 원정시위는 배경·주체·규모와 3·15의거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해 지금까지 실체적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거나 일부 왜곡되어 알려진 사건”이라며 “특히 한국 사회의 여론주도층으로 간주되던 정치인·학생·지식인·언론인 등이 아닌 지역 노인들이 주도가 돼 정권 퇴진을 외쳤다는 것은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으로 3·15의거에서 중요하게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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