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사 없는 국내 톱 장수정, “포기하지 않는 도전이 중요”[박준용의 인앤아웃]

박준용 테니스 칼럼니스트, SPOTV 해설위원(loveis5517@naver.com) 2023. 12. 2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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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메인 후원사 없이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장수정. US오픈 조직위원회·본인 제공



2010년 김해챌린저를 취재했을 때다. 당시 중3이었던 장수정(대구시청)이 자신보다 세계랭킹이 한참 높은 선수들을 꺾고 본선행을 확정지은 후 코칭스태프와 얼싸 안으며 기뻐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간이 흘러 앳된 소녀였던 장수정은 어느덧 한국 여자 테니스를 대표하는 고참 선수가 됐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오히려 기량이 만개한 장수정은 올 시즌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내년 시즌을 위해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씽크론 아카데미에서 쌀쌀한 날씨 속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장수정은 “어느 때보다 대회를 많이 뛰어서 시즌이 빨리 끝난 느낌이다. 시즌 초반에는 성적이 괜찮아서 기대를 했는데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래도 마무리는 잘한 것 같다”라면서 “올 시즌 가장 큰 목표인 톱100 진입을 이루지 못했지만 나의 플레이가 계속 성장하는 것 같아 나쁘지 않은 시즌이었다”라며 한 시즌을 돌아봤다.

지난해 7월 장수정은 스웨덴 베스타드에서 열린 노디아오픈에서 생애 처음으로 WTA투어 단식 타이틀을 획득했다. 한국 여자 선수가 WTA투어 단식 정상에 오른 것은 1982년 포트마이어스오픈에서 우승한 이덕희 여사 이후 무려 40년 만이었다. 이 우승으로 장수정은 자신의 최고 세계랭킹 114위를 기록했다.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장수정이었기에 올 시즌 꿈의 톱100 진입이 기대됐다. 톱100에 들면 테니스 대회 중 상금 규모가 가장 큰 4대 그랜드슬램 본선에 직행할 수 있기 때문에 테니스 선수라면 누구나 톱100 진입을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 장수정은 복식에서 톱100에 오른 적은 있지만 단식에서는 아직 없다.

장수정의 든든한 버팀목인 친오빠 장광익(왼쪽). 박준용 칼럼니스트



시즌 초반은 나쁘지 않았다. 호주오픈 예선 1회전에서 2012년 프랑스오픈 준우승자이자 세계 5위까지 올랐던 사라 에라니(이탈리아)를 꺾으며 기분 좋게 시동을 걸었고 WTA투어 250시리즈 태국오픈 본선 1회전에서 영국 여자 테니스의 에이스 케이티 볼터를 물리쳤다.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총상금 6만달러 ITF월드투어에서 시즌 첫 우승을 차지했고 일본 고후에서 열린 총상금 2만5000달러 대회에서도 우승하며 출전한 두 대회 연속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지난해 노디아오픈에서 우승한 랭킹 포인트를 방어하지 못하면서 세계랭킹이 떨어졌다.

장수정은 “태국오픈에서 볼터를 이긴 것이 올 시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오랜만에 투어 본선에 출전했고 볼터가 까다로운 선수라 쉽지 않았는데 집중력일 잃지 않아 이길 수 있었다”라면서 “시즌 중반에 톱100에 진입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 테니스에서 랭킹 포인트를 방어하지 못해 세계랭킹이 떨어지는 것은 비일비재하지만 실력이 부족해서 세계랭킹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주니어 때부터 한국 여자 테니스를 이끌 재목으로 주목 받은 장수정은 삼성증권의 후원을 받으며 세계무대에 도전했다. 특히, 2013년 WTA투어 코리아오픈에서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쟁쟁한 선수들을 물리치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대회 8강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하며 국내 테니스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이후 장수정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세계무대를 향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10년이 훌쩍 넘는 투어 생활을 돌이켜 본 장수정은 “투어는 정말 치열한 전쟁터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고 매주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서 “투어를 다니는 한국 선수가 거의 없다. 외국 선수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리는 경우가 많고 라커룸에서 유명한 선수를 보면 위축되기도 한다. 한국 선수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덜 외로울 텐데 한국 선수가 없는 것이 아쉽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장수정이 꼽은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인 부분이다. 테니스 선수에게 투어를 다니는 것은 정말 고독하고 외로운 싸움이다. 특히, 장수정처럼 메인 후원사가 없으면 코치 비용을 비롯해 숙박비, 교통비, 항공료 등 연 1억원이 훌쩍 넘는 투어 비용 모두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장수정은 “자비로 투어를 다니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획득한 상금 모두 투어 비용으로 쓰고 있다. 비용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저렴한 숙소를 구하고 먹는 것부터 자는 것까지 아낄 수 있는 것은 무조건 아끼려고 한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일본 고후에서 열린 총상금 2만5천달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장수정(오른쪽)과 준우승자 한나래. 본인 제공



장수정의 기량이면 국내에서 얼마든지 높은 연봉을 받으며 편안하게 선수생활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도전을 통해서만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장수정은 “세계무대에 도전해 얻은 쾌감은 정말 짜릿하다. 이 경험은 정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부딪히면서 깨지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 도전을 멈출 수가 없다”면서 “1년 중 8개월 이상을 외국에서 보내고 비용은 비용대로 쓰는데 성적이 좋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투어를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고 테니스에만 집중하니 성적이 좋아졌다. 이렇게 투어 다니다가 은퇴하고 싶은 생각이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현재 장수정은 3살 위인 친오빠 장광익씨와 투어를 동행하고 있다. 테니스 선수 출신인 장광익씨는 6년여 전부터 장수정의 코치, 매니저, 피지오 등 1인 3역을 맡고 있다. 장수정에게 오빠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는 “본인의 생활을 모두 포기하고 나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오빠에게 항상 감사하고 미안하다. 정말 힘든 순간이 많았는데 오빠가 없었으면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고 오빠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운동 선수에게 가장 큰 적은 부상이다. 하지만 장수정은 큰 부상 없이 10년이 넘는 투어생활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몸 관리 비결이 있느냐는 질문에 “특별한 것은 없다. 오빠가 옆에서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다. 그리고 제가 원래 단 것을 좋아하는데 몸의 염증을 유발시키고 살이 찌면 부상 위험이 있어 단 것은 거의 안 먹고 있다”라고 비결 아닌 비결을 밝혔다.

장수정의 장점은 우리나라 여자 테니스 선수 치고는 큰 키인 171㎝의 균형 잡힌 체격과 빠른 발을 이용한 코트 커버다. 여기에 기술 수준이 높아 상대에 따라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며 지능적인 플레이도 뛰어나다. 보완해야 할 점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다”면서도 파워, 지속적인 압박 능력 그리고 정신력을 꼽았다.

“파워가 좋은 외국 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꾸준히 웨이트 훈련을 하고 있다. 상대를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능력과 중요한 순간에 대범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정신력이 아직 부족하다. 특히, 그랜드슬램과 같이 큰 대회에서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여느 대회보다 더 긴장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경기를 망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너무 후회가 되더라. 또한, 시즌이 길기 때문에 버티기 위해서는 강한 정신력이 필수다.”

세계 테니스 무대에서 한국은 여전히 변방국과 다름없다. 물론 박성희, 조윤정, 이형택, 정현 등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등장했지만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반면,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은 꾸준히 세계적인 선수들을 배출하며 아시아에서 벗어나 테니스 강국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일본과 중국 테니스를 직접 경험한 장수정은 우리나라 테니스가 성장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로 열악한 협회의 지원을 꼬집었다. “일본과 중국은 협회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한다. 일본은 일찍 유망주를 발굴해 미국 유명 테니스 아카데미에서 선진 테니스를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중국은 많은 유명 외국 코치들을 영입해 선수 육성에 힘쓰고 있다, 우리나라도 협회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우리나라 선수 대부분은 훈련할 때 지도자의 눈치를 보거나 수동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외국 선수들은 코치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스스로 훈련한다. 그래서 그런지 경기할 때 외국 선수들은 코트에서 정말 치열하게 경기를 하고 집중력도 정말 좋다. 이건 아무래도 문화차이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 전문 투어 코치가 거의 없는 것도 무척 아쉽다”라고 덧붙였다.

세계무대에 도전하는 후배들이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 장수정. 본인 제공



장수정은 무엇보다 세계무대에 도전하는 후배들이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사실 우리나라 대부분 선수들은 국내 대회 또는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만 뛸 뿐 장수정처럼 투어에만 집중하는 선수가 거의 없다. 도전하는 선수가 없기 때문에 세계적인 선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장수정은 “우리나라 테니스 선수들 대부분은 실업팀 소속이다. 소속팀에서 받는 연봉으로 세계무대에 도전했으면 한다. 두렵고 불안하고 옆에서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세계무대에 도전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선수가 자비로 투어를 다니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첫 단추를 꿰기가 어렵지 도전을 계속하면 용기를 얻고 자신감도 생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내년 시즌 톱100 진입과 그랜드슬램 본선 진출이 목표라고 밝힌 장수정은 “과거에는 세계랭킹을 끌어 올리려는 생각밖에 없어서 나 스스로에게 많은 압박을 줬다. 그래서 많이 힘들어 했는데 최근에는 테니스에 대한 온오프(Onoff)를 잘하려고 노력하니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고 성적도 좋아졌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린다”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세계 테니스 투어무대는 흔히 정글로 비유된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이 바로 투어 무대다. 치열한 정글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지만 꽃길을 마다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 장수정의 도전은 내년에도 계속 이어진다.

<박준용 테니스 칼럼니스트, SPOTV 해설위원(loveis55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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