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오진 날’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이정은이 말하는, 그래도 우리가 서로를 보듬어야 하는 이유[스경X인터뷰]
2023년 세밑 비슷한 시기, 우리는 배우 이정은이 펼치는 서로 다른 세상을 보고 있다. 그의 모습은 극 전체로 보면 분위기를 주도할 정도의 입지는 아니지만 필요한 부분에서 반드시 필요한 감정과 감동을 전하는 힘이 있다. 이정은은 부지런한 노력을 통해 또 한 번 대중의 믿음에 답했다.
한 작품은 지난달부터 티빙에서 공개돼 19일 방송을 마친 드라마 ‘운수 오진 날’이고, 한 작품은 넷플릭스에서 지난달 3일 공개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다. ‘운수 오진 날’에서 이정은은 연쇄살인마 금혁수(유연석)에게 아들을 잃고, 응징을 위해 그를 추적하는 엄마 황순규를 연기했고,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는 극 중 배경인 명신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수간호사 송효신을 연기했다.
“두 역할이 모두 보는 분들의 많은 공감이 필요했어요. 그런 식으로 배역을 하는 걸 감독님들이 많이 좋아하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가진 외모나 외형들이 그런 부분에서 공감을 부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촬영은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가 먼저였다. 막바지에 황순규 역을 제안받은 이정은은 4개월 정도 식단 조절을 했다. ‘운수 오진 날’ 역할이 아들을 잃고 피폐해진 인물이었기에 송효신의 편안한 인상은 걸림돌이었다. 무려 10㎏ 가까이 감량하고 카메라 앞에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 놀라움은 두 작품을 연이어 보는 시청자에게도 전해진다.
“실제로 피해를 입은 가족들의 인터뷰도 보면서 참고를 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복수하는 상황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해소가 감정적으로 잘 안 되는 거죠. 도리어 피해자가 테러를 당하는 경우가 많데요. 결말에 대해 ‘이게 완벽한 응징이 맞는가’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만,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두 작품은 공교롭게도 가족이 사회적인 선입견을 받는 설정이었다. ‘운수 오진 날’ 황순규는 아들인 남윤호(이강지)가 사실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송효진은 동생인 송애신(고서희)가 조현병을 앓고 있다. 두 사람은 다른 결이지만, 세간의 날 선 시선을 안고 살아간다.
“최근에 박혁권씨가 통으로 대관을 해줘서 영화 ‘어른 김장하’를 봤어요. 공평을 주는 인물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소수자의 가족 역이 되는 이유는 따로 없었지만, 선택을 거듭하다 보면 인물의 줄기가 비슷하게 잡히는 시기가 있어요. 사람들은 서로 경쟁사회에 살잖아요. 하지만 보듬어줘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죠. 누가 높고 낮고가 없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에 대한 생각을 쭉 해오다 보니 그런 작품도 하는 것 같습니다.”
‘운수 오진 날’에서는 감량뿐 아니라 월담, 총기 등 액션을 수행했고, 오택 역 이성민과 함께 바다에도 빠진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는 수많은 정신과 질환 관련 대사를 외워야 했다. 늘 이정은의 연기는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부분이 은은하게, 대놓고 티가 나면서 보는 이의 만족을 채워간다.
“당연히 배우이니까 수동적일 수 있지만, 제 이미지 바꾸는 걸 다들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양념이 되는 역할이지만, 이야기가 어떻게 다가오느냐도 제겐 큰 숙제입니다. 저를 다르게 봐주시는 분들이 생기는 게 재밌어요. 봉준호 감독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배우가 연기를 잘해서 잘 됐으면 좋겠지만, 결국 작가와 감독이 봐줘야 할 수 있다’고요. 계속 저를 보시는 분들이 저를 새로운 인물로 만들어주셨으면 해요.”
이번 작품의 노력뿐 아니라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의 경상도 사투리,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의 제주도 사투리 등 배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정은은 늘 작품에 온 힘을 쏟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주도 촬영이 있기 전에는 혼자서 몇 개월 먼저 제주를 찾아 아예 눌러살면서 시장을 훑었다. 그 과정에서 집요하다 싶을 만큼 캐릭터의 설정을 만들어갔다.
“저 스스로 디테일을 찾지 못하면 믿을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대략 이렇게 하면 괜찮겠어’라는 말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죠. 의심이 많아요.(웃음) 의심을 하면 안 되고, 다른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의심이 들면 발걸음이 떼지는 것 같아요. 학창시절 연출을 공부해서 좀 더 감독님의 입장에서 연기를 보는 부분도 있는 것 같고요.”
그러한 성격은 평소에도 드러난다. 최근 주차 중 접촉사고 뺑소니를 당했던 이정은은 추적을 통해 가해자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운수 좋은 날’ 황순규의 사적복수 설정은 크게 공감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된 시스템으로 우리 사회가 유지되길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 중 하나다.
“공평한 메시지를 주는 역할이었으면 좋겠어요. 악행을 하면 용서하지 않는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주려면 확신이 필요하니까요. 대사를 하며 믿음을 주는 배우였으면 해요. 대사 한 마디의 영향력을 믿거든요. 어떤 설정이든 심장을 통과해 뇌를 움직이는 연기를 해야겠다 다짐하죠. 그게 기왕이면 아름다운 연기였으면 하고요.”
하경헌 기자 azima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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