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전통 사물들을 미니멀한 모양새로 해석했을까
옛적 회화나 공예품이나 디자인 작품이 창작의 샘으로 솟아올랐다. 화문석이나 대자리, 책상, 서안 등의 고가구에서 조형적 아이디어를 얻고 1920~30년대 독일 바우하우스 디자인 명품에서 작품 구성의 영감을 길어 올린다.
지난 수년간 한국 현대미술계 한켠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뜻밖이다. 실용적인 생활용품의 예술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해온 공예 디자인 장르나 조선시대의 회화나 악보 등의 고전 등을 창작의 텃밭으로 삼는 작가들이 잇따라 나타났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감수성을 접맥시키는 공예·고전 장르의 재활용이 현대미술가들의 새 작업 흐름으로 대두하는 중이다. 뭉뚱그려 ‘레트로’ 트렌드에 포함되기도 하는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201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 참여 작가로 주목을 받았던 강서경씨가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상설관(엠(M)2전시장) 1, 2층에 차린 그의 특설 개인전 ‘버들 북 꾀꼬리’는 공예와 고전이란 화두에 집착하는 최근 일련의 작가적 흐름과 양상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전시다. ‘버들 북 꾀꼬리’란 전시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전통 가곡 ‘이수대엽’(二數大葉)의 노랫가락 가운데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여/ 구십 삼춘 짜내느니 나의 시름…’이라는 대목에서 착안해 만든 것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실제로 전시장에 조선시대의 공예와 음악, 회화, 건축 유산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얻은 조형적 요소들을 정연하게 가다듬어 서구의 모더니즘적인 디자인 감성과 결합시킨 듯한 평면작품과 조형물들을 전시장에 내놓았다.
우아하고 깔끔한 색감과 모양새를 지닌 출품작들은 공예적인 조형성과 작업방식이 뚜렷하다. 조선 시대 악보인 ‘정간보’에서 음의 길이와 높이를 표현하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사각 칸(間)에서 착안해 격자들이 모여 직립한 설치조형물을 세운 초기작 ‘井’은 다른 격자 모양의 조형물과 결합해 덩치를 키울 수 있는 얼개다. 궁중무용 ‘춘앵무’에서 춤꾼의 1인 무대가 되는 화문석 돗자리의 격자를 겹치고 채색해 모던한 분위기를 낸 ‘자리’ 연작, 장지나 비단 화폭 위에 짙고 엷은 먹과 색색의 안료를 겹겹이 칠하면서 색층을 쌓아 올려 물질적인 덩어리 혹은 탑을 이루게 한 특유의 회화 ‘모라’(Mora) 등도 합쳐지거나 개별적인 작품들로 분리될 수 있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서구의 디자인 가구나 르 코르뷔지에 이후의 현대 건축에서 흔히 논하는 끼웠다 뺐다 하면서 증식하는 조형 요소들의 결합 구조인 모듈 개념과 얼추 비슷해 보인다.
특이한 것은 1층과 2층의 공간적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초기작들과 근작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1층과 달리 2층은 섬세한 표면 질감이 공간의 어둠과 인상적으로 대비되는 산과 귀 모양의 조형물들이 정연한 구성 아래 암전된 공간에 배열돼 작가 내면의 심연을 좀 더 드러내려는 의도로도 비친다.
출품작들은 서 있는 조형물과 매달린 설치작업들이 많다. 편안하고 깔끔한 배색에 부드러운 윤곽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어서 편안하고 푸근한 인상을 주지만, 전통적 조형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의 성과로서 설득력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정교한 계획 아래 디자인 재단을 하지 않고 다분히 즉흥적인 안목으로 아퀴를 짓는 한국 전통공예의 특징이 새롭게 재해석되기보다는 소재적 특징을 미니멀한 모더니즘적 시선으로 재단했다는 인상을 낳는다. 좀 더 생각을 연장하면 그것은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재조명이라는 현재 서구 미술계의 레트로 트렌드와도 연결된다.
전체적으로는 동선이 산만한 전시장보다 주요 작품들이 축약되면서 배우들의 몸짓과 함께 움직이는 입구 외벽의 전시명과 제목이 같은 작품 모음 동영상을 추천한다. 짧은 몇분 짜리 영상이지만, 화문석이나 자리 등이 응축됐다가 확 펼쳐지고 작품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생생한 영상물이 작가의 지금 세계를 이해하는데 좀 더 적절해 보인다. 31일까지.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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