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훠어이 물렀거라
천지의 움직임 어찌나 아득하던지 / 선악으로 나뉘어 어지러운 모습이로다 /
사악함 물리침은 예부터 있던 의례 / 십이신은 항시 혁혁한 신령이었지 /
오방귀 춤추고 사자가 뛰놀며 / 사람이 불을 뿜고 칼을 삼키네 /
신라의 처용은 칠보장식을 했는데 / 머리 위 꽃가지에선 향기가 넘치네 /
나라에선 크게 나례청을 두고 / 해마다 궁중에서 나례를 거행하네.
고려말 문인 이색이 섣달그믐날 궁중에서 행한 나례를 관람하고 지은 시 '구나행'의 일부분이다. 나례는 궁중과 관아, 민간에서 행한 섣달그믐밤의 벽사진경 의식으로 사악한 귀신과 역질을 걷어내고 경사스러운 신년을 기원하는 종교의식이 예술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례가 기록된 최초 문헌은 고려 정종 6년(1040년)의 나례를 기록한 '고려사'인데 그 이전부터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잡귀와 역병을 쫓아내는 엄숙한 구나의식으로부터 가무와 오락이 주를 이루는 활기찬 잡희로 점차 변화, 발전했다. 그래서 나례를 나의, 나희라고도 한다.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은 조선시대에 이르면 역신을 물리치는 벽사의 성격보다 태평신년을 기원하는 진경의 성격이 더 짙어진다. 궁중나례는 의외로 그 형식에서 상당히 유연한 오락적 행사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조선의 사관들은 투철한 책임감으로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목숨을 걸고 일일이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데 유일하게 섣달그믐밤의 나례만큼은 참관은 했으되 기록하지 않았다고 한다. 1년 365일 중 유일하게 사관조차 붓을 내려놓고 이 난장을 관람하며 즐긴 것이다. '세종실록' '악학궤범' '용재총화' '동국세시기' 등 여러 문헌에 나온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섣달그믐밤 궁궐에서 어떤 행사가 있었는지 상상 속에서 재구성해본다.
섣달그믐밤 창덕궁에 어둠이 내리고 궐문마다 횃불이, 전각마다 촛불이 켜진다. 후원 높은 언덕에 오른 대취타대가 북과 나팔로 나례의 시작을 하늘에 고한다. 궁궐 네 귀퉁이에서 대포를 쏘면 각 방위의 지신이 깨어난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의 사방신이 인정전 마당에 들어와 나례를 수락하는 사방신무를 춘다. 나라의 요청을 받은 민간인 어릿광대들이 연희패를 이끌고 잡귀와 역신을 물리치러 요란스럽게 궁궐로 들어온다. 싸워서 물리치기 전에 먼저 잘 달래고 대접해서 보내는 것이 상책이다. 연희패의 사자춤과 궁중악단의 연주, 궁중무용단의 학무, 연화대무를 베푼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 대접했는데도 역신들은 물러나지 않는다.
이젠 힘으로 쫓아내는 수밖에 없다. 축역의 행렬에는 항상 방상시가 앞장서는 법. 눈이 넷 달린 방상시들이 역신을 위협한다. 뒤이어 신라 처용무로 역신을 물린다. 그러나 역신들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는다. 쥐, 소, 범…. 열두 띠동물이 각기 탈을 쓰고 십이지신무를 추며 역신들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인다. 그러나 역신들은 물러가지 않는다. 그러자 한 무리의 어린아이가 복숭아나무 가지를 들고 들어와 동요를 부르며 놀이하듯 역신들을 몰아세운다. 수세에 몰린 역신들이 드디어 항복하고 물러난다. 대취타대가 언덕에 올라 구나의 승리를 알리면 화산대로부터 폭죽음과 함께 화려한 불꽃이 솟아오른다. 인정전 마당에서 구나를 축하하고 태평신년을 기원하는 향아무락을 춘다. 모두 함께 "훠어이 물렀거라"를 외치며 불꽃놀이 속에서 나례를 마친다.
'조선왕조실록'에선 '임금이 구중궁궐에 깊숙이 살아서 정치의 득실이나 풍속의 미악을 듣지 못하는 것이 있다. 따라서 비록 배우의 말이지만 어떤 것은 규풍의 뜻이 있어 채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나례를 설치하는 까닭이다'라고 했다. 그 뜻을 오늘에 되살려 국립국악원이 연말에 나례를 공연한다. 민생을 괴롭히는 모든 잡귀가 묵은해와 함께 사라지기를 기원한다. 훠어이 물렀거라!
박동우 무대미술가·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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