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오트 쿠튀르’의 길… “옷은 디자이너 진심이자 정성” [마이 라이프]
오트 쿠튀르 첫발 내딛다
옷 대량 생산 시대 자신만의 작품 구상
1986년 ‘설영희 부띠끄’ 매장 열며 시작
파리 등 국제 패션쇼 참가해 이름 알려
오트 쿠튀르의 삶 속으로
비슷비슷한 기성복 싫어 프린트 개발
아들 그림이나 사진도 소재로 쓰기도
눈에 안 띄는 안감 특히 신경 ‘품위 있게’
옷에 대해선 철저하다
“핏 맘에 안 들면 자존심 상해 다시 제작
옷은 기운 북돋워 주는 것… 대충은 없어
하나밖에 없는 오트 쿠튀르 옷 진짜 명품”
봉사의 삶 실천과 남은 꿈
미술·패션 공부 아들이 발전 시키길 바라
BTS 같은 유명 아티스트와 협업 기대
나만 누린다는 미안함에 자선쇼 등 ‘나눔’
“저는 사실 ‘트리플 A’예요. 이야기하는 거 사실 적성에 잘 안 맞아. 그런데 옷 이야기는 할 때는 안 그래요. 제가 미치는 대상이니까요.”
설영희 디자이너가 스스로 소심한 성격이라고 하는 말에 기자는 “네?”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설영희부띠끄를 방문해 두 시간 가까이 진행한 인터뷰에서 너무도 열정적으로 많은 말을 풀어냈기 때문이다. 짙게 그린 아이라인과 파마로 멋을 내 ‘센 언니’로 보이는 겉모습도 ‘소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는 40년 가까이 ‘오트 쿠튀르’(소수를 위한 맞춤 제작)의 길을 걷고 있는 디자이너다. 옷이 대량 생산돼 짧은 기간 소비되고 사라지는 요즘에도 묵묵히 자신만의 ‘디자인 작품’을 구상하고 선보인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다 의상학과를 가게 된 것이 시작이다. 졸업 후 국제복장학원으로 이어졌다. 논노, 제일모직 등 기업에서 일한 적도 있지만 1986년 압구정동에 ‘설영희부띠끄’를 열면서 오트 쿠튀르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대학 입학해서 패션 디자인을 3개월만 하겠다고 했는데 해 보니 딴 세상인 거야. 그때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꿈을 키웠죠. 회사에 들어가 일했는데 선배들에게 많이 혼났어요. 이런 디자인은 안 팔린다고. 색감이나 이런 게 독특했거든요. 또 저녁 때쯤 아이디어가 떠올라 작업하겠다고 하면 막 퇴근하라고 했어요. 회사생활과 잘 안 맞았던 거죠.”
그렇게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든 설 디자이너는 한국패션협회 패션쇼와 프랑스 파리 프레타 포르테, 일본 도쿄박람회, 중국 선전국제패션페어 등에 참가하며 이름을 알렸다. 브랜드 론칭 초기엔 파르코·쁘렝땅·제일백화점에도 입점했다. 2002년부터 코로나19 기간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매년 패션쇼를 개최하고 있다.
#사진·아들 그림이 모두 디자인 소재
어떻게 옷을 만들까. 설 디자이너는 끝없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듯했다. 구상한 디자인에 어울리는 원단을 구하기 위해 국내외 시장에서 발품을 판다. 원단 프린트 디자인 자체를 창작하거나 직접 염색을 의뢰해 만들어내기도 한다. 2000년대 초엔 패션쇼에서 남성 모델에 하이힐을 신겼다. 지금은 그리 이색적이지 않지만 당시엔 큰 사이즈 하이힐이 없어 슬리퍼에 굽을 대 만들었다.
최근 ‘가로등 사이로 스치는 서울의 겨울’이라는 주제로 한 패션쇼에는 오묘한 회색 바탕에 불 켜진 가로등이 서 있는 디자인의 재킷과 치마, 드레스 등이 등장한다. 이는 설 디자이너가 부띠끄 고객으로 오던 아마추어 사진작가의 작품을 프린트해 원단을 직접 만들어 옷이 된 것이다.
설 디자이너의 디자인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하나는 ‘안감’이다. 부띠끄에서 보여 준 한 회색 남성 수트의 안감은 ‘핫핑크’였다. 여성 검은색 롱재킷의 안감은 커다란 빨간 꽃무늬로, 겉감보다 더 화려해 보였다.
설 디자이너에게 옷은 “정성”이라고 했다.
“‘옷을 짓는다’고 하잖아요. 밥도 ‘짓는다’고 하죠. 엄마들이 밥을 짓는 것처럼 옷 짓는 것도 정성이에요. 맞춤복은 그 사람만을 위해 만드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집중하며 작업하죠. 디자이너의 진심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옷은 입은 사람에게도 기운을 줄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옷에 대해 철저하다. 지인들에게 ‘저러니 돈을 못 번다’는 ‘핀잔’을 들을 정도다.
한 고객이 외투를 맞추고 몇 주 뒤 찾으러 왔는데 몸무게 변화 때문이었는지, 속에 입은 옷의 두께가 달라져서였는지 미묘하게 핏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순간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고 했다. 그는 당장 외투를 새로 만들었다.
3∼4년 전 선보였던 트렌치코트를 다시 만들어 달라는 또 다른 고객 요청에는 원단 수입부터 착수했다. 국내에 없는 원단을 사용했던 터라 다시 주문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하나밖에 없는 게 명품인데, 전 세계에 깔린 명품 브랜드 옷을 명품이라고 할 수 있나요. 오트 쿠튀르처럼 한 디자인에 한두 벌만 만드는 게 진짜 명품 아닐까요. 오트 쿠튀르는 동네 양장점이 아니에요. 창작이고, 창작은 패션의 뿌리입니다.”
#나만 누린다는 미안함에 봉사 앞장
설 디자이너의 인생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봉사다. 그는 2008년부터 한국해비타트 ‘사랑의집짓기’ 자선 바자 패션쇼에 매년 참가하고 있다. 적십자 바자도 10년 넘게 하고 있다. 자립 준비 청년 지원 단체 ‘들꽃청소년’ 후원에도 앞장서 왔다. 지난해와 올해 폴크스바겐 공식딜러 마이스터모터스와 협업해 개최한 패션쇼 수익 일부는 들꽃청소년에 전달됐다.
인문학 교실은 3년쯤 됐다.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게 이유다. 전문가들의 재능기부로 한 달에 한 번씩 선착순으로 신청을 받아 부띠끄에서 강의를 진행한다. 셀프 네일 관리부터 단청 그리기 체험, 죽음학, 미술관 관람 등 주제는 다양하다.
패션 디자인과 고객, 봉사와 함께한 40여년을 돌아보면 해외 진출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 설 디자이너에게는 가장 큰 아쉬움이다. 남은 꿈이라면 미술·패션을 공부하는 아들이 설 디자이너의 열정과 자부심을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BTS와 같은 유명 아티스트와 협업하는 것이라고 했다.
“몇십 년씩 고객으로 인연을 맺고, 시간이 지나 자녀와 함께 오고, 또 그 자녀로 이어지며 설영희의 옷을 입어요.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좋은 작품을 선보이는 게 예의죠. 지금도 뭘 새로운 걸 만들어서 보여 줄까 그 생각만 하고 있네요.”
아직도 패션쇼를 한다고 생각하면 흥분된다는 설 디자이너. 내년 봄 어떤 옷을 무대에 올릴까 벌써 구상하며 오늘도 스케치북을 채워 나가고 있다.
이진경 기자 l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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