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만났던 히로시마 한인 피폭자 "한일 정부에 기대·섭섭 없어"

변해정 기자 2023. 12. 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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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에 전차서 원폭 피해 박남주 할머니 인터뷰
5월 尹대통령 만나 사과 인사에 고국 초청 받아
[서울=뉴시스]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인 박남주 할머니가 지난 3일 히로시마평화기념관 미팅룸에서 기자단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외교부 공동취재단)

[서울=뉴시스] 외교부 공동취재단·변해정 기자 = "지금 와서 한국과 일본 정부에 원하는 것은 없어요. 기대도 안 하고 섭섭한 게 없어요."

박남주(91) 할머니는 지난 3일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일본 외교부 공동취재단과 만난 자리에서 지난 5월 윤석열 대통령과의 만남 이후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사항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변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5월21일 한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공동 참배했다. 한국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원폭피해위) 위원장을 지냈던 박 할머니는 당시 윤 대통령의 참배를 지켜봤고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감사와 감격한 마음 뿐이다. 오래 살아서 다행"이라고 언급했다.

이보다 앞서 같은 달 19일 원폭 피해 동포 간담회에서는 윤 대통령을 직접 만나 대화도 나눴다. 윤 대통령은 당시 "늦게 찾아뵙게 돼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고 박 할머니에게 "고국에 한 번 오십시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박 할머니는 "이런 보람을 느끼려고 지금까지 힘들게 버텨온 것 같다"고 대답했다.

박 할머니는 다만 재일 동포의 공무원 취업 불허는 못내 아쉬워했다. 그는 "재일 동포는 여기(일본)에 살면서 여기에 세금을 내는데도 기본적으로 외국인이니깐 공직자가 될 수 없다"면서 "문과에 가면 거의 다 프리랜서로 활동한다. 양심 있는 일본의 학교 선생님만이 자연계로 진로를 정할 것을 지도한다. (그나마) 자연계로 가서 의·약대를 가 취직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일본 법상 외국인이 공무원이 되려면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게 필수다. 그러나 재일 동포의 경우 여느 영주권자와는 달리 일본인들과 똑같이 납세의 의무를 다하고 있으며,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권리도 오랜 소송을 거쳐 획득한 바 있다.

재일동포 2세인 박 할머니는 78년 전인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직접 피해자다.

당시 12살이던 그는 동생 2명과 함께 전차를 타고 친척 집에 가던 중 피폭 당했다. 원폭 진원지로부터 약 1.9㎞에 불과했다.

아흔 살이 넘은 박 할머니는 78년이 흘렀지만 원폭이 떨어지던 순간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했다. 그는 "폭발음이 들리더니 불기둥이 솟아 올랐다. '전차에 있는 어린이들부터 얼른 피난해라'라는 말을 들었지만 하차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 검은 연기가 걷히고 나니 모두 다쳐 피투성이었다. 마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불바다였고 집들은 다 무너졌다"면서 "어떻게 형언하기 어려운 공포"라고 회고했다.

박 할머니는 특히 피폭으로 화상 입은 사람들에게 물 한 모금 건네지 못한 것이 내내 후회스럽다고 했다. 그는 "화상 입은 사람들이 물을 달라고 외치는 데도 행여 죽을까봐 물을 주지 않았다. 물을 마시는 것과 상관 없이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던 것을 알았더라면…"이라며 "저는 물을 보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고 전했다.

피폭에서 살아남은 후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피폭을 전염병처럼 생각해 피하고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했다. 훗날 유방암과 피부암으로 평생을 고생했고 직후 해방을 맞이하고도 폐허가 된 일본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어려운 생활을 이어왔다.

그럼에도 자의든 타의든 일본에 와서 전쟁과 무관하게 살다가 순식간에 죽어간 수많은 한국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원폭피해위 단체의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피폭 증언 활동을 계속해왔다.

박 할머니는 "(피폭 당시) 수많은 재일 동포들은 친척이 없어 갈 곳이 없었고 원폭 진원지로부터 2㎞ 이내에서 활동했어야 해 너무 힘들었다. '조센징'이란 굴욕적인 말도 들었다. 여름이라 (치료받지 못한)상처 부위에 구더기가 생긴 사람도 많았다"면서 "(그나마) 매실 장아찌와 단무지가 든 밥을 (하루) 세 번 배식해준 것은 지금까지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여기(일본)서 종전을 맞이했을 때 아버지가 '해방이 됐다'며 만세를 불렀다. 당시엔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억압에서 벗어났다는 기쁜 마음이었던 것 같다"면서 "(그때는) 제가 (어려서) 재일 동포로서 훌륭한 조국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몰랐다"고 지난 과거를 되돌아봤다.

☞공감언론 뉴시스 hjpyu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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