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참전 해병, 양말 꿰매 신으며 1억 기부
‘평범한 기부 천사’가 늘고 있다. 예비역 해병대 대령 이상철(88)씨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1억원을 기부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 소사이어티(고액 기부자 모임)’ 회원이 됐다. 2008년 첫해 6명으로 시작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은 올해 12월 기준 3299명으로 늘었다. 누적 기부액(약정 포함)은 3741억원에 달한다. 국내 최대 규모다. 출발은 성공한 기업인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우리 주변 이웃들의 기부가 대폭 늘었다.
이씨는 30년 가까이 빨간 명찰에 팔각모를 쓰고 군 생활을 한 ‘귀신 잡는 해병’ 출신이다. 월남전에 참전했고, 고엽제 피해도 입었다. 나이 들어선 암 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지금은 거동이 불편해 보행기나 휠체어에 의지해야 한다. 군인 연금과 참전 수당 외 특별한 수입은 없지만, 이씨는 지난 5월 사랑의열매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원을 기부했다.
지난 13일 경기 오산시 자택에서 만난 이씨는 기부하던 순간을 회상하며 “어려운 이웃을 꼭 돕자”던 생전 아내와 약속을 지켜 뿌듯하다고 했다. 그는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하다”며 “하늘에서 아내가 ‘우리 영감 잘했다’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며 웃었다. 해병대에서 젊음을 바친 남편을 위해 1남 3녀 자식 넷을 키우고 공부시키며 묵묵히 내조한 아내 윤명희씨는 당뇨병과 뇌출혈 등으로 투병하다 5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평소 아내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나눴지만, 실제 기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며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통장 하나가 기부에 나선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윤씨 명의 통장에는 아내가 작은 여인숙을 운영하며 차곡차곡 모은 돈, 군인 남편 월급을 쪼개 저축해서 모은 돈 등 4000만원이 있었다. 이씨는 “처음에는 액수가 너무 커 깜짝 놀랐다”며 “그동안 아내와 나눴던 대화를 곰곰이 돌이켜 보니 ‘기부하려고 모은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1억원을 기부하고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한 여러 분의 기사를 조선일보에서 읽었다”며 “신문에서 읽은 만큼 믿음이 갔고, 기부 결심을 굳혔다”고 했다.
1억원을 기부하려면 6000만원이 부족했다. 적지 않은 액수였지만 이씨는 “나라에서 받은 건 당연히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고 했다. 22세에 해병대에 입대해 1983년 대령으로 예편한 이씨는 백령도와 진해, 포항 등에서 근무했다. 1969년에는 월남전에 참전해 베트남 호이안에서 근무했고, 고엽제에 노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30년 가까이 군인으로 일하면서 나라 덕을 많이 봤다”며 “기쁜 마음으로 부족한 기부금을 모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씨는 지난 5년간 군인 연금과 월남전 참전 명예수당 등을 아껴 적금을 들었다. 이씨를 간병하는 요양보호사 최동화(60)씨는 “택시 타면 금방 갈 거리를 휠체어 타고 20분씩 가고, 양말에 구멍 나면 꿰매어 신는 걸 보면서 돈 없는 분인 줄 알았다”며 “무더운 여름에도 수박 한 통 안 사 드셨고, 하도 외식을 안 해 내가 밥을 사드린 적도 있다”고 했다. 최씨는 “기부한다고 해서 몇백만 원 정도 했으려니 싶었는데, 1억원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내가 남긴 4000만원에 저축액 6000만원을 더 모은 이씨는 지난 5월 은행을 찾았다. 적금 만기를 몇 달 앞두고 있었지만, 목표한 금액이 모이자 인출하러 간 것이다. 서둘러 돈을 찾으려는 이씨가 혹시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해 창구 직원이 공동모금회에 확인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기부하고 싶었다”며 “아흔을 앞두고 몸이 많이 쇠약해지면서 마음이 급해진 것 같다”고 했다.
이씨는 75세에 간암 수술을, 80세에 식도암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양쪽 어깨 인대가 끊어진 채로 생활한다. 수술해야 하지만 통증이 심할 때마다 응급실에 가서 진통제 주사를 맞는 것으로 버틴다고 했다. 당뇨병 전 단계라 다리가 퉁퉁 부어 있고, 휠체어를 타야 외출할 수 있다. 집에서도 보행기가 없으면 걷지 못해 거실에 병원용 침대를 놓고 누워 있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이씨는 사진 속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당신과 내가 모은 돈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잘 쓰일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참 편하다”고 했다. 액자 옆에 아너 소사이어티 인증서가 놓여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 자랑하려고 기부한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자식들 외에 다른 사람에게 기부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며 “남들에게 기부하라고 권유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씨에게 큰돈을 기부한 소감을 물었더니 “그게 참 뿌듯합니다”라는 짧은 답이 돌아왔다. 후회한 적은 없냐고 묻자 그는 “허허, 요만큼도 없어요”라며 크게 웃었다.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 문의 080-890-1212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공동기획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