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문화재에 래커칠을 할까…"화풀이용 치고 빠지기 안성맞춤"

이유진 2023. 12. 20.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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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절 안 되는 문화재 '반달리즘']
삼전도비, 해인사, 숭례문 등 앞서 표적
불만 표출 위해 주목도 큰 문화재 겨냥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궁 영추문 인근에 새겨진 낙서 제거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그라피티(graffiti)'는 미국에서 생겨난 거리 문화다. 래커 같은 유성도료를 스프레이로 분사해 건물에 그림, 글자 등 흔적을 남기는 행위를 말한다. 기성 권위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측면이 있어 예술의 한 분야로 보는 쪽도 있지만, 주인이 허락하지 않은 작업은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엄연한 범죄다. 하물며 모든 구성원이 지키고 가꿔야 할 문화재가 캔버스가 됐다면 '반달리즘(vandalism·고의적 훼손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경복궁이 현대판 반달리즘의 도구, 스프레이의 표적이 됐다. 범죄의 경중을 떠나 의도를 종잡을 수 없는 낙서 문구만 봐도 범인들의 입장을 두둔하기 어렵다. 이들은 대체 왜 문화재를 희생양 삼는 걸까.


이유 여럿이나 "공공 향한 불만 표출"

16일 새벽 서울 경복궁 영추문 부근 담벼락에서 낙서가 발견됐다. 범인은 '영화 공짜', 불법영상 공유 사이트를 뜻하는 '○○○TV' 등의 문구를 반복적으로 남겼다. 문화재청의 긴급 복구가 시작된 이튿날 오후에도 특정 가수와 앨범 이름을 적은 낙서가 담벼락에 새겨졌다. 모방범행을 한 20대 용의자 남성은 18일 경찰에 자수했다.

경복궁의 상징성이 워낙 커서 그렇지, 사실 문화재 '낙서 테러'는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2007년 이후 문화재청에 보고된 낙서 훼손은 8건. △서울 삼전도비(2007) △울산 천전리 각석(2011) △합천 해인사(2014) △서울 한양도성(2014) △충남 아산 당간지주(2017) △울산 언양읍성 (2017) △부산 금정산성(2018)에서 낙서로 인한 오염이 확인됐다. 낙서는 아니지만 국내 최악의 반달리즘 범죄로 꼽히는 2008년 숭례문 전소 사건도 있다.

2007년 2월 3일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삼전도비의 전면과 후면이 붉은색 '철거' 문구로 훼손돼 있다(위 사진). 2014년 서울 종로구 한양도성의 한 성돌에 래커로 칠한 낙서가 남아있다. 송파구청·서울시청 제공

동기는 다양했다. 붉은색 페인트로 송파구 삼전도비에 '철거 370'이라고 적은 30대 남성은 "치욕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댔다.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이를 과시하려 남긴 비석이다. 해인사 전각 벽면 13곳에 기도문을 적은 40대 여성은 "악(惡)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서 그랬다"며 종교적 사유를 들었다. 또 숭례문에 불을 지른 60대 남성은 토지보상 판결 불만이 원인이었다. 서울 한양도성은 별다른 이유 없이 래커의 성지로 전락했다. 2014년 이곳에선 페인트칠과 스프레이 낙서 흔적이 119개나 발견됐다.

이처럼 딱 하나로 규정할 수 없지만, 굳이 여러 범행 배경을 아우르는 흐름을 찾자면 화풀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공공(公共)을 향한 불만'에 기인한다는 분석이 많다. 여기에 문화재는 주목도가 높아 범행 효과를 극대화하기에도 제격이다. 김상균 백석대 경찰학부 교수는 "사적 복수나 보복을 넘어 불황, 사회, 정부와 같은 큰 대상을 상대로 부정적 감정을 간접 표출한 것"이라며 "어떤 사회든 불만과 좌절을 경험한 사람은 있는 만큼 공감대를 자극해 모방 우려도 큰 유형의 범죄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구성원 힘 합쳐 촘촘한 감시망 짜야

2008년 2월 11일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60대 남성의 방화로 숭례문 상층이 붕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범죄 도구인 스프레이의 특성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용이 간편한 스프레이는 신속한 범죄가 가능한 데 반해, 문화재에 씻을 수 없는 얼룩을 남긴다. 경복궁 낙서에도 10여 명이 달라붙어 제거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화학성분 잉크가 담벼락에 깊이 스며들 경우 완전 복원을 장담하기 어렵다. 삼전도비 복구 작업에도 3개월이 걸렸다. 경찰 관계자는 "래커칠은 검거나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해 치고 빠지기식 범죄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반달리즘 범죄를 예방하려면 사회구성원들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것이 최선이다. 경복궁처럼 유동인구가 많아 훼손 위험이 큰 도심 속 문화재는 더 그렇다. 2011년 울산 천전리에선 수학여행을 왔던 고교생이 장난으로 각석에 친구의 이름을 적은 혐의로 입건됐으나, 인근에 폐쇄회로(CC)TV가 한 대도 없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번 사건 역시 경복궁 안에 CCTV가 400여 대나 설치됐지만, 궁 외부를 비추는 장비는 14대에 불과해 모방범죄를 막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강근 서울시립대 건축학과 교수는 "당장은 CCTV 설치 확대가 모방범죄를 방지하는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인력 보강이 병행되지 않으면 문화재 관리 사각지대는 여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iyz@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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