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어른의 품격

2023. 12. 20.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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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품격은 인생 경험과 연륜을 쌓고 그 풍부한
자산을 통해 '각성한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것"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젊은 시절부터 좋은 어른 되기는 내 인생의 한 화두였다. 이것은 좋은 어른으로서의 삶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서른쯤 되자 어느 정도 인격이 굳어지고, 자기 집단에서의 위치도 정해지며, 신념과 취향도 확고해지면서 주변으로부터 어른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이맘때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고, 자기 일을 갖고 가족 부양의 책임을 다하며,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하지만 생물학적 나이만 찼다고 다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신체 성장, 집과 은행 잔액, 너른 인맥과 사회에서의 자리 따위가 어른 됨의 징표일 수는 없다.

 휘몰아친 '어른 김장하' 열풍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작년 이맘때 한 지역 방송사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가 큰 화제를 모았다. 경남 진주에서 한약방을 해서 모은 돈으로 학교를 세우고, 자신을 위해서는 옷 한 벌 허투루 사지 않지만 전 재산을 선뜻 사회에 내놓은 한약사의 스토리가 방송과 유튜브로 알려지고, 극장에서 상영됐다. MBC경남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웃음과 훈훈함과 감동을 다 잡았다는 극찬을 받았다. 삶의 지표로 삼을 만한 어른의 이야기는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지며 ‘김장하 열풍’을 일으켰다.

어른이 없다는 얘기가 떠돈 지는 오래됐다. 그런 와중에 돌출한 김장하 열풍은 우리 사회에 어른의 품격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던진다. 김장하 선생은 제 생업에 열심인 사람이다. 진주에서 한약방을 예순 해 넘게 꾸린 분이다. 내 생각에 어른이란 곧 일하는 사람이다. 어른은 자기 노동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가족 부양의 책임도 기꺼이 져야 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기생하는 존재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어른의 자격이 없다. 어른이란 제 삶의 의미와 무게를 받아들이고 묵묵히 견디는 사람들이다. 사는 데 필요한 교양과 지식을 쌓고, 어른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 제 직업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며, 시민의식을 갖고 건강한 방식의 삶을 꾸리는 이가 바로 어른이다.

 어른이 되지 못하는 어른들

신체는 다 자랐지만 미성숙한 자아로 아이처럼 행동하는 이들은 내면의 안정감이 떨어지고, 매사에 무책임하다. 누군가에게 얹혀사는 부류를 ‘어른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불화하고, 자기 고집이 세며 유아적으로 행동하기 일쑤다. 어른 구실을 못 한다는 점에서 영원한 미숙아다.

어른으로 살기 위한 적절한 배움과 수련을 건너뛰고 어른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경험의 비루함과 인격의 미성숙으로 실수와 시행착오를 저질렀다. 제멋대로 살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도움을 베푼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알지 못했다. 어른 되기에는 아득한데 나는 자기 성찰에 게을렀다. 그걸 깨닫지 못한 채로 나이만 들었던 것이다.

어른과 대척되는 자리에 응석받이, 철부지, 어른아이가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피터팬증후군을 가진 이들이다. 이들은 유전적 요인이든지 환경적 요인이든지 어른 되기를 거부한 채 철부지로 사는 방식을 벗지 못한다. 이들은 사회적 책임이나 경제적 독립을 유예하고, 몽상과 현실을 분별하지 못하며, 어른의 지표를 갖추지 못한 채 살아간다.

어른아이라는 고치 속에 한껏 웅크리고 독립 개체로 살 의지가 없는 사람은 어른이 될 수 없다. 딱한 사실은 우리 사회에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나이만 먹은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하나의 예로써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도서관이나 스포츠센터, 대중목욕탕 같은 시설에서 기초적 공중도덕을 안 지켜 불쾌하게 하는 이들이 정말 많다.

김장하 선생이 우리 사회에 던진 화두는 어른의 품격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 경험과 연륜을 쌓고 그 풍부한 자산을 통해 ‘각성한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각성이란 지식과 경험에서 만들어진 깨달음이고, 성숙의 징후이며, 원숙한 지혜의 발현이다. 어른의 품격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키우고, 시민의식을 갖추며, 세상의 일들에 지혜로운 중재자의 소임을 다하면서 얻는 것이다.

 미래 세대에게 삶의 푯대 되길

오늘날 어느 분야에서나 어른아이들은 흔하게 볼 수 있다. 더러 지도자 노릇을 하면서 음흉한 꾀를 내며 사익 추구에 몰입하는 행태는 불쾌하고 역겹다. 사회의 여러 병폐, 즉 탐욕과 이기주의, 과잉 히스테리, 갈등과 긴장들의 원인은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탓이다. 미숙한 인격체들이 만드는 사악함은 부의 양극화, 약자에 대한 차별, 공정성과 정의의 실종, 동물 학대와 생명 경시, 살인과 폭력으로 드러나고,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를 각자도생의 지옥으로 몰아넣는다.

어른으로 살고자 한다면 ‘어른의 품격이란 무엇인가?’라고 스스로 물어야 한다. 쩨쩨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남의 고통에 무감각하거나 관심이 없고, 매사 확증 편향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호감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들이 어른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른이란 소란과 허장성세로 갈팡질팡하거나 말초적 감각에 휘둘리고, 욕구와 충동에 따라서는 안 된다.

어른의 품격이란 어른다움이다. 그것은 절제와 포용, 관대함, 높은 자존감과 윤리의식을 두루 갖춘 인격과 삶의 태도에서 나온다. 타인을 향한 사려와 분별이 깊고, 앎과 행동이 하나이며, 연륜과 나이에 맞는 교양과 예의로 품격을 드러내는 이들과 더불어 사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미래 세대에게 삶의 푯대가 될 수 있는 어른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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