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외환위기 잊은 ‘검증’ 없는 재벌승계
[아침햇발]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연말 인사철을 맞아 재벌 3,4세의 고속승진 뉴스가 이어진다. 언론마다 ‘승계 가속화’, ‘승계구도 본격화’ 기사를 쏟아낸다.
26년 전 외환위기 때 기억을 소환해 보자. 당시 30대 재벌 절반이 한꺼번에 쓰러졌는데, ‘대마불사 신화’ 붕괴의 원인으로 ‘재벌승계’ 문제점이 꼽혔다. 능력 검증도 없이 젊은 나이에 회장이 된 2세들이 외부 빚에 의존해서, 무리하게 사업 확장을 하다가, 외부충격이 가해지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 경영패러다임에 대전환이 일어났다. 외형보다 내실(수익성) 위주로 바뀌었다. 그런데 경영승계 문제점은 얼마나 개선됐을까?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최근 국내 100대 그룹 조사결과를 내놨다. 재벌 3·4세들은 20대 후반에 입사해서 30대 초반 임원→40대 초반 사장→40대 중반 부회장이라는 고속승진 경로를 밟는다. 외형상 2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3·4세들의 최고경영자(사장·부회장) 승진은 부친세대보다 1~3년 빨라졌다.
재벌들은 승계 속도만 보지 말라면서, 내용적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다고 강조한다. 외국 명문대에서 유학하고, 여러 계열사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나름 경영성과를 보여주고, 글로벌 인맥 구축이라는 무형의 자산도 축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국 유학은 부친세대도 마찬가지였다. 일반 임직원들은 부서와 업무가 바뀌면 적응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3·4세들도 과연 그런 부담을 느낄까? 전문성이 없는데, 짧은 시간에 큰 성과를 냈다는 발표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자질과 능력이 뛰어나다면 고속승진은 문제될 게 없다. 관건은 승계 후보자에 대한 엄정한 검증이다. 한화 김동관 부회장은 입사 12년만에 부회장에 올랐는데, 세간의 평가는 괜찮은 편이다. 불모지와 같은 태양광사업과 씨름하며, 10년 만에 미래성장사업으로 키워낸 ‘뚝심’이 돋보인다.
하지만 그의 두 동생이 올해 사장과 부사장으로 동반승진한 것은 많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나이 문제만이 아니다. 이들은 폭행·성추행·뺑소니·대마초 흡연 등 다수의 형사사건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장본인들이다. 만약 일반 직원이었다면 회사에 다닐 수나 있었겠나? 한화에 체계적인 승계 관리·검증 시스템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그룹들의 사정도 다를 바 없다. 승계 관리·검증 시스템이 있느냐는 질문에 속시원히 그렇다고 대답한 그룹은 단 한곳도 없다.
독일의 가전업체인 밀레는 124년 역사를 가진 장수기업이다. 공동창업한 두 가문에서 한명씩 공동대표(회장)를 맡으며, 4대째 경영을 한다. 밀레의 승계절차는 두단계로 나뉜다. 예비 후보자는 두 창업주 가문에서 심사하는데, 공대 졸업과 경영학 박사학위라는 자격조건을 갖춰야 한다. 또 외부 컨설팅회사에서 경험을 쌓은 뒤 추천을 받아야 한다. 예비 후보자로 선정되면 밀레에서 최소 3년 이상 근무한 뒤 창업가문과 전문경영인으로 구성된 최종 심사위원회에서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스웨덴 제1의 재벌인 발렌베리는 167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발렌베리의 후계자 역시 해군사관학교 졸업, 부모 도움 없이 세계적인 금융중심지에서 실무 경험, 10년 이상의 평가, 계열사에서 경영수업 등의 까다로운 요건을 갖추고, 경영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엄격한 경영수업과 자질·능력 검증으로 이뤄진 합리적인 승계 시스템은 선진국에서 가족경영을 하는 장수기업들의 공통점이다. 한국 재벌도 이제는 제대로 된 승계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후계자 육성·검증을 총수집안에만 맡겨선 안되고, 회사가 주관해야 한다. 금감원은 최근 은행지주·은행 지배구조 모범 관행을 발표했다. 후보군 관리·육성부터 선정까지 포괄하는 공정하고 투명한 승계 시스템을 구축해, 최고경영자 ‘셀프연임’ 논란을 막겠다는 취지다. 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을 재벌이 못할 이유가 없다.
또 3·4세 검증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총수가족 내부에 실질적인 경쟁체제를 도입해야 한다. 발렌베리나 밀레는 장자우선, 직계우선 원칙이 없다. 가문의 구성원이면 누구에게나 도전 기회가 열려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3남이고, 아워홈의 구지은 부회장은 막내딸이다. 앞으로 장남, 차남, 아들, 딸 구분은 점점 무의미해질 것이다. 총수의 사촌과 조카까지 내부경쟁 범위를 넓혀야 한다. 최근 에스케이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을 맡은 최창원 부회장은 최태원 회장의 사촌이다.
총수가 절대권한을 행사하는 ‘황제경영’을 탈피해서, 새로운 승계 시스템에 맞는 기업지배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밀레의 장수비결에는 총수가문과 전문경영인의 파트너십 경영이 있다. 이사회를 총수가문 출신 2명과 전문경영인 4명으로 구성하는데, 의결권이 동일하다. 이사회 의사결정이 늦어질 수 있지만, 3·4세의 오판으로 그룹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재벌이 자식들에게 주식을 상속하는 것과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내 회사의 경영권을 내 자식들에 물려주겠다는데 무슨 간섭이냐는 생각은 총수일가 지분율이 평균 4%도 안되는 현실에서는 설득력이 없다. 승계가 잘못되면 총수집안만 망하는 게 아니라 기업이 무너지고, 외환위기처럼 국가경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기업의 사회책임을 강조하는 이에스지(ESG) 시대이다.
합리적 승계 시스템 구축으로 ‘승계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것은 총수가족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재벌 1~2세대는 성공신화의 주역이지만, 3·4세의 성장배경은 전혀 다르다. 창업세대에 비해 능력이나 경험이 일천한데, 그나마 제대로 된 경영수업과 검증도 없이 최고경영자를 맡는다면 재벌의 미래가 안전할리 없다. 한국앤컴퍼니의 ‘형제의 난’에서 보듯 경영승계가 후계자의 능력과 상관없이 자본력과 외부지원세력을 앞세운 머니게임으로 변질되는 일이 속출할 것이다. 오너경영체제가 전문경영인체제보다 경쟁력이 있으려면 승계 시스템부터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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