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추경 불호(不好)·추경 불혹(不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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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2023년엔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없었다.
'추경 불혹(不惑)'이다.
국회, 언론 등의 강한 주문과 비판 속 버텨낸 '추경 불혹'을, 군사독재 시절 밀어붙이는 정책과 차원이 다르다.
'추경 불호' '추경 불혹', 그가 정치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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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경 불호(不好)'.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첫 손가락으로 꼽은 추경호 경제부총리의 업적이다. 추 부총리 이름에 빗대 건전 재정 기조를 확고히 한 데 대한 평가다. 추 부총리 스스로도 '추경 불호'로 불러달라고 할 만큼 자랑한다.
실제 2023년엔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없었다. 2014년 이후 처음이다. 문재인 정부 5년간 이뤄진 추경 편성만 10회. 코로나19 등 천재지변과 같은 상황이 존재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과한 측면이 없지 않다.
추경은 사탕, 아이스크림과 같다. 달콤한, 포퓰리즘 유혹이 비단 정치권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성장을 놓칠 수 없는 정부도 때론 적극적으로, 때론 못 이긴 척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추 부총리는 끊었다. 이 총재의 표현대로 '쉽고 편하고 정치적으로 인기있는 넓은 길'을 버렸다. 대신 좁고 어려운 길을 택했다. 재정만 해 왔던 관료라면 어렵지 않은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예산 담당 관료들은 재정을 건드릴 수 없는, 금과옥조처럼 여기니까.
하지만 추 부총리는 확장적 재정 정책, 탄력적 통화 정책 등을 적잖게 강조했던 인물이다. 성장을 위한 사탕의 맛을 아는 그였기에 그 유혹을 이겨낸 게 더 놀랍다. '추경 불혹(不惑)'이다.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개각 때면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당신'은 5공화국 때 김재익 경제수석을 칭한다. 전문가에게 믿고 맡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때 인용되는 발언인데 정작 전문가 김재익의 정책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발탁된 80년대 초반은 2차 오일쇼크 직후로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심각했을 때다. 우리나라 물가상승률이 두자릿수를 기록했을 만큼 물가는 가장 큰 위험 요인이었다.
김재익은 과감한 재정 통화 긴축 정책을 펼친다. 경제 성장을 꾀할 당시 매년 예산증가율이 20% 수준이었는데 전년 대비 동결의 예산안을 만든다. 초강도 긴축정책으로 첫 한자릿수 물가상승률을 기록한다. 이는 3저 호황의 기초가 된다.
추 부총리가 유혹을 이겨낸 배경도 결국 물가다. 공무원 생활 초기, 물가담당 사무관 경험은 그의 DNA에 각인됐다. 2022년 취임 초 5%대 고물가를 접한 추 부총리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초석을 다졌다는 면에서 40년전과 비슷하지만 환경은 천양지차다.
국회, 언론 등의 강한 주문과 비판 속 버텨낸 '추경 불혹'을, 군사독재 시절 밀어붙이는 정책과 차원이 다르다. 성적표는 화려하지 않지만 내실이 튼튼하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해 4분기부터 올해 3분기까지 다섯 가지 항목(근원 물가상승률·인플레이션 확산도·경제성장률·고용 증가율·주식시장 실적)을 기준으로 OECD 주요 35개국의 경제 성적을 매긴 결과 한국이 2위에 올랐다.
#'굿 리스너(Good Listener)'. 추 부총리에 대한 공통된 평가다. 보고한 사람, 회의를 함께 한 사람 모두 이렇게 말한다. 거시와 금융을 모두 섭렵한 재선 의원 출신 부총리로서, 현안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을 법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참석자들의 의견을 듣는다. 발언을 중간에 자르지도 않는다. 원했던 방향으로 회의가 흘러가지 않아도 개입하는 대신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든다.
추 부총리가 만든 'F4 회의'에서도 그는 회의 주재자 역할에 머문다. 고리타분한 의전을 염두에 뒀다면 F4 회의 성립조차 불가능하다.
과거 경제부총리와 한은 총재의 만남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실무진들은 온갖 고생을 다했다. 추 부총리는 오히려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까지 불러 마이크를 내줬다. 비상경제장관회의 때도 안건 담당 주무장관들이 모두발언을 하게 했다.
추 부총리는 본인이 갖춘 화려한 기술, 강한 추진력 등을 드러내지 않았다. '추노믹스'라 명명할 수 있고 '추종 세트' 등의 정책 시리즈도 낼 수 있지만 철저히 절제했다. 취임 첫 해 법인세 인하, 부동산 세제 정상화 등 공약을 실행하는 것 외에 더 나가지 않았다. 상속·증여세 개편 등도 욕심내지 않고 총선 이후로 미뤘다.
주목받을 만한 이슈에 천착하기보다 '건전'과 '정상화' 키워드만 붙잡았다. 재선의 정치인이기에 이슈로 주목을 끌 법도 한데 '건조한' 길을 택했다. 그 흔한 '총선용' 딱지는 찾아볼 수 없다. 선(善)도 지나치면 악(惡)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안다.
'추경 불호' '추경 불혹', 그가 정치로 돌아간다. 수만 배의 유혹이 있는, 도드라지기 위해 경쟁하는, 진영 대결의 장에서 '굿 리스너' 3선 중진으로 절제의 내공을 보여주시길 기대한다. 경제부총리로 고생 많으셨다.
박재범 경제부장 swallow@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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