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병철·구인회에 꽃힌 美 교수 “창업·성공 비결은 경의사상”
남명 조식, 경의사상 영향… 영어 논문 발표
“삼성전자·LG·GS·효성 등 대기업 4곳의 창업주가 진주의 한 동네에서 배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분명 문화·지리적 특별함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1년 넘는 연구 끝에 이들의 창업(실천)과 성공의 배경에는 조선 시대 학자인 남명(南冥) 조식의 경의사상(敬義思想)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경남 진주시는 ‘K기업가 정신’의 발원지로 꼽힌다. 삼성 이병철, LG 구인회, GS 허만정, 효성 조홍제 등 한국을 대표하는 4대 대기업의 창업주를 배출했다. 진주를 대표하는 학자인 조식(1501~1572)은 학문에 그치지 않고 이론의 실천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아이만 타라비쉬 조지 워싱턴대 교수는 지난 18일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글로벌 기업의 창업주들이 한동네에서 살고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다”며 “연구자의 관점에서 진주가 왜 창업가들을 배출할 수 있었는지 증명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연구하면서 조식에 대해서 알게 됐지만, 영어로 된 자료는 거의 없었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영어) 논문을 발표하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학과 소속인 타라비쉬 교수는 2020년부터 세계중소기업학회(ICSB)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6월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 오준 전 유엔대사, 조규일 진주시장 등과 함께 ‘한국 기업가정신의 기원(Origin of Korean Entrepreneurship)’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중소기업경영 학술지인 JSBM(Journal of Small Business Management)을 통해 공개됐으며, K창업가 정신과 관련한 최초의 영어 논문으로 평가받는다.
타라비쉬 교수는 “조식의 경의사상은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데 전통을 중시하는 공자의 유교와는 다른 길”이라며 “조식의 사상은 4명의 기업가 정신으로 이어졌고 이들 집안은 대부분 조식과 직·간접적으로 연결고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병철 창업주의 조부인 이홍석과 구인회 창업주는 모두 유학자 집안이다. 허만정 창업주도 한학자로 모두 조식의 후학들과 사제·친인척·혼인 등의 관계로 연결됐다. 예를 들어 이홍석의 스승인 허석은 조식의 제자였던 허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타라비쉬 교수는 이병철 창업주의 인재 제일주의는 내부를 밝게 하라는 경(敬) 사상과 맥락이 닿고 실천을 강조하는 실용주의와 사업보국은 의(義) 사상과 연결된다고 봤다. 또 구인회 창업주의 인간 존중과 인화단결은 경 사상이 진화한 것이고 LG그룹의 도전정신은 의와 통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이병철 창업주는 생전에 “나는 기업경영의 80%를 인재양성에 쏟아왔다”고 했다. 구인회 창업주는 “신뢰가 성공을 낳는다”고 했고, 허만정 창업주는 “재산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잠시 보관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타라비쉬 교수는 한국(동양)의 ‘품질 우선주의’ 경영은 유교적인 기업가 정신이 밑바탕이 됐다고 주장했다. 논문에 따르면 한국의 유교적인 창업가 정신은 개인의 야망보다는 관계와 연결에 의해 주도되며 단기적인 이익보다는 품질과 신뢰성에 대한 평판 등 장기적인 목표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는 “4명의 창업주는 수시로 변하는 경영 상황에서 눈앞의 작은 이윤에 연연하지 않고 인재를 중시하며 큰 흐름을 바라보는 합리적 경영을 펼쳤다”며 “조식은 전통보다는 새로운 혁신을 꿈꿨고 이는 창업가들이 반도체 등 새로운 기술에 도전하는 자신감을 느끼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의 경우 전통을 우선시하는 창업가 정신이 있는데, 철기 시대에 청동 기술의 고도화는 의미가 없다”며 “한국이 첨단 산업 분야에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실천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K창업가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1955년 미국에서 설립된 ICSB는 전 세계 85개국에서 중소기업과 사람 중심의 기업가 정신을 확산시키기 위해 다양한 학술 및 중소기업 정책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유엔(UN)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노동기구(ILO) 등 국제기구와도 협력하고 있다. 2017년에는 ICSB가 유엔에 제안한 ‘중소기업의 날(MSMe Day)’ 제정 제안이 채택기도 했다. 단체에 소속된 교수 등 회원 수는 9만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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