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스 캐니언] 얼음과 비가 만들어낸 초현실 세계
존뮤어트레일을 마치고 바로 그랜드서클 탐험에 나섰다. 미국 서부 여행의 핵심 루트라고 할 수 있는 미국 3대 협곡인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 자이언 캐니언Zion Canyon, 브라이스 캐니언Bryce Canyon을 '그랜드서클'이라고 부른다. 3대 협곡 모두 미국의 국립공원이고 협곡들은 저마다의 색과 모습이 다르다. 야성미 넘치고 장엄한 그랜드 캐니언과 자이언 캐니언이 남성적이라면 브라이스 캐니언국립공원은 규모가 작고 여성적이면서 섬세하다.
브라이스 캐니언국립공원은 해발고도 2,400m에 수천 년 동안 바람, 빙하, 물의 힘으로 만들어진 수 십만 개의 첨탑이 신비롭다. 마치 영화 '해리 포터'의 마법의 세상으로 들어선 듯하다. 이 첨탑을 후두Hoodoo라고 부르는데 어떤 캐니언보다 특별한 모습을 보여 준다. 암석 지층이 교차하면서 형성된 후두들이 산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현실적인 풍광이다.
브라이스 캐니언의 명칭은 모르몬교 개척차인 에비니저 브라이스 Ebenezer Bryce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이름은 협곡이지만 폰소건트고원Paunsaugunt Plateau이 침식되며 형성된 원형 분지이다. 강에 의해 형성된 그랜드 캐니언이나 자이언 캐니언과는 달리 브라이스 캐니언의 후두는 얼음과 비에 의한 풍화와 침식으로 형성되었다. 일 년 중 180일 이상 영하의 밤과 따뜻한 오후 사이를 오가며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땅의 틈새가 벌어지고 바람과 비에 깎이고 홍수에 쓸리며 탄생한 것이 후두이다.
브라이스 캐니언의 '엑기스' 엠피시어터
브라이스 캐니언은 61㎞에 이르는 공원 도로를 따라 13개의 전망대에서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후두들을 조망할 수 있는데, 크게 브라이스 원형극장Bryce Amphitheater을 조망할 수 있는 앰피시어터 지역과 레인보우 포인트Rainbow Point 지역으로 나뉜다. 앰피시어터 지역에는 브라이스 포인트, 인스피레이션 포인트Inspiration Point, 선셋 포인트, 선라이즈 포인트, 페어리랜드 포인트Fairlyland Point가 있으며 앰피시어터 지역만 방문해도 브라이스 캐니언의 하이라이트는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선라이즈와 선셋 포인트에서는 수없이 많은 후두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 브라이스 원형극장이 내려다보인다.
림트레일을 따라 이어지는 뷰 포인트들을 모두 돌아보면 좋지만 브라이스 캐니언의 엑기스라 할 수 있는 앰피시어터 지역과 레인보우 포인트를 먼저 방문했다.
첫 번째는 브라이스 캐니언의 남쪽 끝에 있는 레인보우 포인트. 브라이스 캐니언을 마주하니 숨 쉬기 어려울 만큼의 감동이 밀려온다. 마침 일몰이 가까운 시간이라서 황금빛이 서서히 스며들어가는 후두의 세상은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 미친 아름다움이다. 형형색색의 후두들 사이로는 초록의 계곡이 펼쳐진다.
브라이스 원형극장의 가장 남쪽에 있는 브라이스 포인트는 주차장에서 포인트 앞까지 포장도로가 있어서 휠체어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후두들이 가장 촘촘하게 모여 있어서 브라이스 캐니언의 매력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비가 살짝 떨어지는가 싶더니 저 멀리 무지개가 떠오르기 시작하고, 후두들 사이로는 분지의 깊은 바닥이 보인다.
인스피레이션 포인트는 다른 포인트들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서 탁 트인 조망을 선물해 준다. 고도를 달리하는 3개의 전망대가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에 오르니 브라이스 캐니언의 깊은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후두들 사이에 있는 계곡 오솔길도 보인다. 더욱 진해진 황금빛 노을은 후두 숲 전체를 뒤덮는다. 잠자고 있던 후두들이 깨어날 것 만 같다. 왜 이름이 인스피레이션인지 온 몸으로 느낀다.
일몰시간에 맞추어서 선셋 포인트에 도착했다. 해는 잿빛 구름 속에 숨어 나오지 않지만 겹겹이 둘러싸인 후두들 위로 오렌지빛 석양이 무수히 쏟아지며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선셋 포인트에서 조금 내려가면 브라이스 캐니언의 심벌마크인 토르의 망치Thor's Hammer Hoodoo를 만날 수 있지만 어둠이 조금씩 밀려들고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니 안전을 위해 내일을 기약한다.
50년마다 300mm씩 깎여
어제 오후 내내 전망대에서 브라이스 캐니언을 조망하고 즐거웠지만 뭔가 2% 부족한 느낌이다. 후두 숲으로 들어가 걸어보면 그 부족한 2%가 채워지지 않을까? 주저 없이 트레킹을 선택한다. 트레일을 걸으면 후두의 숲에 파묻혀서 경이롭고 신비한 자연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다.
브라이스 캐니언에는 총 15개의 트레일이 있다. 소요시간은 1시간부터 5시간까지 다양하다.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나바호 트레일Navajo Trail과 퀸즈가든 트레일Queen's Garden Trail. 두 개의 트레일은 중간에 만나서 하나의 코스로 이어진다.
조금 길고 조용한 하이킹을 즐기고 싶어서 페어리랜드 루프 트레일Fairyland Loop Trail을 먼저 걷기로 했다. 페어리랜드 루프 트레일은 12.9km로 림 트레일Rim Trail에서 시작해서 타워 브리지 트레일Tower Bridge Trail을 거쳐서 선라이즈 포인트까지이지만 림 트레일 구간 대신에 퀸즈가든 트레일과 나바호 트레일을 이어서 걸을 예정이다.
밤부터 내린 비는 아침까지 이어졌지만 예정대로 페어리랜드 루프 트레일을 걷기 위해 시작지점인 페어리랜드 포인트에 도착했다. 페어리랜드 포인트는 브라이스 캐니언의 전망대 중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해발고도가 2,365m이다.
안개가 자욱하다. 비가 살짝 휘날리지만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다. 계곡엔 흙탕물이 흐르고 길은 질퍽거려서 걷기가 무척 불편하다. 시야가 흐려서 멀리 보이지는 않아도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멀리서 보았던 후드를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거친 느낌이 강하다. 풍화와 침식이 지금도 쉼 없이 진행되는 후두의 생명력이 느껴진다. 브라이스 캐니언은 50년마다 약 300mm씩 깎이고 있다고 한다. 인적이 거의 없으니 바람 사이로 나지막하게 들리는 자연의 소리조차 너무나 선명하게 들린다.
후두들이 저마다 특이한 모습으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동물의 형상도 보인다. 비와 눈, 바람이 이런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었다니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느끼게 된다. 기암괴석뿐 아니라 후드 사이에서 드문드문 서있는 나무들은 비바람에 맞서느라 기이한 모습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해리포터의 마법의 세계가 이런 모습이겠지.
타워 브리지 트레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이 '타워 브리지'이다. 타워 브리지 근처는 브리슬콘 파인Bristlecone Pine이 유독 눈에 많이 띄어 숲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브리슬콘 파인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나무로 5,000년 넘게 살고 있는 나무도 있다고 한다.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고 계곡물의 물살이 제법 세어지지만 운무가 가득하니 더욱 신비스럽다. 나무 뒤에서 요정이 걸어 나올 것 같다.
어느덧 선라이즈 포인트가 코앞이다. 삼각형으로 솟아 있는 '가라앉는 배sinking ship'는 정말로 배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모습이다. 비도 거의 그쳐가고 하늘이 맑아진다. 따스한 햇살이 후두들에게 기운을 넣어준다. 후두들이 침묵에서 깨어나고 있다. 후두가 만들어 준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을 오롯이 느끼면서 힐링하기에 더 없이 좋은 트레일이었다.
동화 속을 거니는 듯… 퀸즈가든 루프 트레일
페어리랜드 루프 트레일에서 퀸즈가든 트레일로 들어선다. 앰피시어터 지역의 전망대에서 브라이스 캐니언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한 코스 정도는 트레일을 걸으며 후두 숲으로 들어가 볼 것을 추천한다. 가장 추천하고 싶은 트레일은 퀸즈가든 트레일. 퀸즈가든 트레일은 브라이스 캐니언의 엑기스인 브라이스 원형극장으로 내려가는 트레일 중 가장 난이도가 낮은 트레일이다. 그러나 퀸즈가든 트레일만 걷고서는 빠져나올 수 없으니 나바호 트레일을 이어서 걸어야 한다. 총 거리 3.7km. 2시간 정도면 후두의 아름다움을 200% 느낄 수 있다. 빨강, 오렌지, 하얀색 등을 띠고 있는 후두는 참으로 황홀한 풍경을 보여 준다. 다만 선셋 포인트로 올라가는 길이 경사도가 심하고 스위치백 구간이어서 다소 힘이 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퀸즈가든 트레일의 시작지점은 선라이즈 포인트. 태양이 떠오르면서 후드들이 아침 햇빛을 받으면 더욱 장엄하고 다채로운 모습을 볼 수 있지만 하루 종일 언제라도 멋진 곳이다.
선라이즈 포인트에서 브라이스 원형극장으로 들어서니 동화 세계 같다. 내가 백설공주 성 안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곳을 걷고 있는 사람조차 아름답게 만든다. 후두에 생긴 구멍은 사람이 들어 다닐 정도로 크다. 유럽의 고성 느낌이 물씬 난다. 줄지어 있는 후두들은 마치 중국 진시황의 사후세계를 지키는 병마용을 연상하게 한다. 빅토리아 여왕 후두Queen Victoria hoodoo는 근엄한 여왕 모습과 흡사하다. 바로 이 후두로 인해서 '퀸즈가든'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선셋포인트로 오르는 나바호 루프 트레일로 들어선다. 투 브리지스Two Bridges, 토르의 망치Thor's Hammer를 보고 올라가는 스위치백 구간은 내려갈 때는 쉽지만 올라올 때는 그리 만만하지 않다. 나바호 루프 트레일 만을 걸을 때는 선셋 포인트에서 투 브리지스로 내려가서 월 스트리트Wall Street 쪽으로 올라오는 시계방향으로 걷는 것을 추천한다. 월 스트리트 구간에도 스위치백은 있지만 투 브리지스보다는 조금 덜 힘이 든다.
협곡 사이의 미로를 걸으며 다양한 후두를 관찰하는 즐거움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브라이스 캐니언의 심볼인 토르의 망치 앞이다. 마블시리즈에 나오는 토르의 망치와 정말 똑같이 생겼다. 스위치백 구간은 사방이 높다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치 뉴욕의 마천루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월스트리트로 부른다. 선셋 포인트에 도착해서 스위치백을 내려다보니 너무나 아찔하다.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과 내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다르다.
오전에 걸었던 페어리랜드 루프 트레일은 요정의 땅처럼 원시적이고 신비스런 느낌이 강했다면 오후에 걸은 퀸즈가든 트레일은 여왕의 정원처럼 잘 가꾸어지고 멋진 작품들이 가득했다. 트레일마다 저마다의 다른 느낌을 준다.
가족 하이킹 코스, 모시동굴 트레일
브라이스 캐니언을 떠나면서 오전시간에 방문한 곳은 모시동굴 트레일Mossy Cave Trail. 공원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어서 브라이스 캐니언으로 들어오거나 떠날 때 방문하는 것이 좋다. 다른 트레일과는 달리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트레일이다. 모시동굴은 여름에는 이끼, 겨울에는 얼음으로 가득 찬다고 한다. 모시동굴까지 걷는 모시동굴 트레일은 시냇물을 따라 오솔길을 산책하는 코스로 거리도 왕복 1.2km로 짧고 쉬워서 아이들과 함께 걷거나 피크닉을 즐기기에 더 없이 편안한 코스이다.
브라이스 캐니언에서 꼭 도전해 보고 싶었던 밤하늘의 별보기는 내가 방문했던 기간에는 밤마다 흐리고 비가 내려서 애초에 포기해서 살짝 아쉬움이 남았다. 브라이스 캐니언은 북미대륙에서 밤이 가장 어두워서 맨눈으로도 가장 많은 별보기가 가능하다고 한다. 토르의 망치 위로 쏟아지는 은하수는 상상만으로 만족하고 그랜드 캐니언을 향해 출발한다.
브라이스 캐니언 앰피시어터 맵
앰피시어터 지역 셔틀버스
- 차량의 진입을 따로 제한하지는 않는다.
- 공원 입장권이 있으면 어느 정류장에서나 탑승이 가능하다.
- 4~10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10~15분 간격으로 무료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 특히 전망대에서 전망대로 이어지는 하이킹을 하는 사람들이 손쉽게 이동하기에 유용하다.
- 브라이스 캐니언의 주요 포인트를 방문하기가 쉽다.
◆ 레인보우 지역 셔틀버스
- 하루 2회 운영, 오전 9시, 오후 1시 30분에 출발
- 약 3시간 소요
- 최소 48시간 이전 전화예약 필수
- 셔틀스테이션 (435) 834-5290
브라이스 캐니언 시티
아주 오래된 작은 마을로 브라이스 캐니언국립공원 입구에 있다. 마치 영화 세트장같이 아기자기하고 미국 서부마을 정취를 물씬 풍기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마트,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숍, 아이스크림숍 등이 있어서 여행의 피로를 풀면서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브라이스 캐니언 트레일 코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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