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과거사 진영논리 없다? 한동훈 법무부 시간 끌다 피해자 숨져
국가기관이 인정한 국가폭력 피해자의 손해배상 요구에 정부가 일관된 방침 없이 시간끌기 소송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전두환 정권 프락치 강요’ 국가배상 소송에서 법무부가 국방부의 항소포기 의사에도 항소를 지휘했다 뒤늦게 이를 번복한 사실이 확인됐다. 1심 선고 뒤 항소 여부를 밝히지 않았던 법무부는 항소기한(2주) 마지막날 오후 늦게서야 “피해회복을 돕기 위해” 항소를 포기한다는 보도자료를 냈는데, 국가 폭력 피해자는 일주일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국가의 사과를 받지 못했다.
18일 ‘전두환 정권 프락치 강요’ 국가배상 소송과 관련해 국방부가 법원에 제출한 항소장과 항소포기서 등을 종합하면, 소송수행청인 국방부는 지난 14일 오전 11시10분께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항소인으로 적시된 항소장에는 “‘1심 판결 중 피고(대한민국) 패소부분에 대하여 전부 불복하므로 항소를 제기한다”고 적혀 있었다. 지난달 22일 서울중앙지법은 전두환 정권 당시 고문을 받고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한 박만규·이종명 목사에게 국가가 “각각 9천만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는데, 이를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항소장이었다.
같은날 오후 5시25분께 국방부는 돌연 항소포기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6시간 만에 입장이 번복된 것이다. 이후 법무부는 저녁 7시께 보도자료를 내 항소포기 사실을 알리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 명의로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한 장관은 “대한민국을 대표해 피해자들께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앞으로도 국민의 억울한 피해가 있으면 진영논리와 무관하게 적극적으로 바로잡겠다”는 뜻도 밝혔다. 정부가 항소한 줄로만 알고 있었던 피해자들은 언론보도를 통해 정부의 항소 번복 사실을 알게됐다. 이들은 “오전까지 배상금 9천만원이 많고 국가폭력 사실 입증이 부족하며 소멸시효가 완성됐다 주장하며 국가폭력 피해자를 괴롭힌 정부가 사과도 피해자 모르게 언론에 했다”며 한 장관의 ‘보여주기식’ 사과를 비판했다.
법무부는 과거사 바로 잡기의 일환으로 항소를 포기한 듯한 자료를 냈지만, 한겨레 취재 결과 항소를 고집한 건 법무부였다. 소송수행청인 국방부는 법원의 1심 선고 뒤 줄곧 항소포기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서울고검과 법무부가 “항소하라”고 지휘했고 어쩔 수 없이 항소장을 제출했다는 설명이다. 청구 금액이 2억원을 넘고 5억원 미만인 사건의 항소 여부를 결정할 때 소송수행처는 고검 검사장과 법무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번 일은 정부가 일관된 기준 없이 과거사 국가배상 사건을 대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실제 정부는 전두환 정권 프락치 강요 사건 나머지 피해자들의 소송에 대해선 아무런 방침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진실 규명 결정을 받고 국가 배상 소송을 진행 중인 피해자는 130명에 이른다. 이들 사건에서 정부는 여전히 “소멸시효 완성, 피해사실 조사 부족” 등을 주장하고 있다.
정부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국가폭력 피해자인 이종명 목사는 지난 7일 국가의 사과를 듣지 못한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녹화공작·강제징집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기독교대책위원회의 황인근 목사는 “프락치 강요에 굴복한 사실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던 이종명 목사가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너무 안타깝다”며 “소천하기 전까지 이 목사는 ‘국가소송에서 정부의 잘못된 변론행태를 시인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며 피해회복이 될때까지 항소하고 다퉈야 한다’고 했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항소를 포기했지만, 피해자들은 다시 한번 법정에서 2심 재판부의 판단을 받아보기로 했다. 피해자 법률 대리인인 최정규 변호사는 “국가 배상은 피해자의 권리구제 뿐 아니라 위법 행정에 대한 통제적 기능 발휘해야 한다. 다시는 국가가 이런 폭력을 국민에게 저지르면 안된다는 메시지를 던지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해 항소를 제기했다”고 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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