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 칼럼] 골프 못 치는 IMF 총재는 왜 박세리를 극찬했나

김윤덕 기자 2023. 12. 19.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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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저성장 탈출법으로 韓 여성골프 비결 제시한 불가리아 출신 게오르기에바
“남녀가 서로 조력자 되면 성별 격차 줄일 수 있고 국가·기업 성장도 극대화”
이런 지도자가 필요하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Kristalina Georgieva)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1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세계 여성이사협회 포럼에 참석해 기조연설를 위해 단상에 오르고 있다. /뉴시스

서울에 온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가 박세리 얘기를 꺼냈을 때 조용한 탄성이 번졌다. 지난 14일 세계여성이사협회가 주최한 특별포럼에서다. 그는 “변화를 만드는 여성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들은 박세리 선수가 1998년 US 여자 오픈에서 날린 ‘불가능한 샷(the impossible shot)’을 봐야 한다”고 했다. 풀숲에 떨어진 공을 포기하지 않고 물속에 들어가 승리의 샷을 쏘아올린 박세리는 수많은 소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들이 자라 세계 스포츠사에 탁월한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정작 자신은 골프를 못 친다고 해서 좌중의 폭소를 터뜨린 총재가 박세리에게 경의를 표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파산 위기 대한민국에 다시 일어설 힘을 준 ‘IMF 영웅’이었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한 명의 여성이 후배들에게 얼마나 큰 영감과 자신감을 주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오르기에바 자신이 유럽연합(EU)에서 가장 가난한 불가리아 출신이었다. 공산주의의 붕괴, 오염된 지하수로 병들어가는 가족을 보며 환경경제학자가 된 그는 EU 예산 집행위원, 세계은행 최고경영자를 거쳐 IMF 수장에 오른 ‘국민 영웅’이다.

그 역시 차별적 시선에 놓이기 일쑤였다. 총리나 정치인들을 찾아가면 통역을 위해 따라온 여성으로 오해받았다. 학술대회에 꽃무늬 재킷을 입고 갔다가 황급히 무채색 정장으로 갈아입은 일화도 들려줬다. “소수와 비주류 의견을 제시해야 할 내가 남성 지배적인 문화에 항복한 거나 다름없었다”며 후회했다.

정작 마흔이 되기 전에는 성별 다양성이 왜 중요한지 몰랐다고 했다. 일을 잘하거나 못하거나의 문제이지, 성별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EU와 세계은행, IMF에서 일하면서 성별 다양성의 부재가 한 국가의 경제성장에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오는지 절감했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여성의 경제적 역량 강화’를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일하는 여성의 수는 남성보다 18% 적고, 임금은 30% 적게 받는 등 선진국 중 성별 격차가 가장 심한 한국이 OECD 평균 수준으로 격차를 줄일 경우 1인당 국내총생산이 18% 상승한다”고 진단했다. 저출산 늪에서 탈출하는 비법이 한국의 여성 골프에 있다고도 했다. 세계 100대 여성 골퍼 중 한국이 33명을 차지한 비결은 재능 있는 선수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지원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를테면 정부는 모든 아이가 양질의 보육과 교육을 받을 기반을 마련하고, 기업은 단축·유연근무제를 더 많은 근로자에게 확대하며, 남성의 육아휴직에 더욱 강력한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급여체계를 연공서열 아닌 성과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몇 년간 공을 쳤느냐보다 누가 더 잘 치느냐가 중요하므로!”

문제는 실행력이다. 전임 총재인 크리스틴 라가르드가 “한국은 집단자살(collective suicide) 사회”라고 개탄한 게 2017년이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도 아이를 갖는 순간 일을 포기해야 하는 한국 사회엔 미래가 없다는 여대생들을 만난 뒤 라가르드는 문재인 정부를 향해 “사회안전망 없이 여성들을 경쟁시키면 출산을 포기한다. 결혼과 출산을 안 하면 성장률과 생산성이 떨어지고 재정은 악화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2017년 1.05명이던 출생률은 0.6명대 진입이 코앞이다.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20대 여성은 10명 중 3명도 되지 않고, 결혼은 해도 아이는 낳지 않는다. 사교육비가 매년 최고치를 찍는 마당에 출산은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국가 소멸에 대한 위기감이 가장 낮은 곳은 정치권이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총선이고, 표를 위해서라면 남녀 갈라치기도 불사한다. 미래를 논하겠다는 신당들조차 저출산 해법의 열쇠가 여성이 아이도 키우며 일할 수 있는 성평등한 사회 개혁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페미’ 낙인이 두렵기 때문이다.

게오르기에바는 “남녀가 서로의 조력자가 될 때 국가도 기업도 최고의 성과를 올린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남성들의 전폭적 지지 속에” IMF 부서장의 여성 비율을 25%에서 50%로 늘리고 최고위직 5명 중 3명을 여성으로 임명했다. 추경호 부총리,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 등 이날 포럼에 참석한 경제계 지도자들에겐 이렇게 당부했다. “남성 리더들이 성평등 의지를 표명하고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한민국이 살아남으려면 이런 지도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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