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사진 보는 환등기·시대 알려주는 연표… 한국 발굴史 쓴 동반자
“허허, 뭐 남은 게 있어야지….” 조유전(81)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한국 고고학의 산증인’ ‘한국의 인디아나 존스’로 불리는 인물이다. 반세기가 넘는 그의 이력 자체가 한국 현대 발굴사(發掘史)나 다름없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뒤 1971년 신출내기 문화재관리국 직원 시절 참여했던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대표적 발굴로 일컬어지는 백제 무령왕릉이었다.
이후 경주 천마총과 황남대총, 안압지, 경기 연천의 구석기 유적 발굴에 참여했고, 전북 익산 미륵사지와 경주 황룡사지, 감은사지, 불국사, 서울 풍납토성 발굴 등을 주도했다. 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장과 국립민속박물관장,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지내는 동안 한국 고대사의 미스터리들이 그의 ‘삽질’ 아래 줄줄이 그 실마리를 드러냈다.
하지만 경기 성남시 분당구 그의 자택을 방문한 사람들은 그런 발굴의 자취를 느끼기 쉽지 않다. 발굴의 결과인 유물들은 모두 박물관에 가 있고, 땅을 파던 삽은 낡아서 버린 지 오래다. “그래도 흔적이 아주 없지는 않다”며 그가 물건 몇 개를 꺼내 보였다.
휴대용 슬라이드 환등기와 디지털 카메라
마치 사각형 랜턴처럼 보이는 손바닥만 한 물건이 있다. 1970년대 미제 ‘휴대용 슬라이드 환등기’다. 어느 현장을 가든지 기록을 위해 사진기는 필수로 가져가야 했고, 예전엔 이것을 크게 보기 위해선 슬라이드 필름으로 만들어서 환등기로 보는 방법이 유일했다. “슬라이드 필름을 아마 수천 장은 만들었을 겁니다. 지금은 다 연구소에 있죠.” 어디서든 캄캄하기만 하면 그 필름을 볼 수 있는 소형 환등기는 대단히 유용한 물건이었다.
조 전 소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 발굴로 꼽는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엔 그런 것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사진기라곤 일제 아사히 펜탁스 1대뿐이었고, 사용 방법을 몰라 플래시를 터뜨리지도 못했다. “무령왕릉은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발견이었어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일이었죠.” 그런데 2~3년이라도 모자랐을 대발굴이 “빨리 공개하라”는 주변의 성화에 11시간 만에 후다닥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도 땅을 치고 후회할 만한 이 졸속 발굴은 이후 일사불란하게 체계를 갖춘 ‘발굴단’의 구성을 낳았다. 그 시행착오가 한국 고고학 발전의 디딤돌이 됐던 셈이다.
20년을 지니고 다니던 환등기는 1990년대 후반에 그 소명을 다하게 됐다. 캐논 디지털 카메라 초기 모델을 구입한 순간, 그는 세상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백두산에 갈 때 처음 써 봤는데 더 이상 저장이나 기록을 걱정할 필요가 없더군요.” 그 사진기 역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발굴 현장의 동반자 ‘손가방’
여러 번 버리고 새로 구입한 ‘발굴 현장의 동반자’는 어깨에 메고 다녔던 작은 손가방이다. 그 속에 소형 사진기와 손수건, 양말, 수첩과 연표·라디오를 넣고 다녔다. 여름이면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고, 수시로 젖은 양말을 갈아 신었다. 신혼여행을 가면서도 이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경주 여행을 간다고 해 놓고 실제로는 발굴 현장을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이 열악하던 시절엔 손수건으로도 땀을 다 닦을 수 없을 만한 기상천외한 일도 많았다. 인부들이 커다란 능구렁이를 잡았다며 갓 발굴한 신라 토기에 뱀탕을 끓여와 ‘이것 좀 드셔보시라’고 권했다. 할 수 없이 닭백숙 맛 같은 그 ‘탕’을 마신 뒤 입가심으로 소주 한잔을 들이켰다. “결과적으론 1000년 된 신라 토기가 탕을 끓일 만큼 견고하다는 걸 밝힌 ‘실험 고고학’인 셈이었지만 다시는 그런 실험을 하지 않았어요.”
1978년 황룡사지 발굴 땐 목탑 터의 중심 초석인 심초석을 들어내야 했는데 무게가 무려 30t이었다. 안전하게 옮기기 위해 국내에 단 3대 있던 100t급 크레인이 필요한 상황에서 천운이 일어났다. 마침 인천에 있던 크레인이 하역 작업을 위해 가까운 포항에 와 있었던 것. 안전 진단도 하지 못한 채 옮기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긁힌다면 내 살을 베는 것 같겠구나’ 싶었다.
과거와의 소통 ‘연표’, 현재와의 소통 ‘라디오’
현장에서 꼭 휴대했던 또 다른 물품이 시대별 연호(年號)와 간지(干支)를 정리한 ‘동양연표’와 라디오였다. 이현종 편저로 1971년 탐구당에서 나온 소형 책자 ‘동양연표’는 오랜 세월 많은 인문학 관계자들의 필수품이었다. 발굴 중 간지나 연호가 적힌 유물이 나왔을 때 ‘이게 도대체 서기 몇 년이고 어느 왕 몇 년인가’를 곧바로 판별하는 데 이 책만큼 편리한 게 없었다. 오지(奧地)가 많은 발굴 현장에서 바깥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기 위해서는 성능 좋은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꼭 있어야 했다. 연표가 과거와의 소통 수단이었다면 라디오는 현재와의 소통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발굴이라는 ‘과거와의 소통’ 속에서 대한민국 ‘발굴의 현대사’가 차곡차곡 이뤄졌다. 무령왕릉 이후 가장 기념비적인 발굴로 그는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을 든다. “그때까지 갖춰진 노하우로 시험적인 발굴을 하나 했던 것인데, 금관이 나오고 천마도가 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광복 이후 우리 손으로 제대로 발굴한 첫 성과였어요.”
조 전 소장은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며 “땅을 파고 유물을 수습하지 않았더라면, 기록이 없는 부분은 소설을 쓸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며 “장구한 우리 삶의 뿌리와 정체성을 아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발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발굴이란 반드시 유적을 파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발굴과 개발은 최소화하고 유적 보존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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