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에 사라진 사랑채 공간…田자 구조 주택 생겨났다
- 부엌-안방-마루-건넌방 구조인
- 一자 형태 집을 사각으로 접어
- 부속채 등 전통적 생활공간 생략
- 소 막사 안 가마니로 구분 짓고
- 공동묘지 터 위에 판잣집 세워
- 피란 고단함 속에서도 살아내
- 새마을운동에 다양한 양옥 등장
- 시영아파트 시작으로 본격 변화
- 더불어 사는 부산의 주택 기대돼
사람은 집에서 산다. 사람이 만든 집은 살림을 살린다. 조선의 집은 유교를 실천하는 현장이자 도장(道場)이었다. 집은 시대마다 삶이 구조화시킨 실체이다. 부산의 공간에 나타난 집의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변화를 살펴 미래 부산의 집까지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부터 부산은 동래읍성과 좌수영성이 있는 한반도의 바다 국경에 위치한 호국의 고장이다. 구한말에는 동래읍성 내외부에 기와집과 초가가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었다.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일본의 도시 모습을 용두산과 왜관 주변에 이식한 결과 부산은 식민도시 모습으로 변했다. 신작로에는 무역상점, 상가주택이나 대지주 저택도 건축되었다. 근대식 병원이나 학교, 세관, 상점, 영사관과 청나라 조계지 건축물과 신작로에는 가로등과 전차가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이국적 도시 경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45년 해방 직후 인구가 28만, 6·25전쟁 피란으로 1952년 88만으로 급증했다. 당시 피란민수용소는 물론이고 언덕 위까지 판잣집이 즐비하게 들어서게 되었다. 판잣집은 구하기가 쉬운 각재 등으로 기둥과 지붕을 세우고 판재 깡통 천막 판지 짚 펠트 등으로 덮은 임시방편의 집인데, 시가지 하천변 언덕을 채워갔다.
일제강점기 말에 주택지가 부족해 남항을 매립한 남포동에 3층 집합주택인 청풍장(1941)과 소화장(1944)이 있는데, 여기에 피란민은 옥상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일제강점기의 주택 원래 모습부터 한국전쟁 시기 현재 생활상을 간직한 집이다. 리모델링해 변용한 상태이지만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집합주택으로 남아있다.
▮전쟁시기에 나타난 새로운 집
1950년대, 부산으로 피란 온 한국주택공사는 전쟁 통에 나타난 새로운 집을 제안하게 되었다. 외관은 흙벽돌 벽에 목조지붕틀을 세우고 경사지붕을 덮은 형태였다. 규모는 핵가족형의 중산층 엥겔지수를 반영해 9평(약 29.7㎡)이고, 아궁이가 있는 부엌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을 ㄱ자로 잇고, 방 사이에 마루방이 있는 전(田)자형 사각형 평면이다.
과거 한반도 전통주택은 대개 삼간초가나 부엌-안방-마루-건넌방이 연결된 4칸 일(一)자집이었다. 전(田) 자집은 사랑공간이나 부속채가 사라지며, 전통 일자형집이 사각형으로 접힌 집으로 변한 형태이다.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맞는 전통적 생활공간이 전쟁 상황에서 생략됐다.
해방의 기쁨은 잠시, 일상에서는 생존을 위해 일자리와 식수를 구해야 했다. 피란민은 부두나 국제시장 인근 등 일터까지 도보로 갈 수 있는 하천변이나 언덕에 기거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가끔 판잣집에서 취사를 위해 풍로를 피우다 불이 잘 붙는 담장이나 지붕에 불티가 날아 화재로 이어졌다. 부산역대화재나 국제시장화재 등 황망한 광경은 아직 어르신의 기억에 생생하다. 과거 대부분 부산 사람은 과거 전국 각지에서 와서 억척같이 살아왔다. 그래서 부산에는 개방적이고 다이내믹한 기질로 남아있다.
▮함께, 힘껏 살다
피란민 마을 중 일제강점기 소를 일본으로 송출하기 전 방역을 위해 1909년부터 목조 소 막사가 우암동에 건립되었다. 피란민은 가마니 등으로 내부를 구획해서 살았다. 이후에도 내외부를 개조하거나 소 막사 일부를 신축한 결과 용마루를 경계로 구조와 층수가 다른 여러 작은 집들이 생겨나 공생하고 있다. 소 막사는 근대산업기의 흔적까지 여러 시대의 생활이 축적된 현장이다. 또한 보수동에는 태극도인이 이주해 살았다. 부산시에서 위생과 화재 위험으로 1950년대 말, 감천동 언덕 마을로 이주했다. 이 정착촌은 현재 감천문화마을이 되어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아미동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었다. 피란민은 석재로 구획된 묘지 터 위에 판잣집 등을 짓고 살며, 점차 집을 신축하며 현재 비석마을로 불리고 있다. 이와 같이 부산에는 소가 살던 곳, 휴거를 꿈꾸던 곳, 죽은 자가 있는 곳에 현재 사람이 산다. 부산 속에는 각기 시간과 공간이 다른 헤테로피아(Hetropia)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현재 피란마을에 사는 분들은 근대적 격동기에 자녀들을 객지로 보내고 노인이 되어 있다. 이들은 우리들 부모님의 모습이고, 이방인이었지만, 현재는 부산의 터줏대감이 되어 마을을, 부산을 지키고 있다.
▮양옥으로, 아파트로
1960년대, 한국에 산업근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어 시멘트와 유리공장에서 슬레이트 지붕, 시멘트 블록을 비롯해 연탄아궁이 등 근대적 자재와 기술이 부산에 보급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도심지에 민간 창신아파트 등이 건립됐다. 불량주거지 환경개선을 위해 1969년부터 산복도로가 건설되고 주변에 4층 콘크리트 시영아파트가 생기며 도시경관이 변화됐다.
1970년대, 도시새마을운동은 감천마을 주택에까지 변화를 일으켰다. 이는 전국적 현상이었다.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집중되며 부산에서도 주택 변화가 본격화됐다. 근대식 재료와 기술적 변화로는 재래식 아궁이가 연탄보일러와 온수배관바닥매설 난방방식으로 대체되고, 싱크대 식탁 소파 도입으로 좌식 전통생활에서 입식 생활로 변화했다. 목조지붕도 콘크리트 슬라브로 대체되며 필요에 따라 거실을 중심으로 자유로운 방 배치가 가능한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형태로 1층 또는 2층 양옥집을 공급해 대표적인 도시주택 유형이 되었다. 이어 대량 공급이 가능한 아파트가 성립됐고, 1980년대 고층아파트 시대를 맞이했다.
1990년대, 재건축 재개발과 함께 모두가 중산층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과거의 공동체적 삶은 잊혀 왔다. 도시에 대해서는 울타리를 치고 방화문을 사이에 두고 이웃과 관계가 무관한 아파트가 숲을 이루게 되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이웃 상황, 자연, 자신마저도 헤아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오는 사이에 잃은 것도 많이 있을 것이다.
2010년대 이후, 인구감소와 초고령화 사회에도 집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곧 빈집 증가, 슬럼화 진행을 의미한다. 조화롭지 않은 개발은 공동체 간 사회적 격차, 경제적 불균형 심화를 의미한다. 행복한 삶을 살리는 집이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 되어 온 이유이다. 집이 도리어 미래 삶까지 희생시키는 불편한 존재가 되기도 했다. 천혜 자연환경을 가진 부산은 격동기를 겪는 사이 조화가 부족한 도시가 되었고, 이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부산의 건축적 실천은
유엔에서는 후손을 위해, 하나뿐인 지구를 위해, 복원력 유지와 지속가능한 개발로, 기후변화 위기에 대응하는 건축적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요구는 부산에서의 삶의 방식이나 주거 형식과 직결된 문제이다. 근래 한국인은 세계에 한류 문화를 알리며, 주목받지만 주택은 아직 그렇지 않다. 집을 지을 때 많은 나라에서는 행복한 공동체를 위한 주택 형식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공동체가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생활의 구현, 소재와 구법(構法)이 자연친화적 주택, 저렴하게 스스로 짓는 ‘자율주택’, 지구와 공생을 위한 윤리적인 ‘작은주택’으로 관심을 확장해 가고 있다.
이제 부산은 포용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전 지구적 환경과 인구 감소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현재의 집은 어떤 가치를 지닌 변화가 필요할까, 스스로 물어볼 때가 되었다. 과거 산업사회에서는 ‘싸게 빨리’의 시민에서 ‘더불어 행복’이라는 공동체 살림집을 위한 시민으로의 인식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최근 부산시는 ‘부산건축도시디자인 혁신방안’을 선언하며, 획일적 형태의 아파트가 아닌 특화된 디자인을 권장하고 있다. 삶을 담는 주택에 미학적 가치가 더해져야 하겠지만, 윤리적 가치까지 더해지면 더욱 반가울 것이다.
이제 부산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집을 위한 실천이 필요한 시점이다.
※ 공동기획 : 국제신문, 상지건축
*‘오! 부산’ 강연 일정 blog.naver.com/osangji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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