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호흡기만 단 PF... “만기연장됐지만 이자만 80억원 늘어”
수도권에서 주로 활동하는 A 시행사는 애초 올해 11월 분양할 목적으로 지난해 하반기 경기 북부 지역에서 주상복합 개발 부지를 매입했다. 매입 자금 약 2000억원 중 자기자본은 약 100억원이고, 나머지는 저축은행 등 제2 금융권에서 ‘브리지론(토지 매입 등 초기 비용을 조달하는 금융 방식)’으로 조달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제1 금융권으로부터 건축비 등을 조달해 분양과 착공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건설 자재비가 급등하고, 분양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분양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대신 지난 6월이던 브리지론 만기를 3개월씩 두 차례 연장했다. 그사이에 갚아야 할 이자만 80억원 늘었다. A사 관계자는 “지금처럼 사업 진척이 없을 때, 예전 같으면 채권단이 부지를 경매로 넘겼을 것”이라며 “하지만 지금은 금융기관들이 만기를 연장해 주면서 목숨을 붙여주고 있어 겨우 버틴다”고 말했다.
고금리와 부동산 침체 장기화로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 우려가 커지자, 최근 정부가 ‘옥석 가리기’에 나설 것을 공언하고 있다. 실제 PF 시장의 상황이 어느 정도이기에 정부가 경고음을 울리며 나서는지 현장 목소리를 들어봤다.
부동산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부동산 PF’라고 한다. 부동산 PF는 브리지론과 본PF의 두 단계로 나뉜다. 브리지론은 부지 매입과 인허가에 필요한 초기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다. 사업 성공이 불확실한 만큼 금리가 높고 증권사·저축은행 등 제2 금융권에서 대출한다. 본PF는 본격적으로 분양과 착공에 들어갈 때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다. 이 돈으로 브리지론을 상환하고 건설비를 충당한다. 시공을 맡은 건설사의 보증을 받기 때문에 금리가 낮고, 주로 제1 금융권인 은행에서 빌린다.
최근 부동산 개발 현장을 점검 확인한 결과, 브리지론과 본PF 모든 단계에서 자금 경색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부실 폭탄이 터지지 않게 조심조심 만기를 연장하며 버티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자는 나중에”... 버티는 PF 시장
18일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올해 4월 부실 PF 관리를 위해 채권단으로 구성된 ‘PF 대주단 협의체’가 가동된 이후 국내 주요 PF 금융사들은 기존 대출에 대해 이자를 나중에 받는 조건으로 만기를 연장해 주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애초 대주단 협의체는 부실 PF를 골라 정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후순위 채권자가 손실을 피하기 위해 ‘PF 정리’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이자를 나중에 받는 조건으로 대부분 살려두고 있다는 것이다. 한 대형 시행사 관계자는 “정부도 부동산 PF 시장이 갑자기 경색되는 것을 우려해, 지금까지 PF 정리를 미뤄두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채권단은 당장 이자를 받지는 않지만, 기존보다 금리를 높이거나 수수료 명목으로 추가 비용을 청구하고 있다. 시행사나 건설사 입장에서는 당장 PF가 무산되지는 않지만, 건설 프로젝트의 수익성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 부동산 PF를 취급하는 증권사 관계자는 “정부에서 PF 연체율을 관리하라고 하니 일단은 인공호흡기를 붙여줬던 것”이라며 “정상적인 금융 상황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중견 건설사 보증도 못 믿어” PF 거부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브리지론을 본PF로 전환하는 단계다. 본PF로 들어가야 브리지론을 상환하고, 공사비를 조달해 착공할 수 있다. 본PF 전환 때는 시공사의 보증을 채권단이 요구하는데, 중견 건설사의 보증도 믿을 수 없다며 대출을 거부하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다. 자금을 회전해야 하는 건설사 입장에선 공사에 들어가야 대금을 받을 수 있지만, 착공 자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자금 흐름이 막히면 다른 공사도 따낼 수가 없어 결국 유동성 위기에 내몰리고, PF 시장의 연쇄적인 부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최근 시공능력평가 20위권 건설사의 보증도 거부된 적이 있다”며 “이런 상황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고금리와 공사비 인상으로 지방을 중심으로 분양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착공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시행사가 본PF로 전환해 공사를 시작하려 해도 돈을 빌려주려는 금융기관이 없는 것이다. 이보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시행사가 대출에 의존하는 사업 구조를 바꿔 자기자본을 더 투입하도록 대출 심사 요건을 강화하고, 금융회사들도 건설사의 신용도가 아닌 프로젝트의 사업성을 정확히 판단해 대출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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