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시계탑의 과거와 현재

2023. 12. 18.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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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공공 장소 세워 시간 공유
사회 유지를 위한 공공서비스
개인시계 시대 맞아 의미 상실
도시 랜드마크로 역할 바뀌어

여름이 한창이던 올 7월, 나는 서울시의회 사무국으로부터 시계탑 복원 관련 자문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네 사람의 전문가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한 회의에 참석해 보니 의회 사무국에서는 시계탑에서 사라진 시계를 복원하려는데 그 디자인을 어떻게 할지 의견을 구했다. 참석자들은 의회 사무국으로부터 의회 건물과 시계탑의 내력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시계탑에 올라가 내부를 살펴보고 밖으로 나가 외관을 점검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경성부 부민관으로 건립된 현 서울시의회 본관은 일제강점기에는 공연 시설로, 해방 후 미군정청 청사와 국립극장으로, 1954년부터 1975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1976년부터 1991년까지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이용되었다. 1991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지방자치가 본격적으로 실시됨에 따라 서울시의회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3층 철근콘크리트 구조인 이 건물에는 약 9층 높이의 시계탑이 붙어 있는데 시계탑의 주인공인 시계는 사라진 상태였고 시계탑 내부에 태엽을 전기 장치로 감아 작동했던 옛 시계의 장치 일부만 남아 있었다. 1935년 건축 당시 이 시계탑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20세기 중반까지 대부분의 사람은 시계가 없었기에 공공장소에 시계탑을 세워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공공 서비스였던 셈이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전부터 사회구성원들 사이 시간을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시간을 공유하려는 노력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가장 빠른 기록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 신라조에 “신라 성덕 17년(718) 6월 비로소 누각(漏刻)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누각’은 물시계를 일컫는다. 또, “신라 경덕왕 8년(749) 3월에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 6명을 두었다”고 했다. 요즘 말로 하면 물시계 전문가 6명이 공무원으로 있었다는 이야기다. 시간을 공유한 범위가 궁궐에 근무하는 사람으로 한정됐는지 상류층 혹은 일반 평민까지 확대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시대에 물시계를 만들어 시간을 측정했고 이를 통해 여러 사람이 시간을 공유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이르면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태조실록’ 태조 7년(1398) 윤5월10일 자 기사에 “경루(更漏)를 종루(鐘樓)에 설치하였다”고 했다. ‘경루’는 ‘누각’과 마찬가지로 물시계의 다른 이름이다. 물시계를 종루에 설치했으니 약속한 시각이 되면 종을 쳐서 사람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16년(1434) 7월1일 자 기사에는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이날부터 비로소 새 누기(漏器)를 썼다. … 보루각(報漏閣)에 새 누기를 놓고 서운관생(書雲觀生)이 번갈아 입직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경회루의 남문과 월화문, 근정문에 각각 종을 설치하고, 광화문에 큰 종을 세워서, 당일 밤에 각 문의 종을 맡은 자가 목인(木人)의 종소리를 듣고는 차례로 전하여 친다. 영추문에도 큰 종을 세우고, 오시에 목인의 종소리를 듣고 또한 종을 치고, 광화문의 종을 맡은 자도 전하여 종을 친다. 경회루 남문과 영추문, 광화문은 서운관생이 맡고, 나머지 문은 각각 그 문에 숙직하는 갑사들이 맡았다.”

여기서 ‘누기’는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 자격루(自擊漏)를 가리킨다. ‘보루각’은 경회루 남쪽에 있었다. ‘서운관생’은 천문, 일기, 시각 등을 담당하는 서운관의 관원이고 갑사는 궁궐문을 지키는 군인이다. ‘목인’은 자격루가 일정한 시각에 달했을 때 종을 치는 사람 모양으로 만든 나무 장치다. 자격루에서 정해진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면 자격루가 위치한 보루각에서 가장 가까운 경회루 남문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이 이를 듣고 종을 치고 경회루에서 가까운 월화문과 근정문에서 이를 듣고 종을 치면 이 소리를 듣고 영추문 광화문에서 차례로 종을 쳐 경복궁 바깥까지 알렸으니 이들 문이 요즘의 시계탑 역할을 한 셈이다.

또 세종 19년(1437) 6월28일 자 기사에는 “국초에는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에 종루를 두고 의금부의 누기를 맡은 사람으로 하여금 시각을 맞추어 밤과 새벽으로 종을 쳐서, 만백성이 집에서 밤에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시기를 조절하게 하였으나 …”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태조 때부터 지금의 시계탑 격인 종루를 한양의 여러 곳에 두고 백성들에게 시각을 알렸음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 치면 오후 10시쯤인 이경에는 ‘인경’이라 하여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을 28번 쳤고 오전 4시쯤인 오경에는 ‘파루’라 하여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북을 33번 쳤다. 인경 때 종을 친 것은 음양오행설에 따라 쇠로 된 종은 음이라 밤과 잠을 상징하고, 파루 때 북을 친 것은 나무와 가죽으로 된 북이 양이라 낮과 일상의 활동을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뭄에는 파루에도 종을 쳤는데 음기가 부족해 비가 오지 않는다고 여겨 음기를 북돋우기 위해서였다.

한양뿐 아니라 전국의 요충지와 큰 절에서 종을 쳐서 시각을 알렸으니, 요즘으로 치면 시계탑을 전국 요소에 배치해 사람들이 약속된 시각을 알 수 있게 한 것과 같다.

지금은 개개인 모두 시계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시계탑이 본래의 역할을 잃었다. 이제 서울시의회 시계탑을 비롯해 세계 각지의 옛 시계탑은 지나간 세월의 흔적으로 시각을 가리키는 기능보다는 우뚝 솟은 도시의 랜드마크로 그 역할이 바뀌었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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