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중 선택” 칠레 보수적 새 헌법도 ‘부결’
55% 반대…개헌 ‘일단락’
칠레에서 피노체트 군부독재 시절 만들어진 헌법을 대체하기 위한 보수 우파 주도의 새로운 헌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지난해 9월 진보 진영이 주도해 만든 헌법안이 부결된 데 이어 이번에는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구성된 보수적 내용의 헌법안도 부결된 것이다.
엘파이스 등에 따르면 17일(현지시간) 칠레에서 새 헌법 초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된 결과 반대(55.75%)가 찬성(44.24%)을 앞질러 부결됐다.
지난 5월 칠레 제헌의회 성격의 헌법위원회 선거에서 야당인 보수 계열 정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면서 이번 헌법 초안은 우파와 극우파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일각에선 이번 헌법안이 1980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 시절 제정된 기존 헌법보다 더 퇴행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특히 임신중지 금지, 집회 제한, 주택보유세 폐지, 파업권 제한, 미등록 이민자 즉각 추방 등은 국내외에서 많은 논란이 일었다. 또 원주민 권리에 대한 언급이 빠진 것과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게 가택연금을 허용하는 조항, 사회 공공 서비스를 축소하는 조항들도 비판을 받았다. 변호사 겸 인류학자인 안토니아 리바스는 앞서 이번 헌법안이 통과될 경우 “어린이, 여성, 환경, 복지는 패자가 될 것이고, 가장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만 승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번 국민투표를 두고 “나쁜 것과 최악의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미첼 바첼레트 전 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새 헌법안이 부결되면 독재 정부의 헌법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되고, 새 헌법안이 통과되면 지금보다 더 퇴행하는 헌법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칠레의 새 헌법 제정 논의는 2019년 지하철 요금 인상에서 촉발된 ‘사회 불평등 항의 시위’를 계기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피노체트 독재 시절 수립된 현행 헌법으로는 불평등과 인권침해 등 고질적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커졌다. 이에 따라 ‘새 헌법 제정’이라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진보 성향의 가브리엘 보리치 정부는 지난해 9월 원주민 권리 확대, 성평등, 임신중지 보장, 노동조합 권리 강화 등의 내용이 담긴 새 헌법안을 만들어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부결됐다. 새 헌법이 시행될 경우 발생할 급격한 사회 변화 및 높은 사회경제적 비용에 대한 우려가 발목을 잡았다.
이후 치러진 헌법위원회 선거에서 극우 성향 의원이 다수 당선하자, 새 헌법 제정을 염원한 진보 진영은 역설적으로 피노체트 시절 만든 헌법이 유지되기를 바라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됐다. 이번 헌법안을 주도한 극우 성향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공화당 대표는 이날 “우리는 옳은 일을 했지만, 개헌안이 현행 헌법보다 낫다고 국민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했다.
이번 선거로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이 공약했던 새로운 헌법 제정 시도는 완전히 종료됐다. 보리치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두 개헌안 모두 칠레를 대표하거나 통합하지 못했으므로 현행 헌법을 유지하게 됐다”면서 세 번째 개헌을 추진하지 않을 것이며, 연금 및 세제 개혁 등 다른 시급한 현안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최서은 기자 ciel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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