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史淵] 시선의 변화와 1960년대 시대전환
1960년대 근대화론은
외부에서 들어온
발전 담론이지만
지도자에게
강력한 의지를 표출할
틀과 방향을 제공했다
그 결과 한국 사회가
확연히 다르게 바뀌는 데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과 그때를 비교할 때
민주주의 더 안정됐지만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미래를 놓고 함께 고민할
의제 하나 생산하지 못해
되레 총선 다가와 그런지
이념과 진영에 갇혀
‘태세전환’ 잔머리 굴리는
잔챙이들만 보인다
사람이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로부터 시작해 ‘인생이 바뀐다’로 끝나는 긴 명언도 있듯이, 한 사회의 전환도 인식 대상에 대한 해석 틀로서 새로운 담론에 따라 시작될 수 있다. 담론의 변화는 그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공유하는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하며 새로운 목표와 정체성을 규정하고 실천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대적 전환이란 꼭 격동의 과정을 거친 결과로만 나타난다고 볼 수 없다. 발전 담론의 하나인 1960년대 근대화론과 한국 사회의 변화가 그러한 보기의 하나이다.
■ 시선의 변화를 이끈 근대화론
빈곤에서 벗어나려는 한국인의 갈망은 1950년대에도 강렬하였다. 갈망을 현재화하는 방향을 근대화라는 말을 동원해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문명 담론이 더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그때의 근대화는 곧 경제성장만을 의미하지 않았으며, 민주주의의 제도화 등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선 시점에도 비슷하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조차 1962년 근대화를 위한 민주혁명의 과제로 세 가지, 곧 봉건적 식민지적 잔재로부터 민족 주체성을 회복하고, 경제 자립을 이룩해 빈곤에서 벗어나며, 건전한 민주주의를 재건하는 것을 제시하였다. 물론 이전과 분명히 다른 점도 있었다. 정부가 근대화의 하나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1963년 총선과 대통령 선거 때 근대화란 말이 ‘일종의 유행어’처럼 대중 사이에 널리 오르내렸다.
그런데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권유에 따라 1964년 2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정하였다. 물가를 비롯해 경제 안정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외자 도입에 의한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전략으로 전환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즈음부터 당시 한국 사회가 직면한 모든 불안과 혼돈의 태반이 가난에 연유한다며 철저히 가난을 문제화하였다.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느냐의 여부가 민주주의의 건전한 발전도, 복지국가의 건설도, 승공통일을 위한 국력 배양의 성패도 좌우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민에게 위기감을 불어넣고 문제 설정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가난의 문제화는 가난이 곧 후진국의 특징인 ‘저발전’이며 이것에서 벗어난 상태를 ‘발전’으로 간주함으로써 가난 극복을 경제성장의 기준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근대화를 경제성장 위주로 추진하였다. 더 나아가 근대화를 공업화와 동의어처럼 사용함으로써 더욱 경제주의적으로 접근하였다. 공업화 중심의 근대화론은 196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가는 남북관계를 반영해 “발전은 공산주의를 이기고 결국 통일을 이루는 길”이라는 논리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부는 국민에게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를 제시하며 발전 담론과 반공주의를 결합하였다.
■ 라이샤워식 근대화론과 역사인식
박정희 정부의 근대화 인식은 하버드대학 라이샤워 교수의 영향이 컸다. 그는 박정희 정부의 이렇듯 연이은 정책 변화를 예견하듯이 이미 4~5년 전인 1960년 10월, 당대를 대표하는 교양 시사 잡지인 ‘사상계’ 편집진과의 대담에서 비슷하게 발언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의 처지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수출을 통한 경제 부흥이며, 이 문제 해결의 최우선은 일본과의 통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경제 상태가 원활해지면 민주주의도 향상되고, 통일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라이샤워는 대담한 지 6개월 후부터 1966년까지 주일 미국대사로 근무했다.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막후에서 한·일 회담 성사에 노력했으며,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라이샤워 공세’라 불릴 만큼 강연과 대담, 글 등으로 자신의 견해를 매우 활발히 밝혔다. 그는 대사로 재직하는 중에도 일본의 근대사와 근대화에 관한 글을 모아 일본에서 책을 낼 정도였다.
라이샤워는 일본이 이룩한 근대화를 비서구 사회에서 크게 성공한 유일한 예외이자 모범적인 사례로 간주하였다. 그러면서 1931년 만주침략부터 1945년까지의 15년 전쟁을 일본 근대사에서 매우 예외적인 사건으로 치부하며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경제학자 로스토와 마찬가지로 전통과 근대를 분리하고 외부적 동력에 의해 독자적인 근대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는 한국의 근대화 역시 일본의 도움이란 외부적 요소의 힘을 빌려 실현 가능하다는 뜻이다. 또 그에게 있어 한·일 과거사 문제는 국교 수립의 걸림돌이 될 수 없으며, 식민주의 역사학의 역사관도 문제 될 소지가 없다.
■ 시대전환의 과거와 현재
박정희 정부는 실제 외부에서 주어진 물질적인 지원과 담론을 구체적 정책으로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창안한 정책도 그다지 없었다. 외부의 도움을 받길 주저하거나 한·일 과거사를 먼저 문제 삼은 적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조국 근대화를 특정한 방향으로 밀어붙이면서도 한국 근대화를 다룬 ‘좀 아카데믹한 보고서, 문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민주적 동의 과정도 생략한 채 그냥 대부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좌절한 근대화에 대한 역사적인 반성도 없어 ‘학술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빈곤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한탄하는 지식인도 있었다.
그나마 오늘날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국제)학술회의가 1960년대 중후반에 몇 차례 열려 근대화 문제를 주된 의제로 다루었다. 조국 근대화의 추진에 주체적 대응책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열린 회의들이었다. 가령 한국사학계는 1967년 한국사 시대 구분에 관한 토론회를 처음 열고 ‘근대’라는 시간 관념을 정착시켰다. 그때까지 ‘근세’는 있었어도 근대의 시작을 어디로 설정하느냐에 대한 논의조차 없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근대’는 뚜렷하게 합의되지 않았다. 또한 학술회의는 ‘주체적이고 내재적인 한국사의 발전’이 진행되고 있던 도중에 일본의 침략으로 좌절되었다는 논리 구조를 뚜렷이 만들었다. 조선 후기에 이어 개항 이후 어느 시점에서 식민화의 길로 가야 했던 역사의 흐름과 인과관계를 이때서야 명확히 한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 문제를 의제로 삼은 학술회의들에서는 전통과 민주주의가 연동하는 산업화를 주장한 사람들이 많았는데도, 그것을 정부 차원의 정책적 접근으로까지 연결한 예를 찾기 쉽지 않다. 오히려 전통과 관련한 역사문화는 이순신과 세종처럼 분단(냉전)과 연관된 국가안보나 근대화와 관련하여 유용하지 않으면 지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일상적인 문화유산은 봉건적이거나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되며 도태시키거나 간소화해야 할 대상인 경우가 많았다.
민주주의는 빈곤으로부터 탈출한 다음에 집중해도 된다는 정권 차원의 전략과 여기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대중적 감수성에 잠식되어 갔다. 왜냐하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만 해도 평균 7.8%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경제성장의 가시적 성과까지 있어 대중은 가난을 벗어나는 직접 체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유신독재 이전까지만 해도 근대화 담론은 비판 세력의 저항 담론을 효과적으로 무마하며 개발 독재에 대한 대중의 일정한 동의를 끌어내는 패권 담론이었다. 더 근본적으로 보면 패권 담론이나 저항 담론에서 말하는 자본주의는 모두 발전의 상징이자 도달해야 할 지점이었다. 또 경제성장 과정에서 고용이 늘어나고 부(富)가 확대되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 만큼 사회적으로 진보적 맥락에 위치하였다.
이처럼 1960년대 근대화론은 외부에서 들어온 발전 담론이지만, 지도자에게 강력한 의지를 표출할 수 있는 틀과 방향을 제공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비판적이든 긍정적이든 한국 사회가 이전과 확연히 다르게 바뀌는 데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흐름이 교차했지만 결국은 자본주의 발전을 긍정하고 공유하는 지점도 일정 부분 있었다. 그것은 비판자들의 대안에 한계가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세기 지난 지금의 한국 사회를 그때와 비교할 때 제도적 민주주의는 더 안정돼 있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미래를 놓고 함께 고민할 의제 하나 생산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문법으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현상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1997년의 외환위기와 2008년의 금융위기를 거치는 동안 무너진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를 새롭게 살려낼 비전, 의지, 통솔력조차 보이지 않아서다. 오히려 총선이 다가와 그런지 이념과 진영에 갇혀 삐뚤어진 충성심으로 정쟁만 일삼고 ‘태세전환’의 잔머리를 굴리는 잔챙이들만 보인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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