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더] ‘美 외교 전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별세 | “오직 국익만 존재” 적과도 타협, 냉전 시대 세계질서 바꿔
‘미국 외교의 전설’ ‘죽(竹)의 장막(중국과 자유 진영 국가들 사이의 장벽)을 열어젖힌 미·중 외교의 상징’ ‘중국 인민의 오랜 친구(老朋友·라오펑요우)’.
최근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에게는 수없이 많은 별명이 붙는다. 그는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면 적과도 타협했던 ‘현실 정치(Realpolitik)’의 대가로서, 냉전 시대 세계 질서를 바꾼 유일무이한 외교 전략가로 평가받는다.
키신저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 외교정책의 뼈대를 마련했고, 1972년 당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초대 주석 간 정상회담 성사를 이끄는 등 미·중 수교의 토대를 닦았다. 구소련과의 데탕트(긴장 완화)를 조성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으며, 베트남전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197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전쟁부터 베트남전쟁, 아랍과 이스라엘 갈등, 중남미 정쟁까지 지난 100년 키신저가 현직에서 다뤄 보지 않은 글로벌 외교 현안은 없을 정도다. 그런 그가 11월 29일(현지시각) 향년 100세로 코네티컷주(州)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WP)는 “두 대통령(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하에서 세계정세를 형성했던 키신저가 세상을 떠났다”며 “그는 미국 국제 문제와 정책 형성에 비할 데 없는 지배력을 발휘했던 외교관이지만 그를 절조와 도덕관념이 없다고 보는 비판 세력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난민 출신’ 키신저, 美 실리 외교정책 토대 만들다
키신저는 1923년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태어났다. 교사였던 부모는 유대인이었고, 그의 가족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난민 출신으로서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에 정착했다. 미국에 도착할 당시 그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평생 강한 독일어 억양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키신저는 같은 해 미 육군에 징병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1945년에는 방첩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귀향 장병 지원법에 따라 하버드대에 입학해 1950년 문학 학사를, 1952년과 1954년 철학 석사와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키신저는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는데, 이를 계기로 국제 사회 외교의 장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그는 1973년 9월부터 국무장관도 겸했으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동시에 지낸 사람은 키신저가 유일하다.
그는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면 적과도 타협하는 ‘현실 정치’의 대가로 평가받았다. 냉전기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고, 소련과의 전략 핵무기 제한 협상을 시작해 1972년 전략무기제한협정 1차 조약을 타결시켰으며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때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를 오가며 중재자 역할을 도맡은 ‘셔틀 외교’로 군사적 긴장을 해소했다. 키신저는 “오직 국익만이 존재한다”는 신념하에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외교정책을 폈다.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대통령들은 빠짐없이 재임 중 그와 만나 외교정책에 관한 조언을 들었다. 키신저와 같은 공화당 소속의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뿐 아니라 민주당 소속의 지미 카터,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도 그의 말을 경청했다.
‘물밑 외교’ 전문가이자 ‘셔틀 외교’ 장본인
키신저는 현장을 누비며 직접 발로 뛰는 ‘물밑 외교’를 통해 굵직한 역사적 분수령을 만들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중국과 미국 사이의 관계에서는 그의 전략이 더욱 빛을 봤다. 지난 1971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통해 키신저는 중국 측과 조용히 접촉한 뒤, 같은 해 4월 미국 탁구 대표팀의 중국 방문 경기를 성사시켰다. 7월엔 기자들의 눈을 피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를 만났다. 양국 모두 체면이 중요한 시기에 그는 끝내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초대 주석의 역사적 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는 1979년 정식 수교했다.
베트남전 종결에서도 지연 전술을 펼치는 북베트남과 패전 책임을 뒤집어쓰기 싫은 닉슨 대통령 사이에서 키신저는 미국의 출구 전략을 마련했다. 1973년 파리협정을 통해 베트남전쟁을 종결시킨 공로로 북베트남 협상 대표인 레득토와 함께 그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70년대 초반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셔틀 외교’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도 키신저다. 그는 1973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양측을 오가며 중재에 나섰다. 뉴욕타임스(NYT)는 “키신저는 포괄적인 평화협상이 아닌, 아랍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미래에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중재했고 이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고 평가했다.
키신저는 한반도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1975년 9월 제30차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해 남북한과 미국·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자주 한국을 찾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과 만났다. 이 공로로 2009년 한미 관계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밴플리트상을 받았다.
최근까지도 왕성한 활동…AI에 큰 관심
키신저는 국무장관 퇴임 이후에도 저술 및 연구 활동과 강연 등을 통해 전 세계 외교정책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핵무기와 외교정책, 중국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의 저서를 남겼다. 국제 컨설팅 회사인 키신저 어소시에이츠를 만들었고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CFR, 애틀랜틱 카운슬 등의 멤버로도 활동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이슈를 언급하며, 미국과 중국이 이와 관련해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지난 5월 키신저는 100세 생일을 맞은 기념으로 영국 ‘이코노미스트’와 인터뷰를 하면서 “인류의 미래가 미·중 관계에 달려 있다”면서 “양국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세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과 비슷하다”면서 “양국이 대화로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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