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통화 채택은 금융 자주권 포기 아르헨티나 경제·민주화에 부정적
“미국 달러를 자국 통화로 채택하겠다.”11월 19일(현지시각)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된 극우 정치인 하비에르 밀레이(이하 밀레이)의 대선 공약이다. 12월 10일 취임한 그가 이러한 공약을 내건 이유는 지난 10월 아르헨티나의 물가가 전년 대비 142.7% 오르며 32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가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자국 통화인 페소화를 없애고 달러를 법정통화로 사용하면 당장은 통화량이 줄어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자국 통화 포기는 금융 자주권을 포기하는 것이라 중장기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필자 역시 “금융 자주권은 경제 안정을 위해 필요한 공공재적 성격이 있다”면서 “미래 아르헨티나 경제와 민주주의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밀레이의 공약 실행 가능성을 두고 부정적으로 보는 외신 보도 또한 적지 않다. 영국 가디언은 “이 공약을 실행하기에 장애물이 많다”고 보도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보유한 달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아르헨티나가 달러 법정통화 공약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돈은 약 300억달러(약 38조8500억원)에 달한다. 아르헨티나 의회로부터 공약 이행 승인을 받기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아르헨티나 의회는 좌파 ① 페론주의 집권당인 ‘조국을 위한 연합’이 의석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밀레이가 소속된 우파 정당 ‘자유의 전진’은 상원 10%, 하원 15%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집권당의 동의를 끌어내 의회 승인을 받더라도 법원의 위헌 판결로 공약 실행이 불가능해질 가능성도 있다. 최근 아르헨티나의 오라시오 로사티 대법관이 “페소화를 외국 통화로 교체하는 것은 위헌이고 주권을 침해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현재 중남미의 파나마·엘살바도르·에콰도르는 달러를 법정통화로 사용하고 있다. 에콰도르는 2020년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고, 엘살바도르의 경제성장률은 2022년 중미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된 밀레이는 자유주의 경제학자이자 자칭 ‘무정부주의 자본주의자’다. 그는 병들어가는 국내 경제를 살리고 폭주하는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억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수십 년간 아르헨티나의 암울한 경제 실적과 650억달러(약 84조1750억원) 규모의 국채 등을 고려할 때 이는 어려운 과제다.
올해 아르헨티나의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대비 2.5% 감소하고, 물가 상승률은 140%를 넘길 것으로 예상되는 등 아르헨티나의 경제 전망은 암울해 보인다. 페소화는 미국 달러 대비 사상 최저치로 하락했고, 아르헨티나는 국가 디폴트 위험에 처해 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아르헨티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경제 위기를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공공 지출을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 밀레이는 아르헨티나 경제를 달러화해 이를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법정통화로 지정할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도 거의 10년간 달러 ② 페그제(페소화를 달러에 일대일로 고정하는 통화위원회 제도)를 시행했지만 2000년대 초 또 다른 부채 위기로 붕괴한 적이 있다. 밀레이의 계획은 중앙은행의 ‘페소화 인쇄기’를 멈추면(페소화를 폐기하면) 공공 지출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하지만 이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공공 지출은 많은 요인에 의해 좌우되며, 달러의 법정통화 채택은 아르헨티나의 적자 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국 통화정책에 대한 통제권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 넘어가기 때문에 자국 통화 가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환율을 조정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밀레이의 생각과는 달리 달러는 거시경제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에, 현명한 정책 입안자들은 이를 장려하기보다는 저항해야 한다고 본다. 달러에 의존하는 금융 시스템 문제는 불안정한 환율 변동, 급격한 자본 흐름의 변화 그리고 외부 충격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반면 자국 통화는 외부에 통화정책 독립성을 나타내며 문화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르메니아 중앙은행은 지난 9월 자국 화폐인 드람화 발행 30주년을 기념해 ‘We are the dram’이라는 주제로 국제 콘퍼런스를 열고 “드람은 단순한 화폐 그 이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국가로서 우리가 극복한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밝혔다.
통화 주권은 현대 국가와 경제의 필수적 특징이며 국가가 자국 영토 내에서 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뿐 아니라 통화 공급 관리, 이자율 설정, 환율 제도 감독 및 수립, 중앙은행 보유고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 통제를 시행할 수 있는 권한도 포함한다. 국가(중앙은행)가 발행하는 통화는 법정통화로 인정되며, 이는 재화와 용역을 구매하고 부채를 상환할 때 반드시 통용돼야 함을 의미한다. 중앙은행은 국내 통화가 은행 시스템을 통해 흐르도록 보장하며 민간은행에 대한 최후의 대출자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르헨티나의 법정통화를 달러로 바꾸려는 밀레이의 계획은 금융 자주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밀레이의 공약은 국가 역할과 규모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축소해야 한다는 그의 자유주의적 신념과는 일치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 방식은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이다. 금융 자주권이 경제 안정과 민주적 거버넌스 강화를 위해 필요한 중요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통화정책 주권의 자발적 포기는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및 정치적 취약성의 징후다. 또 이는 아르헨티나 경제와 민주주의 미래에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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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에서 1946년부터 1955년까지,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두 차례 집권한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이 펼친 포퓰리즘(populism·대중주의)적인 경제·사회정책을 의미한다. 페론 대통령은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해 복지를 확대하고 임금을 인상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1952년 아르헨티나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1947년과 비교해 5년 만에 25%가 올랐다. 임금 인상은 아르헨티나 산업에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 페론 대통령은 다른 나라와 교역에선 자유무역 대신 보호무역 노선을 택했다. 정부의 과도한 개입으로 시장 비효율이 커졌고, 결국 ‘정부 실패’로 연결됐다.
② 페그제는 한 나라의 통화 가치를 특정 국가의 통화에 고정하고, 정해진 환율로 교환을 약속한 고정환율제도다. 페그(peg)란 어떤 대상을 고정시키는 ‘말뚝’이나 ‘못’이라는 의미의 단어다. 어떤 나라가 기축통화로 미국 달러를 채택하면 그 나라의 통화와 미국 달러 간 환율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달러와 다른 나라 통화의 환율 변동에 따라 자국 통화 가치가 결정된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 달러에 대한 유로화의 가치가 변하면 자국 통화와 유로화의 통화 가치도 그만큼 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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