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74>] 자기 몫으로 주어진 불안을 마주하면서 끝이 나다
봄날이었던가 가을날이었던가. 계절과 계절 사이, 날씨가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오후였다. 택시 뒷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무심하게 내다보던 나는 내 인생이 어딘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생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거라면, 이처럼 무료한 것이 인생이면, 그런 내 인생은 어딘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아무렇지 않은 날씨가 꼭 내 삶에 대한 비유인 것만 같았다. 무서웠다. 아무 날도 아닌 날들의 연속이 무슨 말인가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삶의 나른한 공포’를 느낄 때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이응준의 ‘레몬트리’다. 소설은 자신이 수행해야 할 불안을 회피하는 상태에 있던 한 남자가 자기 몫으로 주어진 불안을 마주하면서 끝이 난다. ‘비로소 조금씩이나마 불안해지고 있다’는 말은 한눈에도 역설적으로 보인다. 불안이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문장은 어딘가 뒤틀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은 불안이야말로 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맞다. 꿈이 없는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불안이 없는 사람, 자기만의 고통에 빠져 방황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삶의 나른한 공포란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들었을 때, 인생의 길을 잘못 들었는데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무의식이 보내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봄날인지 가을인지 기억나지 않던 그날 나는 인생으로부터 날아든 경고장을 받아 들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죄를 짓는다. 그 죄목 중 하나는 도망이다. 무엇으로부터의 도망인가 하면, 자신이 받아야 할 비난, 그 비난으로 인해 응당 겪어야 할 고통으로부터의 도망이다. 예를 들면 잠수 이별 같은 것이다. 만나는 것이 어렵다면 헤어지는 것은 더 어렵다. 만날 땐 ‘일어날’ 일들만 생각하면 되지만 헤어질 땐 ‘일어난’ 일들까지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파도처럼 쫓아오는 지난 시간을 뒤로하고 앞으로 가기 위해 노를 젓는 건 쉽게 뛰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럴 때 도망은 우리를 유혹한다. 주고받아야 할 고통을 건너뛰고 인생의 다음 장면으로 스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항목에 건너뛰기는 없다.
건너뛸 수 없는 사람들, 그렇다고 고통을 마주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변형된 도망이 바로 자신으로부터의 도망이다. 그런 도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정당화와 자기 합리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합리화는 도망을 정당화한다.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끌어내릴 때 고통도 함께 사라진다. 고통이란 감당할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허락되는 것이기에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신은 고통을 외면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추앙받고 싶어 어떤 것이 되고자 하는 어리석음만 있는 게 아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아무것도 아니고자 하는 어리석음 또한 인간의 것. 그러나 내 몫으로 주어진 통증은 내가 외면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나른한 공포
소설은 마주 앉은 두 남녀를 비추며 시작된다. 둘은 헤어진 옛 연인이다. 5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광어회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자신에게 이제 막 두 돌 지난 딸이 있다고 말한다. 전도사인 남편과는 별거 상태나 다름없다는 고백도 서슴지 않는다. 여자가 종교인의 부인이 됐다는 사실에 놀란 남자는 자신에게도 약혼자가 있다고 말한다. 사촌과 같이 가전제품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근황도 들려준다. 모조리 거짓말이다.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들 사이에 어떤 감정이 남아 있는지는 두 사람조차 모를 것이다. 알았더라면 헤어지지 않았겠지. 그런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은 거짓말이거나 암시의 말이다. 최면술사인 남자는 여자에게 최면을 건다. 최면 상태에서 여자는 자신이 한 말이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말한다. 최면에서 깨어났을 때 여자는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두 사람은 거짓말과 의식하지 못하는 말 속에 있다 헤어진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예감하면서.
5년 만에 찾아온 여자는 5년 전 도망친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고독한 나머지 조잡하고 분주했던 여자에게서 패배감으로 주눅 들어 있는 자신의 고요함을 봤더랬다. 두 사람은 같은 어둠을 공유하는 도플갱어 같았고, 남자는 자신에게서 도망치듯 여자에게서 도망쳤다. 헤어지던 날 남자는 자신을 기다리던 여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나무 뒤에 숨어 여자가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숨어 있는 내내 남자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암시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반복된다. 내가 건너뛰었던 내 불안과 고통은 5년 전 헤어진 연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대가를 치를 것을 요구한다.
최면 상태에서 여자의 거짓말이 드러났을 때, 남자는 자신이 무엇을 속여 왔던 건지 스스로 질문했을 것이다. 우리는 함부로 작아질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닐 수 없고, 불안을 거절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역설은 불안과 불행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것이 되어 갈 수 있다는 진실을 낮게 읊조린다. ‘삶의 나른한 공포’를 느낄 때 생각나는 소설, ‘레몬트리’. 나는 불안을 애호하는 이 낯선 결말에서 삶의 반듯한 진실을 본다. 인간에 대한 환한 희망을 본다.
Plus Point
이응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양대 독어독문학과와 동대학원 석사과정 및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0년 시인으로, 1994년 소설가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시, 소설, 논픽션 등 영역을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소설 ‘레몬트리’를 바탕으로 각본과 감독을 맡은 영화 ‘레몬트리’는 2008년 뉴욕아시안아메리칸 국제영화제 단편경쟁 부문, 파리 국제단편영화제 국제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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