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또 `정치 테마주`, 얼룩진 증시
고등학교 동창과 주말 저녁을 함께 먹었다는 영화배우 이정재가 별안간 '돈 방석'에 앉았다. 그 동창이 내년 총선 출마설에 여당 비대위원장 내정설까지 나오고 있는 정권의 실세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현대고교 동기인 둘이 시내 한 갈빗집에서 다정하게 찍힌 사진은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제로 떠올랐다. 영화배우와 검사라는 생경한 조합이었지만 어릴 적 친구인 만큼 어색한 데 없는 막역한 사이로 보였다.
만남 이후 이정재가 투자하기로 했던 광고 플랫폼업체 와이더플래닛의 주가가 치솟기 시작했다. 와이더플래닛은 지난 8일 운영자금 약 190억원을 조달하고자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공시했다. 제3자 배정 대상자가 이정재(313만9717주)와 배우 정우성, 위지윅스튜디오 등이었고, 이달 투자금 납입이 완료되면 이정재가 와이더플래닛의 최대주주가 된다는 소식이었다.
와이더플래닛의 주가는 6거래일 연속 가격제한폭(30%)까지 치솟았다. 지난 8일부터 13일까지 4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고, 지난 14일엔 주가 과열로 하루 동안 매매거래가 정지되기까지 했다. 거래가 재개된 지난 15일에도 상한가를 기록했고 다음 거래일인 18일에도 장이 열리자마자 상한가로 직행했다.
지난달 말 기준 3000원을 밑돌던 와이더플래닛의 주가는 현재 1만7000원대까지 올랐다. 유상증자에 참여한 이정재는 투자금을 납입하기도 전에 수백억원을 벌게 됐다. 유상증자 신주 발행가액은 3185원으로 현 주가는 이보다 461% 높다. 향후 주식이 상장돼 이 주가 수준이 유지될 경우 이정재는 100억원을 투자해 약 561억원에 달하는 주식을 갖게 된다. 이정재의 연인인 임세령 대상그룹 부회장의 지분 가치도 수 배로 뛰었다. 대상홀딩스 우선주인 대상홀딩스우는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6일까지 7거래일 연속 상한가로 장을 마감했다. 이후에도 '한동훈 테마주'로 분류되며 극심한 변동성을 보이고 있다. 한편에선 남선알미우(남선알미늄 우선주)와 부국철강 등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관련주도 크게 뛰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 테마주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치 테마주는 원래 회사의 지배주주가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유력 정치인(후보)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거나 후보가 과거 창업한 회사나 선거 공약과 관련이 있는 종목을 일컬었는데, 이제는 후보와 같은 대학이나 동향 출신이 임원을 맡고 있는 회사라거나 예전에 작은 인연이 있거나 하면 죄다 테마주가 된다.
대부분이 기업가치와 본질적으로 상관이 없지만, 간혹 어떤 종목은 테마주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연관성이 없다. 지난 미국 대선 당시 게맛살을 만드는 한성기업이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의 테마주로 분류되며 주가가 급등하기도 했다. 한성기업이 바이든 테마주로 둔갑한 것은 바이든이 시라큐스대학교에서 법학 박사를 받아 한성기업 임준호 대표와 시라큐스대학교 동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임 대표는 시라큐스에서 경제학부를 졸업했지만, 둘의 나이 차이는 37살. 실제로 친분 관계가 있을 리는 만무하다.
올해는 특히 에코프로그룹을 중심으로 한 이차전지 관련주를 시작으로, 세계 최초로 국내 개발됐다는 상온 초전도체 테마, 국내에서 확산 중인 빈대 관련 종목 등 각종 테마주 광풍이 일었다. 덕분에 국내 증시에서 올해 들어 지난 15일까지 '투자경고 종목'으로 지정된 종목 수는 215건으로, 지난해 연간 지정 건수(143건)보다 50.4%나 늘어났다.
너도나도 주가 급등을 노리고 본업과 무관한 테마주 관련 신사업 진출을 공시하고 나섰다. 고기를 굽는 주방용 가전 생산기업이 이차전지 사업에 진출한다고 사업목적을 추가했고, 빈대 살충제는 만들지도 않는데 빈대 박멸 관련 테마주가 되는 기업 등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총선을 넉 달가량 앞둔 데다 연말 '박스피' 시장이 지겨워진 투자자들이 정치 테마주에 올라타고 있는 것이다.
정치 테마주는 대체로 비슷한 경로를 따른다. 선거를 앞두고 유력 후보로 거론되면 다양한 테마주들이 굴비처럼 엮인다. 여론조사와 지지율 통계, 선거 과정에서 드러나는 후보의 강점과 약점, 루머와 팩트가 모두 먹잇감이다. 더 올라갈 것 같아서 덥석 집었는데 주가는 급등락을 반복하다 선거 뒤엔 나란히 내려앉는다. 선거에 이긴다고 해도 선거라는 재료가 소멸되면서 급락을 피할 수 없다.
정치인 테마주는 보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초단타 수익을 노리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가 낭패를 본 사람을 여럿 보았다. 개인 투자자가 실적과 관계도 없는 테마 종목의 주가 향방을 미리 알고 적시에 매매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고 보면 투기를 비난하기에 앞서 정치 테마주 자체가 우리 사회의 인맥 중시 풍조와 정경유착, 부패 등 과거의 악습을 기정사실로 두는 것이라 더 씁쓸하다.
이윤희기자 stel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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