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금리에도 "연구비 아끼지 말라"… 이 뚝심이 SK배터리 토대

정유정 기자(utoori@mk.co.kr) 2023. 12. 1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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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이노 R&D 경영 40주년
"유공에 R&D 기능이 없다니"
최종현 선대회장 일갈에
1983년 기술지원연구소 설립
자체 기술력 개발 토대 닦아
배터리·윤활기유 등 연구 기틀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왼쪽 둘째)이 1991년 울산CLX 모형 플랜트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 최 선대회장은 1983년 11월 울산공장에 기술지원연구소를 설립하며 SK이노베이션 연구개발(R&D) 경영의 초석을 닦았다. SK이노베이션

국내 최대 에너지기업 SK이노베이션은 '카본 투 그린(탄소에서 친환경으로)' 전략을 통해 배터리와 분리막 등으로 주력 품목을 바꾸며 그린에너지·소재기업으로 거듭났다. 전문가들은 '딥 체인지(근본적 혁신)'의 배경에 최고경영진의 강력한 리더십이 이끈 '연구개발(R&D) 경영'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올해는 SK이노베이션 R&D 경영 시발점이 된 기술지원연구소 설립 40주년. 매일경제는 SK이노베이션의 40년 R&D 경영 역사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정유회사로만 운영할 것이 아니라 종합에너지회사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우리도 장기적으로는 가스, 전기, 태양에너지, 원자력, 배터리 등 종합에너지와 관련된 모든 사업을 해야 한다."(고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국내 1위 정유회사로 꼽히는 SK이노베이션의 R&D 경영이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1980년 최종현 선대회장이 이끌던 선경이 당시 국내 최대 기업 중 하나였던 유공을 인수하고, 3년 뒤인 1983년 11월 울산 공장 안에 기술지원연구소를 설립한 것이 SK R&D 경영의 시초다.

1962년 미국 정유기업 '걸프'와 합작해 출범한 유공은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걸프가 합작을 청산하고 빠져나간 뒤 민영화를 거치게 된다. 박상훈 전 SK 부회장은 "걸프와의 합작이 이어지던 때까지는 기술 연구보다는 투자 수익이 목표였다"며 "SK에 인수된 이후에야 자체 기술 개발이 진행됐다"고 회상했다.

최 선대회장은 1981년 1월 유공 사장에 취임하면서 '유공 삼무론'을 외쳤다. 삼무론은 새로운 설비, 복리후생 시설, R&D 등 세 가지가 없음을 지적하는 발언이다. 1980년 12월 유공을 인수한 뒤 현장을 처음 찾아 R&D 기능 부재를 지적한 것은 당시로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유공은 1983년, 100억원의 자금을 투입해 울산 공장 안에 연건평 5000㎡(약 1500평) 면적의 연구소 시설을 지었다. 최신 연구 장비를 갖추기 위해 투입한 자금도 85억원에 달했다.

'기술지원연구소'로 이름을 지은 이유는 생산 현장에서 우수한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일이 우선이고, 연구소는 이를 '지원'하는 곳이라는 최 선대회장의 의지가 담겼다. 이로 인해 기술지원연구소는 초기에는 품질 개선과 공정 효율화에 집중하는 한편, 외국 기업들이 알려주지 않는 핵심 공정 기술도 차츰 개발해 나갔다. 대표적인 기술 사례로는 저품질유에서 윤활유의 주원료인 '윤활기유'를 생산하는 기술, 리튬이온배터리와 여기에 필요한 분리막을 만드는 기술, 바이오, 석유화학 제품 등 다섯 가지가 꼽힌다.

SK이노베이션이 R&D 경영을 본격 시작한 해는 1983년으로 꼽히지만, 이전에도 최 선대회장은 R&D 정신을 SK그룹에 불어넣고자 노력했다. 최 선대회장이 유공을 인수하기 전인 1976년, 200억원의 거금을 투자해 선경화학을 설립하고 폴리에스테르 필름 개발에 나선 사례다.

당시 선도적인 기술을 보유한 일본 기업 등에서 기술을 전수받기 어려워 회사 내에서 회의론이 일었음에도 최 선대회장은 뚝심 있게 폴리에스테르 필름 개발을 밀어붙였고, 결국 1978년 개발에 성공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회고록을 살펴보면 당시 부채가 400억원에 달했고, 이자율이 25%에 달해 연 이자만 100억원을 냈다는 대목이 있다"며 "그럼에도 자체 기술 개발을 강조한 것이 지금의 R&D 경영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선대회장이 R&D 경영에 몰두한 것은 기업가정신과도 맞닿는다. 최 선대회장은 한 특강에서 '가득액(稼得額)'을 소개했다. 가득액은 수출하는 제품 가격에서 그 제품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원자재의 수입 가격을 뺀 금액을 말한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에서 가득액이 많다는 것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최 선대회장은 "폴리에스테르 원료를 0.7달러에 수입해 섬유를 수출하면 1~2달러를 받는다. 반면 필름을 만들면 자본집약도와 기술집약도가 높기에 4~7달러를 받을 수 있다. 필름으로 비디오테이프를 만들면 20~30달러의 가득효과가 있다"고 1983년 한 강의에서 밝혔다. 기업이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불확실한 때에도 공격적인 R&D 투자를 집행해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는 기업가정신의 사례로 꼽힌다. 기술지원연구소는 현재의 환경기술연구원까지 이어지며 R&D 경영의 중심 축을 담당해왔다. R&D 경영으로 탄생한 대표 제품이 1985년부터 투자해온 배터리다.

최 선대회장이 지시한 '에너지 축적 배터리'를 구현하기 위해 1986년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1991년에는 본격적으로 배터리를 개발해 1991년에는 태양전지를 이용한 3륜 전기차까지 개발하는 성과를 거뒀다. 지금의 SK온 리튬이온배터리 기술력은 1986년부터 쌓인 결과물이다.

[정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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