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표 지렛대로 실력저지…EU 만장일치 시스템 위협, 헝가리 리스크
전문가들 "오르반 총리, EU 구조의 문제…내부서 분열·마비 위험 키워"
(서울=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헝가리의 반대로 우크라이나 장기지원 예산안 처리가 무산되면서 특정 회원국의 몽니로 주요 정책결정이 좌초되는 EU의 난맥상이 드러났다고 17일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EU는 지난 1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2027년까지 우크라이나에 500억 유로(약 71조원)를 EU 예산에서 지원하는 안건을 논의했으나 단 한 표의 반대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전체 27개 회원국 가운데 헝가리가 홀로 반대해 안건 가결에 필요한 회원국 만장일치 동의를 막았기 때문이다.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는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협상 개시 안건에 대해서는 사전동의 아래 자리를 비우는 방식으로 사실상 타협했지만, 우크라이나 장기지원 예산안에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NYT는 오르반 총리의 거부권 행사로 인구 1천만에 불과한 소국인 헝가리가 전체 인구가 4억5천만명에 이르는 최대 경제블록인 EU의 주요 의사결정을 그르쳤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독일 출신의 다니엘 프룬트 유럽의회 의원의 표현을 인용해 오르반 총리가 거부권을 "끊임없는 갈취와 협박 게임을 위한 파괴적인 무기로 받아들였다"고 지적했다.
EU는 소국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주요 사안의 결정을 회원국 만장일치로 내리도록 하고 있다. 회원국들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회원국 지도자들은 거부권 실제 행사는 고사하고 이를 쓰겠다고 위협하는 행위조차 피하는 데 비해 오르반 총리는 이를 악용하고 있다고 NYT는 짚었다.
EU 내 대표적인 친(親)러시아 국가인 헝가리는 앞서 여러 차례 EU 차원의 우크라이나 지원 결정이나 대러시아 제재에 어깃장을 놓았다.
이를 두고 오르반 총리가 자국에 대한 기금 지원을 동결한 EU로부터 양보를 받아내려 우크라이나 카드를 지렛대로 쓰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실제로 이번 정상회의 전날인 지난 13일 EU는 헝가리에 배정했으나 규정 위반 등으로 주지 않고 있던 300억유로 가운데 102억유로 지급을 재개하기도 했다.
NYT는 그러나 오르반 총리가 지원금보다 더 큰 야심을 추구하기 위해 거부권을 통해 EU 의사결정을 마비시키려 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자유주의와 법치, 언론의 자유 등 EU가 추구하는 가치에 반기를 들고 이민자나 젠더 문제에 대항하는 '수호자'로서 자리매김하도록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신문은 그러면서 이전까지 러시아 편에 서면서도 막판에는 대(對)러시아 제재를 받아들이며 다른 회원국과 보조를 맞춰 온 헝가리가 이번에는 거부권을 행사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EU의 핵심 정책을 정면으로 공격했다고 지적했다.
영국 소재 싱크탱크 유럽개혁센터(CER)의 찰스 그랜트 소장은 "무서운 점은 오르반 총리가 실제로 혼란과 무질서를 야기해 EU를 안에서부터 파괴하기를 원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랜트 소장은 오르반 총리가 "이전에는 더 거래적이었지만 브뤼셀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가 전보다 더 비합리적이고, 호전적이며, 자신감 넘치고, 파괴적으로 됐다고 말한다"고 덧붙였다.
정치 컨설팅업체 유라시아그룹의 무즈타바 라만 이사도 오르반 총리의 '나 홀로 반대' 행보를 두고 헝가리와 EU의 관계가 "회복 가능한 단계를 넘어 궁극적으로 한계점을 향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라만 이사는 헝가리가 EU의 가치와 점점 멀어지면서 오르반 총리가 갈수록 더 이단적이고 극단적 행동을 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오르반 총리는 EU의 구조적 문제"라고 말했다.
물론 오르반 총리가 당장 EU에서 이탈할 가능성은 떨어진다. 헝가리는 EU에서 1인당 지원금을 가장 많이 받아가는 국가이기도 하다.
다만 유럽 내 반(反)이민 정서가 높아지는 가운데 내년 여름 치러지는 유럽의회 선거에서 오르반 총리와 궤를 같이하는 극우 세력이 득세할 경우 EU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데 있어 더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NYT는 지적했다.
불가리아 싱크탱크 자유전략센터(CLS)의 이반 크라스테프도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에서 "EU가 오르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분열과 정치적 마비 위험성이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EU가 헝가리처럼 일부 회원국의 몽니를 막기 위해 만장일치 시스템을 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EU에서는 회원국별 인구를 반영해 가중치를 두고 과반수 찬성 등으로 의사결정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EU조약 자체를 바꿔야 하며, 이러한 위험부담을 기꺼이 지려고 할 지도자는 없다고 NYT는 덧붙였다.
inishmor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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