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손' 수익보전 위해 수천억 돌려막기…금감원 철퇴에 증권업계 '비상'
문제 지적된 만기미스매칭·장부가평가 시스템 개선…손해배상에는 '소극적'
(서울=뉴스1) 박승희 기자 = 금융감독원이 그간 '큰손' 대형법인 고객을 놓치지 않으려 무리하게 손실보전을 해왔던 증권사들을 향해 칼을 빼들었다. 증권사들이 일임형 자산관리 상품인 채권형 랩어카운트(랩)와 특정금전신탁(신탁) 상품에서 '돌려막기'로 고객 손실을 대거 전가한 사례를 다수 적발, 관련자를 수사의뢰한 것이다. 감독당국이 철퇴에 관행적으로 해왔던 '짬짜미' 거래가 막히자 증권사들은 뒤늦게 시스템 개선에 나섰다.
1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최근 9개 증권사에 채권형 랩·신탁 업무실태 관련 집중점검을 실시한 결과 업무처리 관련 위법사항 및 리스크 관리‧내부통제상 다수의 문제점이 잠정 확인됐다.
◇법인고객 유치하려 실적배당형 상품 원금보장형처럼 판매…시장 변하자 손실 급등
채권형 랩·신탁은 증권사가 고객과 1대1 계약을 맺고 자산을 운용하는 일임형 자산관리 상품이다. 여러 투자자들의 자산을 모아 집합 운용하는 펀드와 달리, 개별 고객의 투자 목적과 자금 수요를 고려한 단독 운용이 가능해 대규모 자금을 운용하는 법인 고객의 단기자금 운용 수단으로 주목받았다.
증권사들은 기업·기관 등 법인 고객의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채권형 랩·신탁을 적극 활용했다. 실적배당형 상품인 상품을 사실상 원금 보장형으로 팔아온 것이다. 금리가 오르면 채권 가격이 떨어져 손실을 보게 되는데, 증권사들은 수익률 보전을 위해 만기미스매칭으로 높은 수익률을 제시한 뒤 계약 만기 시점에 타 계좌에 장부가로 매각하는 방식을 활용해왔다.
예컨대 1년짜리 랩에 만기가 4년인 채권을 담아 이자율을 타 상품보다 높이고, 1년이 지나 환매할 때가 다가오면 타 증권사에게 4년짜리 채권을 되사오는 조건으로 맡기는 '파킹' 전략을 활용했다. 이후 과거 타 상품에서 파킹해뒀던 채권을 장부가대로 되사는 '자전거래'로 자금을 돌려줬다.
이러한 방식은 꾸준히 신규 고객이 들어오고 금리가 하락하는 상황에선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금리가 급등하고 레고랜드 사태 등으로 채권가격이 급락하며 상품 손실이 확대됐다. 고객들은 환매를 요구했으나, 기업어음(CP) 등 편입자산의 시장 매도가 어려워지며 환매가 지연됐고, 증권사들이 회사 고유자산 등으로 기업 고객 수익률을 보전해줬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증권사끼리 자전거래로 고객간 5000억원 규모 손실 전가"…증권사별로 수백~수천억원 규모
이에 금감원은 지난 5월부터 하나증권과 KB증권에 이어 미래에셋증권,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키움증권, 교보증권, 유진투자증권, SK증권 등 9개 사에 대해 영업관행 집중 점검을 실시했다. 9개 사 전원 불법 행위가 적발됐으며, 불법 자전거래를 통한 손실전가금액은 증권사별로 수백~수천억원 규모로 드러났다. 이외 계약조건을 위배하는 등 불법행위도 적발됐다.
A증권사는 만기가 도래한 고객 계좌에 들어있는 CP를 시가보다 비싸게 B증권사에 매도하고, B증권사의 유사 CP를 자사 내 만기가 도래하지 않은 계좌에서 비싸게 사는 방식으로 손실을 전가했다. 또 다른 증권사는 지난해 7월 이후 타 증권사와 6000번 이상의 연계‧교체거래로 특정고객 계좌 CP를 다른 고객 계좌로 고가 매도해 5000억원 규모의 손실을 고객 간에 전가했다.
증권사들은 목표 수익률 보장을 위해 자기 자본을 동원하기까지 했다. 한 증권사는 타 증권사에 가입한 신탁계좌로 자사 고객 랩·신탁 규모를 고가 매수해 1100억원 규모의 이익을 제공했다. 또 다른 증권사는 자사 설정 펀드를 활용해 고객 랩·신탁을 고가에 사들여 700억원 규모 이익을 제공했다. 같은 투자자 계좌끼리 자전거래를 통해 목표 수익률을 달성하는 방식도 활용했다.
금감원은 비정상적인 가격의 거래를 통해 고객에게 손해를 전가한 행위는 판례상 업무상 배임 소지가 있는 중대 위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고 9개 증권사의 운용역 약 30명에 대해 수사의뢰하기로 했다. 운용상 위법행위로 손실이 발생한 랩·신탁 계좌에 대해서는 금투협회와 증권업계가 협의해 객관적인 가격 산정 및 적법한 손해배상 절차 등을 통해 환매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금감원 칼 빼들자 '만기매칭·시가평가' 뒤늦게 자정나선 증권사들…손해배상은 '소극적'
그동안 증권사들은 관행적인 채권 돌려막기를 통해 손실보전을 돌려막을 수 있었다. 당장 만기가 도래한 투자자는 손실을 보지 않고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고, 만기가 남은 투자자 계좌는 평가 손실이 발생하지만 증권사가 같은 방식을 통해 다음 투자자에 대해서도 돌려막기를 할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신규 투자자가 줄어든 데다 금융감독당국까지 관행적 불법행위를 엄벌하겠다고 나서며 이 방식은 지속할 수 없게 됐다.
금감원 조사가 시작된 뒤 대다수 증권사들은 자정작업에 나섰다.
하나증권은 신탁은 상품에 정해진 것보다 6개월 이상 긴 채권을 담지 않고, 랩은 편입 자산 평균 만기를 6개월 이내로 유지하기로 했다. 또한 모든 자산에 대해 분기 단위로 시가평가해 고객에게 고지하는 등 내부통제를 강화했다. NH투자증권도 잔고에서 시가평가를 함께 제공하고, 만기매칭형상품만 내놓고 있다. 교보증권 또한 미스매칭형 상품은 지양하고 새롭게 내놓는 상품은 만기매칭형으로 채우고 있다. SK증권은 지난 1월부터 미스매칭 상품 판매를 중단했다.
금융투자협회에서 진행된 '금융투자업계 신뢰 회복을 위한 윤리경영 선포식'에서 발표된 선포문 및 실행방안에도 '랩·신탁 불건전 영업관행 근절을 위한 내부통제 강화'가 담겼다.
다만 손해배상에 대해서는 대부분 소극적인 모습이다. NH투자증권은 지난 9월 채권형 랩·신탁 관련 투자 손실 중 당사 귀책 사유가 있다고 판단되는 금액 100억원대에 대한 선제적인 손해배상을 마쳤다. SK증권도 일부 금액에 대한 손해배상을 완료했다. 이외 증권사들은 최종 결과를 기다리며 관련 발표를 주저하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잠정 발표만 나온 상황이라, 수사 의뢰된 운용역에 대한 최종 결론이 나고 내부 검토를 거쳐 배상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seungh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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